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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95호] 원도심 문화공간 읽기
옛 충남도청에서 시작한 걸음은 뒷문을 통해 성모병원 앞을 지나 테미 관사촌으로 이어졌다. 관사촌에서 멀지 않은, 수도산 자락에 자리한 대전테미예술창작센터로 가는 길 또한 자연스러웠다. 아기자기하고 정겨운 테미로 골목을 두리번거리며 지나다보니 어느새 길 끝에서 대전예술가의집을 만날 수 있었다. 대전전통나래관으로 이동하기 위해 차량이 있는 옛 충남도청으로 되돌아오는 길까지 합하면 3km는 족히 넘는 길을 걸었다.
그냥 걸었다면 중간에 주저앉고 말았을 거리인데, 힘든 줄도 몰랐다. 각 공간을 잇는 길이 품은 운치를 즐기고, 박은숙 대전문화연대 대표의 이야기를 듣고, 그를 통해 공간에 관한 서로의 새로운 생각과 관점을 나누다 보니 어느덧 목적을 둔 곳에 도달해 있었다.
말하자면, 이번 투어는 각각 떨어져 있는 원도심의 귀중한 문화공간들을 잇는 길을 발견하고, 사이사이에 이야기를 불어넣어 하나의 그림을 그리는 여정이었던 셈이다. 80여 년의 세월을 견딘 근대의 흔적이 특별하게 느껴지는 옛 충남도청이나 테미 관사촌,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지어진 테미예술창작센터나 대전예술가의집을 들르며, 참가자들은 각 건축물과 내부 공간을 들여다보며 매번 감탄을 자아냈다.
하지만 아쉽게도 보통의 대전 시민이나 대전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이러한 공간은 발견되지 않는다. 공간을 잇는 길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럴 때 각각의 공간은 일부러 찾아야 할 유의미한 장소가 되기 힘들뿐더러 존재 자체를 알기도 쉽지 않다.
투어에 참가한 대전시 도시재생정책과 박찬진 주무관은 “무작정 걸어오기에는 스토리가 약하다. 중간중간에 볼거리나 먹거리 쉼터를 만들어 각 공간을 잇는 동시에 지치지 않고 걸을 수 있는 코스를 만들면 좋겠다.”라며 의견을 내기도 했다. 또한 전체를 연결하는 도보체계를 만들어 해설사 없이 혼자서도 충분히 걸을 수 있는 코스가 되면 좋겠다는 의견도 나왔다.
옛 충남도청
방문한 각 장소마다 활용방안에 관한 짧은 토론이 벌어졌다. 첫 번째로 들른 곳인 옛 충남도청사에서는 유독 많은 얘기가 오고갔다. 충남도청 이전논의가 시작되면서부터 활용방안에 관한 수많은 논란이 거듭돼 왔고, 지난 12월 9일 ‘도청이전특별법’이 통과되면서 이를 기점으로 활용방안에 관한 활발한 논의가 이뤄질 것으로 기대해 왔다. 1932년에 지은 옛 충남도청사는 등록문화재 18호다. 본관 1층에는 대전근현대사전시관과 충남도청 역사관이 있으며, 2층은 대전시장 제2집무실과 전시공간 등으로 쓰이고 있다. 일부 공간에는 대전시 원도심재생본부가 입주해 있다. 대전문화연대 장동환 공동대표는 “3층은 대부분 빈 공간이고 장시간 사용하지 않아 회복이 필요한 상태”라며 “본관과 후면 부속건물이 둘러싸는 넓은 중정 공간은 공원 형태로 보수하거나 잔디공원화 한다면 다양한 용도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의견을 냈다.
