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99호] 그리울 것들에 대하여…

스페인으로 떠난다고 생각하니 런던, 내 집, 내 동네, 이 모든 것이 정겹고 행복한 기억으로 돌변한다. 내가 사는 동네는 인디안 인구가 많은 편이라 ‘인도 샵’이라고 부르는 가게가 많다. 흔히 보는 소규모 슈퍼마켓들인데 인도관련 제품을 많이 팔아 인도 샵이라 부르곤 한다. 대형 마트가 멀리 있어 이 가게에서 식료품을 자주 구매했다. 야채와 과일을 싼 가격에 판매하는 이 슈퍼에서 장보는 재미를 이제서야 알아버렸는데 떠난다 생각하니 아쉽기까지 하다. 비싼 물가도 물가지만 한국에 비해 복잡한 서류 절차, 영어에 시달리고 비주류로 살며 고단하기도 했던 런던. 하지만 인정해야 한다. 런던에서 나의 지난 13년은 이민 생활의 서글픈 기억보다는 찬란하고 아름다운 추억을 선사했다는 것을 말이다. 내가 이 아름다운 도시에서 이리 오랜 시간 머물 수 있었다는 것이 축복이지 않겠는가?

2002년 처음 런던에 발을 디뎠다. 1~2년 어학연수를 생각하고 돌아갈 계획으로 왔었는데 13년을 이곳에서 지내게 되리라고는, 런던이 나의 제2의 고향이 될 것이라고는 당시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나의 30대가 오롯이 새겨진 런던.  밀려오는 많은 추억과 기억을 막상 글로 옮기려니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 지 모르겠다. 내가 아끼는 곳을 소개하는 것이 그래도 무난한 시작이 될 것 같다.  평범하지만 나를 행복하게 했던 곳들, 그들 중 네 곳을 먼저 소개한다.

  

  

# 리치몬드 파크 (Richmond Park)

녹색의 푸름이 그리울 때 평안함이 간절할 때 어김없이 찾게 되는 곳이 리치몬드 파크이다. 걸어서 모두 돌아보기에 턱없이 넓은 공원의 규모는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사람들을 압도한다. 사슴 공원이라고도 부르는 이곳에서 여기 저기 무리 지어 풀을 뜯는 사슴 떼를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런던 및 런던 인근에는 총 여덟 개의 왕립 공원(Royal Park London)이 있고 총 면적 9.55km2의 리치몬드 파크는 그 중 가장 큰 공원이다. 예전 왕족들의 여가용 사유지를 공원으로 바꾸어서 왕립 공원이라고 한다. 차로 공원 한 바퀴를 돌고 공원 안에 자리하고 있는 찻집(Tea shop)에서 밀크 티를 마시고 나면 인생 뭐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거기에 하늘이 도와 햇빛까지 내려준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기분이랄까?

  

     

  

# 킹스턴(Kingston)

킹스턴의 젊은 추억. 늦은 나이에 시작한 대학원은 버벅대는 영어로 굉장히 힘들었던 기억이다.  매주 제출해야 하는 리포트, 그룹별 토론 및 과제, 중간고사, 기말고사, 마지막 세 달은 최소 10,000자 논문에 올인! 영국 대학원은 1년 과정이 많은데 내가 전공한 마케팅은 1년 안에 다 마치기에는 굉장히 인텐시브했다. 어찌 어찌 졸업은 했지만 그저 따라 가기에 급급해서인지 사실 무슨 내용을 공부했는지 많이 생각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함께했던 친구들은 아직도 남아있다. 타이완, 태국 등 같은 아시아권 동무들과 불우한 영어의 고충을 함께하며 밤을 새우기도 하고 함께 밥 해먹던 기억. 마케팅 석사과정의 아지트처럼 여겨졌던 킹스턴 시내에 있던 바, 하하. 얼마 전 가보니 하하가 있던 자리에는 다른 레스토랑이 들어서 있었다. 추억이 하나 사라진 듯 쓸쓸한 마음이다. 크리스마스 파티를 했던 가네보 펍, 맥주 한두 캔 사들고 탬즈강 둑에 앉아 깡맥주 마시던 기억. 나이를 먹는 탓일까? 옛 기억이 더욱 또렷해진다.

  

  

# 뉴몰든(New Malden)

런던을 이야기할 때 한국인들의 홈, 뉴몰든을 빼 놓을 수 없다. 비공식으로 한인 타운으로 불리는 이곳은 한국형 대형 마트를 비롯하여 한국 음식점 등이 있는 한인들의 홈베이스 같은 곳이다. 이 동네에서 5년 정도 살기도 했고, 뉴몰든 옆 동네인 킹스턴에서 대학원을 마쳐서인지 다녀올 때마다 새록새록 기억이 더해지는 곳이다. 현재 살고 있는 곳은 뉴몰든까지 차로 한 시간 정도 걸린다. 두세 달에 한번씩 장을 보러 가곤 하는데 쇼핑하고 밥을 먹고 돌아올 때마다 일년 치 양식을 얻은 듯 든든한 기분이 들곤 한다. 한국이 너무 그립거나 기운을 내야 할 때 최고의 응급처치가 되어 준 것은 우거지 갈비탕과 양념 게장. 진고개의 우거지 갈비탕은 정말 그리울 것 같다.

  

  

# 세븐 다이얼(Seven dials)

너무 변방의 이야기만 했나? 센트럴에도 내게 휴식 같은 장소가 있다. 바로 세븐 다이얼! 이름부터 어쩐지 영국스럽고 미스테리하지 않은가? 레스터 스퀘어(Leicester Square)에서 몬머쓰 스트리트(Monmouth Street)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세븐 다이얼이라는 조그마한 광장이 나온다. 코벤트 가든 지하철역에서 더 가깝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레스터 스퀘어에서 시작하는 것을 좋아한다. 세븐 다이얼이라 불리는 이유는 일곱 개의 길이 광장을 중심으로 모이기 때문이다. 자갈로 만들어진 보도블록은 300여 년이 넘는 이 거리의 역사를 가늠하게 한다. 아기자기한 빈티지 숍들부터 치즈 가게, 오가닉 제품이 유명하고 알록달록 건물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닐스 야드까지 코너코너마다 소소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세븐 다이얼에 간다면 꼭 들러야 할 곳은 바로 맘머쓰 커피숍! 1978년에 문을 연 이후로 쭉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원두커피를 직접 골라 수입하여 로스팅, 드립까지 해주는 이곳에서는 다른 곳에서 맛볼 수 없는 진하고 독특한 커피 맛을 경험할 수 있다.

지난 주 친구네 집에서 바비큐 파티를 했다. 바비큐 파티는 영국 여름의 신호탄! 바비큐를 굽고 핌스(핌스라는 주류에 각종 과일을 넣어 펀치처럼 마시는 영국 여름 칵테일)를 곁들인다면 진정한 British Summer를 경험하는 것이다. 이것 또한 내가 그리워할 것이겠지. 황금 같은 날씨가 시작되면 일광욕을 위해 비키니를 입고 공원으로 모여드는 사람들의 모습도 그리워질 것 같다. 옥스퍼드, 코츠월드, 도르셋, 바스 등 내가 사랑하는 영국 마을들…. 이제 더는 주말에 잠깐 다녀올 수 없겠지. 현재의 익숙함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찾아 떠난다. 익숙하기에 더욱 아쉽고 벌써 그리워진다. 하지만 그리워할 것이 있다는 것, 그것도 행복인 듯 하다.


글 사진 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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