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95호] 글씨 쓸 땐 아무 말 안 해도 되니까

‘선팅 글씨’ 쓰는 추교은 씨

이거 한 지 40년 가까이 됐어. 사람이 뭐든지 가는 날까지 완벽한 건 없어요. 미완성이지. 나는 학교 다닐 때 공부 하나도 못했어요. 놀기만 좋아했지. 근데 지도를 잘 그렸어요. 예전에 극장 미술부에도 있었고요. 춥냐고? 안 추워요. 한겨울에 눈 내릴 때 서리 낀 유리에다 대고 일한 적도 있는 걸.

어렸을 때 꿈은 평범하게 사는 거였어요. 지금껏 평범하게 살았다고 볼 수 있지. 아무 일 없었으니까. 이 일이 적성에 잘 맞아요. 조용하니까. 일할 때 아무 말 안 해도 되니까. 처음에는 자 대고 정자체로 글씨 썼지. 지금처럼 쓴 지는 한 15년 됐나. 이렇게 쓰면 남이 흉내를 못 내니까. 나만의 글씨체 만들고 싶었어요. 시간이 걸렸지. 연습 더 해야 돼.

부드러우면서 모양을 특이하게 낼 수 있는 구상을 하고 싶지. 물에 돌을 던지면 탁탁 튕기면서 물결이 퍼지잖아. 그리고 새들이 날아갈 때 물방울이 떨어지는 듯한 그런 글씨 쓰고 싶어. 만족이라는 건, 남들이 봤을 때 잘됐다 하면 만족이지 뭐.

요즘 기계로 나온 글씨들 보면 그렇게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글씨가 딱딱하고, 옛날로 얘기하자면 초보자들이 쓰는 기초 단계야.

이름? 내 이름이 뭐냐고? 이름까지 알려줘야 해요?

  

  

  
  
며칠 날이 풀렸다 다시 추워진 어느 하루, 추교은 씨는 전기 조명 가게 유리에 ‘선팅 글씨’를 쓰고 있었다. 유리에 시트지를 붙이고 면도칼로 글씨를 오려 나머지 부분을 떼어 내는 작업은, 글씨를 붙인다고 하기도 뭣하고 글씨를 쓴다고 하기도 뭣했지만 추교은 씨는 ‘글씨를 쓴다’고 표현했다.
밑그림도 없이, 글자 수 대로 네모나게 잘라붙인 시트지 위로 면도칼이 여러 번 오고 간다. 곡선을 그렸다가 직선으로 뻗었다가 면도칼을 쥔 손이 바쁘다.
지금이야 밑그림도 없이 면도칼로 바로 글씨를 쓰지만, 처음 선팅 글씨를 배울 때는 ‘기술자들’이 하는 모습을 보고 자를 대고 글씨를 배웠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다른 사람에게 속마음을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추교은 씨는 유리창에 붙어 서 조용히 글씨 쓰는 이 일이 적성에 맞았다.
이곳저곳 바쁘게 돌아다니며 글씨를 썼다. 일을 꽤 많이 한 적도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기계’가 사람 손을 대신하더니 반듯한 선팅 글씨가 거리에 가득 찼다. 추교은 씨는 이러한 변화가 안타깝기만 하다. 자신의 글씨는 다르다며, 누가 봐도 자신의 글씨인지 알 수 있다며 ‘글씨’에 관해 이야기하는 추교은 씨는, 할 수 있을 때까지 ‘글씨를 할’ 거라고 했다.
반듯한 글씨들 사이, 추교은 씨는 자신만의 글씨를 남기기 위해 이 가게, 저 가게 직접 돌아다니며 주인에게 샘플을 보여준다. 글씨를 보고 자신 가게에도 해달라며 일이 들어오기도 한다. 그렇게 일을 찾아 가게 유리창에 쓱싹쓱싹 글씨를 모두 쓰고 나면 또 다른 유리창을 찾아 떠난다. 한쪽 어깨에는 밀대와 시트지, 우산, 물통 같은 것을 묶어 매고서.

글 사진 성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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