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07호] 초가 타는 시간_김선작가

촛불 앞에서의 몽상은 한 폭의 그림의 모양을 이룬다. 
불꽃은 우리들을 깨어 있게 하는 저 몽상의 의식 속에 붙들어 놓는다. 
사람이 불 앞에서는 잠을 자지만 촛불의 불꽃 앞에서는 잠을 자지 않는다. 
-가스통 바슐라르, 《촛불의 미학》 중
                  
                 
                     

                           

초가 타는 시간_김선작가 

전시장으로 들어서자, 어둠 속에서 기척을 하는 것은 종소리와 촛불의 미세한 흔들림뿐이다. 종소리가 끝나고 이어 엠비언트 음악이 귓전을 울린다.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촛불의 흔들림을 따라 어두운 전시장을 돌아보면 보고 있는 것, 듣고 있는 것이 모두 사라진 듯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고요하고 적막하다. 분명 전시장에 몇이 함께 있는데 혼자인 것처럼 많은 것이 지워진다. 그렇지만 잠을 자는 것과 같은 느낌이 아니고 무언가가 깨어나는 느낌이다. 

                           

                         

빛과 그림자

음악이 다시 종소리로 바뀔 때쯤, 김선 작가가 조명을 켠다. 어두움에서 밝음으로, 찰나의 순간에 많은 것이 전환된다. 다시 밝음 속에서도 초는 계속 탄다.
조명을 켜니 설치된 작업이 눈에 잘 들어온다. 김선 작가가 세 번째 개인전 《MEMENTO MORI》에서 선보인 것은 지난 작업의 연장선에 있는 투각된 도자 촛대를 비롯한 설치 작업이다. 사각 촛대 안에 있는 촛불은 투각된 모양에 따라 순수성, 영성을 상징하는 사슴, 나무, 새 등의 빛과 그림자가 된다. 촛대를 가까이서 들여다봤을 때 밝음이었던 형상은, 몇 발짝 뒤로 물러나 보아도 밝음이다. 하지만, 시야를 넓히면 그림자다. 벽면으로, 바닥으로 촛불의 그림자가 엷게 드리운다.


투각 촛대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설치됐다. 창문이 난 공간에 놓여 있기도 하며, 바닥에, 공중에 자리했다. 공중에 있는 것들은 아크릴 상자 안에 있어 마치 공중부양한 것 같다. 벽면에는 액자에 담긴 도판 작업 몇 점도 걸렸다. 
가장 눈길을 붙잡는 작업은 전시장 제일 안쪽에 있다. 검은 장막 뒤로 공중에 존재하는 투각 촛대, 그 아래로는 의자가, 그 아래로는 거울이 놓였다. 의자 위에는 사슴이 눈에 띄는 도판 작업이 놓였다. 


김선 작가가 다시 한 번 전시장 조명을 끈다. 그리고 천천히, 투각 촛대가 놓인 아크릴 상자를 돌린다. 돌아가는 촛대를 따라 벽면에 그림자가 돈다. 그림자는 촛불의 흔들림에 따라 제 모양을 바꾼다. 작가는 곧, 들고 있던 작은 라이트를 켜 촛대를 비춘다. 밝은 빛 뒤로 그림자가 더 짙어진다. 이어 작가가 거울 가까이 와 보라고 말한다. 거울을 내려다보니 발아래로 또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거울 위 공간의 반사일 뿐인데 더 깊고 끝이 없을 것만 같다. 그렇게 한참 들여다보다 어느 우연한 시점에 관객은 거울 속에서 자신의 얼굴을 발견하게 된다.

                     

                     

메멘토 모리

김선 작가의 세 번째 전시 제목은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뜻이다. 전시에서 작가의 작업은 빛과 그림자(혹은 어두움), 삶과 죽음의 이분법 안에 존재한다. 제목이 뜻하는 바처럼 작가는, 삶 안에 죽음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꽃이 아름다운 건 지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꽃이 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꽃의 아름다움에 둔감해지고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게 되겠죠. 꽃이 피고 지는 것에 봄, 여름, 가을, 겨울, 인생이 다 있더라고요.”


