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07호] 월요일의 비현실_칼럼 이혜정

내가 사람이라는 게 싫을 때가 있다.
나는 양복점에도 들어가 보고 영화관에도 들어가 본다.
펠트로 만든 백조처럼 시들고, 뚫고 들어갈 수 없이 되어,
근원의 물과 재 속으로 나아간다.

이발관 냄새는 나로 하여금 문득 쉰 소리로 흐느껴 울게 한다.
내가 오직 바라는 건 돌이나 양모(羊毛)처럼 가만히 놓여 있는 것.
내가 오직 바라는 건 더 이상 상점들을 보지 않고, 정원들,
상품, 안경들, 엘리베이터들을 보지 않는 것.

내 발이 싫어지고 내 손톱과
내 머리카락 그리고 내 그림자가 싫을 때가 있다.
내가 사람이라는 게 도무지 싫을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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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줄곧 암흑 속에서 뿌리로 있는 걸 바라지 않는다,
불안정하고, 길게 뻗어 있으며, 잠으로 몸서리치고,
땅의 축축한 내장 속으로, 계속 내려가,
흡수하고 생각하며, 매일 먹는 걸 바라지 않는다.

나는 너무 심한 비참을 바라지 않는다.
나는 계속 뿌리나 무덤이기를 원치 않는다,
시체들의 창고인 땅 밑에서 혼자
거의 얼어서, 슬픔으로 죽어가는 걸 원치 않는다.

그게 바로 월요일이, 내가 가책받은 얼굴로
오고 있는 걸 볼 때, 가솔린처럼 불타고,
상처 입은 바퀴처럼 진행하면서 울부짖고,
밤을 향해 가며 뜨거운 피로 가득 찬 자국을 남기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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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황색 새들, 내가 증오하는 집들 문 위에 걸려 있는
끔찍한 내장들
커피포트 속에 잊힌 틀니,
수치와 공포 때문에 울었을
거울들,
사방에 우산들, 독액(毒液), 그리고 탯줄.

나는 조용히 거닌다, 두 눈을 가지고, 구두와
분노를 지니고, 모든 걸 잊어버리며,
나는 걷는다,

(파블로 네루다, 정현종 옮김, 〈산보〉 부분, 
《네루다 시선》, 민음사, 2000)

            
                

                      

네루다는 “바다에 들어가 보고, 산에 들어가 보고, 모든 살아 있는 것에 다가가라고. 그리고 그런 엄청난 경이가 있는데, 어떻게 생명에 접근하는 걸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같은 책에 실린 대담에서 말한다. 파블로 네루다는 1904년 칠레에서 철도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네루다는 젊은 시인들에게 영사 자리를 주는 남미 정부의 전통에 따라 5년 동안 미얀마, 태국, 중국, 일본, 인도 등지에서 살았는데 이 시는 그때 쓰인 시들 중 하나이다.
                         
네루다는 초현실주의 시를 썼다. 하지만 북미와 영국,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시와 어느 정도 차이가 있는데 이에 대해 네루다는 “우리 대륙의 나라들에는 이름 없는 강들, 아무도 모르는 나무들, 누구도 말한 적이 없는 새들이 있다. 우리가 초현실적이 되는 건 쉬운 노릇인데 왜냐하면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은 새로운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남미의 자연환경에서 만나는 강과 동물, 맹수 그 자체가 이미 생동감으로 넘치며 때로 무척 비현실적인 경이와 맞닥뜨리게 하니 남미의 시인들에게 자연은 이미 그 자체로 초현실적인 대상이다. 밀폐된 방 안에서 상상으로 쓴 시와 거대한 자연을 끌어들인 시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의 시에 깔린 에너지는 ‘남미의 초현실적 자연’에서 비롯되었다.
                       
월요일을 앞둔 새벽이다. 오랫동안 책장에 꽂혀 있던 네루다의 양장 시집을 꺼내 든 건 나 자신이 앙상하게 느껴져서이다. 네루다의 시는 그 앙상함을 덮어 줄 만한 넘쳐 나는 생기가 있다. 페이지를 넘기다가 이 시에서 멈췄다. “내가 사람이라는 게 싫을 때가 있다.”
밀려 있는 업무들과 다시 시작될 월요일,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나는 내가 사람이라는 게 싫어진다. 20대에는 그게 더 심해서 일요일 밤, 코미디프로그램을 보며 거의 공포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곤 했다. 입으로는 웃는데, 가슴은 까맣게 타들어 가는 거다. 월요일이 죽음처럼 다가온다. 월요일에는 내가, 내가 아닌 게 된다.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곧 뿌리 뽑혀 어딘가로 내버려질 것만 같았다. 낯선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한 본능적인 자기 방어였을 것이다. 
                
어쩌면 내버려지길 꿈꿨는지도 모른다. 사무실 책상과 의자가 아닌, 어디, 무덤같이 고요하고 푸릇한 풀들이 돋아난 곳에 도시로부터 버려져 앉아 있고 싶었을지도. 
하지만 이 시의 제목은 월요일이 아닌, “산보”다. 
             
20대에 가장 많이 한 일 중의 하나가 거리를 돌아다니는 거였는데, 사람을 만나거나, 쇼핑을 하거나, 뭔가를 구경하거나, 영화를 보거나, 뭐 그런 기타 등등의 소모적인 싸돌아다님이었다. 대개는, 그랬다. 가만히 무슨 힘으로 그랬나 되돌아보면, “내 발이 싫어지고 내 손톱과 내 머리카락 그리고 내 그림자가” 싫어서였다. 그래서 나를 바꾸려고 애써 화장품을 사서 찍어 바르고, 옷을 사고 또 사댔다. 아무리 그래도 여전히 불안정하고 축축하며 비참했다.

시의 화자는 그렇게 싸돌아다닌다. “내가 사람이라는 게 싫”어서이다. 가벼운 절망과 비참, 권태를 안고 화자는 헤맨다. 절망에 휩싸여 세상의 온갖 속된 대상들을 마주하지 않고 피하려 한다. 그가 벗어나고 싶은 건 오직 사람인 자기 자신.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그 모두에 “내 손톱”과 “내 머리카락”, “내 그림자”가 따라다니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절망이다. “내가 사람이라는 게 도무지” 싫은 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닥에 주저앉아 중얼거린다. “나는 너무 심한 비참을 바라지 않는다.” 낙담한 그에게 다가오는 건 “월요일”이다. 비록 “상처 입은” 채 앞으로 나아가고 “뜨거운 피로 가득 찬 자국”을 남기더라도 “증오하는 집들”의 권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건 모두 “월요일” 덕분이니까 말이다. 분노를 지니고 우리는 월요일의 문을 열어젖히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모든 비현실 속으로, 낯선 내일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글 그림 이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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