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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07호] 나는,광고가 아프다 _칼럼 서한나
영화관에서는 광고 보는 것도 재미있다. 상영 전 10분 간 틀어 주는 광고 말이다. 나는 상영관에 미리 들어가서 얌전히 앉아있기를 좋아하는 관객이라, 눈을 끔뻑거리면서 열심히 광고를 본다.
그중엔 나를 화나게 하는 광고가 하나 있다. 어느 기업 광고라고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으니, 힌트를 드리겠다. ‘춤추는 할머니’가 등장한다. 발랄한 노래와 함께 춤추는 할머니가 화면에 뜨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느낄까 궁금해서 재빠르게 주변을 살핀다. 반은 유쾌하게 웃고 반은 표정이 없다. 내가 그러고 있는 사이에 춤추는 할아버지 광고로 이어진다.
할아버지 뒤로 이런 글이 뜬다. “지금 여러분은 든든한 노후의 기쁨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춤을 보고 계십니다.”
맙소사. 얄미움 끝판왕이 나타났다. 당신들만 노후 대비 든든하게 해 놓으면 다야? 할머니가 생글생글 웃을수록, 할아버지의 몸놀림이 가벼울수록, 나의 분노 게이지가 상승했다. 영화가 끝나고 친구에게 물었다. 그 광고를 어떻게 보았느냐고. 반응은 이랬다. “할머니 춤 잘 추시더라.” 시시해. 다른 친구에게 물었다. “보험회사에서 자기네 보험 들으라고 만든 광고잖아. 그게 왜?”
보험회사는 보험 상품을 더 잘 팔기 위해서 광고를 만들었다. 제작자에 빙의해서 생각해 보면 그건 잘 만든 광고다. 그래서 문제야.
때는 2010년.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던 시절. 대학을 수시로 가네 마네, 교실은 사방이 정신이 없었고 나를 포함해서 수시에 합격할 가능성이 현저히 낮은 아이들은 어수선한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다가올 수능시험에 올인하기 위해 마음을 다잡으며 앞에 놓인 문제집을 풀어나갔다.
그때, 교실 앞문이 드르륵 열리더니 다른 반 친구가 해맑게 웃으며 외쳤다. “나, 수시 합격했다!”
춤추는 보험 광고와 앞의 저 상황은 사실 같다. 이제 노인은 노후 대비를 하지 않아도 되고, 수시에 합격한 학생은 다가올 수능 시험 준비를 할 필요가 없으며, 그걸 지켜보는 사람들은 저들을 부러워한다. 그러니 열심히 일한 자, 리드미컬하게 춤을 출 수밖에.
내가 볼 때, 광고 속 할머니와 교실 속 친구는 소시오패스가 분명하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신경 쓰지 않으니까. 장난이다.
한국의 수험생은 자기가 원하는 대학에 가고 싶어 한다. 한국의 노인은 안정적인 삶을 원한다. 당연하다. 다수의 한국인이 수시와 수능이라는 제도를 통해 대학에 가고, 다수의 한국인이 보험이나 연금제도를 통해 미래를 위한 생활비를 묶어 둔다. 당연한가?
부모의 경제력과 자녀의 수능 점수 사이에는 모종의 유착이 있고, 수능 이후의 삶은 각각 포장도로와 비포장도로로 나뉜다. 훗날 차선 변경을 꾀하기도 어렵다. 어디서 구린내가 폴폴 나네.
네이버에 ‘노후 대비’를 검색했더니 연관검색어에 ‘40대 노후 대비’가 떴다. 우리는 40대 이전까지 ‘노전’을 준비하고 40대 이후에는 ‘노후’를 대비하면서 산다. 언제부터 삶이 연명과 같은 말이 되었지? 아무도 큰 틀을 지적하지 않는다. 그 안에서 노는 듯 싸운다.
현재를 일부 희생해서 미래를 보장하려는 삶의 자세가 저마다 선택한 ‘합리’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그것 말고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게 비극이다. 게다가 따지고 보면 보험이 필요한 쪽은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인데, 매달 보험료를 내려면 수입에서 그만큼의 여유분이 있어야 한다.
마을버스 3번에서 이런 대화를 들은 적이 있다. 할머니가 기사님을 향해 말씀하셨다. “젊은 애들 취직이 안 된다고 하지만, 우리같이 늙은이들은 어디에서 불러 주지도 않아.”
‘노후 대비’라는 말은 슬프다. 노후를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우리 모두 공유하고 있다는 거니까. 광고가 말하는 ‘든든한 노후의 기쁨’을 바꾸어 말하면 이 세상에서 믿을 것은 든든한 내 돈뿐이라는 말이니까. 광고 속 할머니가 즐겁고 상쾌하게 춤을 출수록 그 광고는 섬뜩하다. 보험금 없이 행복한 노후를 보내는 방법 같은 건 죽어도 광고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