테미 관사촌에는 총 열 개의 관사가 모여있다. 여섯 개동은 1930년대에 지었고, 네 개동은 1970년대에 지었다. 플라타너스 나무를 앞에 두고 양쪽으로 죽 늘어선 관사가 자리한 나지막한 언덕을 걷자니, 시공간을 건너뛴 듯 이색적인 기분이 든다. 충남도지사가 거주하던 제1호 관사와 정무부지사 관사를 들렀다. 대전시는 지난 해 5월 충청남도와 옛 관사촌 부지 ‘5년 무상임대’ 계약을 체결했고, 이후 7월, 관사촌을 총 4개 구역으로 나눠 창작, 실험 공간으로 조성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뚜렷한 그림은 나오고 있지 않다. 제1호 관사 안 다다미방에서는 참가자들 간 관사촌 활용방안에 관해 느닷없는 토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대전문화연대 박은숙 공동대표는 “열개 정도의 관사촌만으로는 활용이 어려우며, 테미 전체를 활용해 이를 연결하는 큰 그림을 그려야 할 것 같다. 충남도는 고택을 활용해 고택 스테이를 잘 운영하고 있는데, 그런 사례를 참고해봐도 좋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
제1호 관사 뒷뜰
제1호 관사 내부공간
작년 3월 개관한 테미예술창작센터는 옛 테미도서관을 리모델링해 만든 시각예술 레지던시다. 다양한 지역과 나라에서 모인 입주 예술가가 이곳을 플랫폼으로 지역 작가 및 주민과 교류하고 지역에 관심을 둔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지하 서고를 개조해 전시실로 활용하고, 소리가 울리는 물탱크실을 사운드아트 전시실로 활용한 점 등이 재미있다.
박은숙 대표는 역시 “테미예술창작센터라는 공간, 입주 작가와 시민 사이에 전시 이외에도 다양한 접점이 생긴다면 좋겠다.”라며 대전시의 주요 문화공간으로서 폭넓은 역할을 하길 기대했다.
이어 방문한 대전예술가의집은 오는 3월 27일 개관 전시를 앞두고 있다. 옛 시민회관 자리에 3년에 걸쳐 건립됐다. 원형으로 지은 내부 공간 모두 둥근 형태를 하고 있는 점이 인상적이다. 1층에 있는 블랙박스형 공연장인 누리홀, 3층의 독립되어 있으면서 이어진 여덟 개의 전시실, 중앙 정원 등 재미있는 공간이 많다. 앞으로 원도심 활성화에 어떤 역할을 할지 기대되는 곳이다.
소제동에 위치한 대전전통나래관은 마지막으로 들른 장소였다. 무형문화재 기능분야를 보존하고 전승하는 역할을 하며 시민을 대상으로 연중 전수교육, 상설전시, 기획전시 등을 한다. 그러나 주변을 잇는 인프라가 부족해 많은 시민이 찾기에는 다소 접근성이 떨어지는 점이 문제로 남아있다. 기획전시실은 특별한 때를 제외하곤 자주 비어있는 상황이었다. 대부분의 전시목적에 제한없이 저렴한 대관료로 이용할 수 있지만, 이러한 사실이 잘 알려지지 않은 듯했다. “독립된 갤러리처럼 전시실의 이름을 지어 알리는 것도 방법이지 않겠느냐.”라는 의견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어 보였다.
다섯 곳의 공간 중 어느 곳 하나 쉽게 발걸음을 돌린 곳이 없었다. 모든 참가자들은 공간을 천천히 둘러보고 때로는 오래 머물며 떠난 자리를 뒤돌아봤다.
박찬진 주무관은 “원도심 문화공간이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도 잘 찾아오지 못했다. 모든 공간이 새로웠고, 사람들이 잘 모르는 곳에 좋은 공간이 많은데 이것들을 잘 연계해서 관광지화 한다면 좋겠다. 테미예술창작센터에도 크든 작든 늘 전시물이 있었으면 한다. 그렇게 우리가 그곳에 가면 비어있지 않고 늘 문화가 있는 공간으로 활용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테미예술창작센터 전시실에서
대전예술가의 집 누리홀
대전전통나래관에서 바라본 소제동 관사촌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