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07호] 뒤바뀐 기억

뒤바뀐 기억

어릴 적부터 완벽주의 혹은 결벽증 같은 게 있었다. 공책 첫 장에 써 내려 간 글씨가 마음에 안 들면 한 장을 죽 찢어 버렸고 왼쪽 잘린 부분이 깨끗하지 않으면 둘째 장부터 썼다. 그것도 안 되면 연습장으로 용도를 바꿨다. 음악 테이프의 재킷이 케이스 때문에 한 귀퉁이가 색이 날아갔고 그것을 차마 볼 수 없어서 그만큼을 가위로 잘라 냈다. 나이가 들면서 그런 모습은 점점 줄어들었지만, 새 옷을 사 갖고 집에 오면 꼭 미세하게 올이 나간 게 눈에 들어와 교환해야 했고 SNS에 글이나 사진을 올린 게 마음에 들지 않아 지워 버리곤 했다. 


이와 연장선에 있을지도 모르는 내 모습 중 하나는 기억력이 지나치게 좋다는 것이다. 어떤 날 누군가 입었던 옷이라든지 했던 말과 행동을 마치 영상처럼 기억한다. 물론 내 관심의 영역 안에 있는 경우만이다. 어쨌든 기억 때문에 괴로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잊고자 하는 일이 잊혀지지 않는 것은 당연한 얘기고, 내가 명확하다고 생각하는 기억을 누군가 잘못 기억하는 것을 바로잡는 것도 힘들었다. 


최근 있었던 일이다. 책장에 오랜 시간 박혀 있던 윤대녕의 <미란>이란 소설을 읽었다. 어떻게 내 손에 들어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걸 읽고 노량진 고시원에서 지냈던 암울했던 때가 떠올랐다. 소설 읽는 게 사치와 같았던 시간이었는데, 어느 힘든 날에 헌책방에서 윤대녕의 <사슴벌레 여자>라는 소설을 사 읽었던 기억이 있다. 시간은 흘러 좁은 고시원에서 이루고자 했던 것에 실패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사슴벌레 여자’라는 책이 그 시절의 우울함을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하고 책 면지에 써 놓은 글(언제 어디서 이 책을 샀고 정도의 내용이었던 듯한)이 마음에 들지 않아 친구에게 가져 달라며 줬던 기억이 났다. 이 기억은 완벽하게 잊고 지냈던 것이다.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옛날에 내가 줬던 윤대녕 책 기억나느냐고. 친구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가 ‘사슴벌레 여자’라는 이름을 대자, 그 파란 표지 말하는 거냐며, 책을 사진으로 찍어 보내 왔다. 면지에 내가 쓴 글이 도무지 기억나지 않아 사진을 부탁했는데, 면지에 글 같은 건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대신 친구는, 그 책을 어느 기업에서 보던 것인가 보라고 했다. 머리가 띵했다. 나는 면지에 글을 쓴 적이 없고, 친구에게 책을 줬던 이유는 책 위에 파랗게 도장 찍힌 한 기업의 이름 때문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다시 생각해 보니 그랬다. 기억은 확실하거나 가물가물한 형태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완전히 뒤바뀌어 남기도 했다. 어쩌면 내가 기억하는, 생각하는 내 모습과 누군가의 모습도 없는 것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쓸쓸해졌다.


글  성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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