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99호] 함께니까 걷는 길

유등천 걷기

도심 한가운데서 일상을 보내는 사람들은 주말이면 삶터를 벗어나 산으로, 바다로 여행을 떠난다. 멀리 있는 자연의 아름다움이 커다랗게 보여서, 우리 곁에도 자연이 있다는 사실을 종종 잊는다. 유등천을 걷는 일은 그래서 값지다. 천천히 걷다보면 어미를 따라 줄지어 가는 새끼오리 무리를 만나기도 하고, 예쁘고 귀한 이름을 가진 꽃을 때때로 발견한다. 유등천을 걸을 때면 그렇게 몇 번이고 허리를 숙이게 된다.

혼자라면 못했을 거야

최고기온 35℃, 올해 들어 가장 햇볕이 따갑던 유월의 초여름 날 대전환경운동연합 회원들이 서부터미널에 모였다. 6월 10일은 유등천 걷기를 마무리하는 날이다. 2005년 유등천 종주 프로그램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올해 상반기 대전환경운동연합 회원과 함께 유등천을 다시 걸었다. 지난 1월부터 매달 한 차례씩 이루어진 걷기는 유등천 발원지부터 시작해 갑천으로 합류하는 마지막 지점까지가 예정된 코스다.

이날 여정은 서쪽으로는 도마동, 동쪽으로는 유천동과 맞닿아 있는 서부터미널 인근에서 유등천변을 걷기 시작해 갑천과 합치는 마지막 지점까지 약 7km 구간을 걷는 것이었다. 초여름 땡볕에 대비해 회원들은 저마다 챙모자와 긴 팔을 단단히 차려입었다. 그에 반해 동네 마실 나온 듯 가벼운 반소매를 입고 나온 기자에게 회원들은 안타까운 눈길을 보내며 한마디씩을 던진다.

“아이고, 땡볕을 걸을텐데 이렇게 입으면 큰일 나.”
갑자기 집중된 시선에 왠지 머쓱해졌지만 ‘이미 이렇게 된 걸 어쩌랴.’ 하는 마음으로 “저는 정말로 괜찮아요.”라며 헤벌쭉 웃어 보인다. 쨍한 하늘 아래 그늘 한 점 없는 천변 산책로에 발을 내디뎠다. 땀이 맺힐 틈도 없이 서늘한 바람이 아낌없이 불어온다. 혹시나 하던 두려움은 이내 사라졌다.

걷기를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야트막한 천 한가운데에 고고하게 두 발 딛고 서 있는 왜가리를 발견한다. 조금 더 가니 여름새로 알려진 중대백로가 하얀 몸을 자랑하고 섰다. “사진 찍으라고 아주 모델처럼 섰네.” 꺄르르 웃는 회원들의 손은 그 모습을 사진으로 담느라 바쁘다. 20여 분 정도 걸었을까. 태평교에 이르러 그늘진 다리 밑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한다.

“이렇게 더운 날에 누가 유등천 종주를 하겠어. 혼자라면 못했을 거야. 같이 걸으니까 걸을 수가 있지. 그래도 물가를 옆에 두고 걸으니까 시원하네.”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이네

일행을 훨씬 앞서 걷던 대전환경운동연합 이경호 국장이 커다란 나무 아래에 멈춰 섰다. 생소한 새 울음소리를 가만히 들으며 나뭇가지 사이를 유심히 살피었다. 아마도 개개비일 것이라 말한다. 개개비는 물가 풀밭이나 갈대밭에 찾아오는 여름철새로 한국에는 5월경부터 날아든다. 이경호 국장은 “개개비는 ‘갈갈찍찍’ 하고 울어요.”라고 덧붙인다. 그러자 곁에 있던 한 회원이 “나는 ‘깩깩’ 하고 우는 것처럼 들렸는데, 듣고 보니 ‘갈갈찍찍’ 하는 것 같아 희한하네.”라고 말해 주위는 웃음바다가 됐다.

어느새 무성하게 천변을 두르기 시작한 달뿌리풀을 왼편에 두고 계속해서 걸었다. 문득 고개를 돌리니 시야에는 키를 훌쩍 넘는 초록의 달뿌리풀과 파란 하늘만이 가득 찬다. 오른편으로 펼쳐진 들판에는 검은 줄무늬와 날렵한 몸매의 알락할미새 한 마리가 총총거리며 걸어다닌다. 매해 여름이면 늘 이곳을 찾았을 철새들의 이름을 난생 처음 불러보고, 또 처음으로 지긋이 들여다본다.

유난한 무더위에 발걸음이 조금씩 무거워진 정오 무렵, 이경호 국장이 또 한 번 걸음을 멈춰섰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 시선을 옮기니 황조롱이 한 마리가 가지 끝에 앉았다. 이경호 국장은 “황조롱이는 천연기념물 233호 입니다. 저 황조롱이는 수컷으로 보입니다.”라고 말했다. 회원들의 탄성을 내며 카메라를 들이대는 사이, 황조롱이는 커다란 날개를 펼쳐 곧게 하늘을 난다.

“오늘은 유독 귀한 새를 많이 보네요. 운이 좋은 날이네.”

회원들의 얼굴에 다시금 웃음이 깃든다. 유등천이 갑천과 만나는 지점을 향해 계속해서 걸을 힘을 얻는다.


글 사진 엄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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