작가는 전시에서 우리의 죽음을 상기시킨다. 관객에게 검은 장막 뒤로 발걸음을 옮기게 하며 은근슬쩍 삶과 죽음의 경계를 체험하게 한다. 어둠 속에서의 한 체험은 관객을 경건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관객은 죽음을 기억한다는 것이 삶의 순간을 되새기는 일임을 깨닫게 된다. 빛이 있는 곳에 그림자가 있고 그림자가 있는 곳에 반드시 빛이 있다는 것이 바로 ‘MEMENTO MORI’다. 
“밤에 달을 보지만, 원래 달 자체에서는 빛이 나지 않고 태양 빛을 반사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 빛이 밤에는 우리를 비춰 줘요. 낮에는 태양의 그림자가 되었다가 밤이 되면 몸이 환해지는 거죠. 그래서 빛과 그림자는 영속성에 관한 얘기예요. 제 설치전은 모든 것이 어우러지지만, 중심부에는 투각 촛대가 들어가요. 빛과 그림자의 작업이에요.”


김선 작가가 《MEMENTO MORI》를 2월에 선보인 이유는, 겨울이 조금씩 가고 봄이 오는 때가 바로 이때라는 생각 때문이다. 인생에서 어려운 시기는 ‘깜깜함’과 ‘겨울’로 표현되곤 하는데, 작가는 깜깜하고 추울 때일수록 생명력이 응집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녀의 아이디도 ‘Winter Owl’, 겨울 부엉이다. 겨울 부엉이는 겨울의 어둠을 꿰뚫어 본다. 전시장에 펼친 빛과 그림자도 결국엔 하나라고, 작가는 이야기한다. 빛이 그림자고, 빛의 그림자다. 그림자 안에는 빛이 있다.

             

                 

초가 타는 시간

김선 작가가 전시장 안에 펼쳐 놓은 하나의 세계는 매 순간, 모습을 달리한다. 전시장의 제습기 바람에 따라 혹은 관객의 움직임에 따라 장막이 흔들리는 모습이 달라지며 초가 타는 동안 그림자의 높이도 달라진다. 초의 흔들림에 따라 그림자도 춤을 춘다. 바닥부터 벽면, 천장까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천천히 한 세계를 음미할 수 있다. 그렇게 했을 때 관객도 자신이 미처 알지 못했던 미지의 한 영역에 가 닿을 수 있다.


전시가 그렇듯, 작가가 평소에 작업하는 방식 또한 느리다. 무형의 흙덩이에서 작가의 손으로 탄생시키는 세계는 오랜 기다림 끝에 나온다. 원하는 형태를 만들기 위해 흙을 알맞은 정도로 말리고 조각칼로 원하는 모양을 만드는 동안, 그리고 초벌과 재벌을 거치며 흙이 단단해지는 동안, 작업은 끊임없이 실패와 성공을 거듭한다. 오래 걸리는 작업은 반년 정도가 걸리기도 한다. 그렇게 세상에 내놓은 작업은 깨지지만 않는다면 영원에 가까운 시간 동안 존재할 수 있다. 이런 매력에 끌려 김선 작가는 도자 작업을 이어 간다. 


느리더라도, 고민하는 손으로 몰두한다. 그렇게 보낸 시간은, 전시장에서 다른 시간으로 이어진다. 종소리와 음악 소리가 흘러가고 촛대와 함께 촛불이 흔들리며 그림자는 제 높이를 키우며 옅었다가 짙어지기도 한다. 그렇게 시간은 계속 흐른다. 

                

                       

                

                  


 블로그 l  winterowl9.tumblr.com
《MEMENTO MORI》는 3월 12일까지 쌍리갤러리에서 관람할 수 있습니다.

글 사진 성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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