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98호] 채우고 또 비우는 빈칸

 지난 5월 1일부터 31일까지 대전 중구 선화동의 창작공간 이유에서 «기체도시»전이 열렸다. 전시는 총 4부로 이루어졌으며, 총 19명의 작가가 네 팀으로 나뉘어 각자의 방식으로 흥미로운 전시를 풀어냈다. 조용하지만 의미있는 움직임을 일으킨 이들은 대전 지역에서 활동하는 20~30대 작가들의 네트워크인 ‘블랭크(Blank)’이다.

도시 안에 떠다니는 기체 같은 것들

첫째 주에는 ‘페인트, 가스, 문짝’이라는 주제로 권영성, 김보람, 심종열, 이청학, 최성호 작가가 전시에 참여했고, 둘째 주에는 ‘안녕’이라는 제목으로 Leeda, 김미정, 조동진, 허은선 작가가 페인팅작품, 조각, 퍼포먼스 등을 보여줬다. 셋째 주에는 ‘기억의 습작’이라는 제목으로 박수경, 이정혜, 조영래, 최윤희 작가가 참여하고, 마지막 주에는 김은혜, 권재한, 노종남, 이상규, 이길희, 이용제 작가가 ‘쉬-잇’이라는 제목 아래 전시를 마무리했다.

2팀의 전시가 한창인 5월 12일 저녁, 창작공간 이유에서 허은선 작가는 ‘양파 때문에 우는거야’라는 주제로 퍼포먼스를 보였다. 작가는 촛불 하나만 켠 작고 어두운 공간 안에서 양파가 그득히 담긴 양파망을 기다란 노끈으로 천천히 묶다가, 이내 풀더니 길게 늘어뜨려 들고는 공간 안을 천천히 돌았다. 천장에 매달린 여러 개의 빈 양파망엔 하얀 종잇조각들이 가득 들었다.

“지난 주에 보여 준 첫 번째 퍼포먼스와 조금 달리 했어요. 가느다란 실에 매단 양파의 무게를 통해 속으로 우는 울음을 표현했달까요. 첫 번째 퍼포먼스 때는 양파를 핑계로 참아야했던 울음을 마구 쏟아내는 걸 표현하고자 했어요. 양파는 쉽게 쓰이는 식재료잖아요. 저에게도 울음을 참아야할 때 매운 양파가 핑계삼아 울음을 쏟아낼 수 있는 통로 같은 것이기도 했거든요. 쪽지들은 지난 퍼포먼스 때 관객들에게 ‘토해내지 못한 울음의 무게’에 관해 써 달라고 해서 받은 것들이에요.”

Leeda 작가는 기체도시전에 대해 도시 안에 떠다니는 기체 같은 것, 손에 잡히지 않고 부유하는 사회적이거나 개인적인 문제들을 표현하고자 한 전시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개인의 문제 또한 사회 안에 속해 있는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모임이 아닌 장(場)으로서의 블랭크

“보통 작가들은 혼자서 작업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러다보니 대전 지역에 어떤 작가들이 있는지도 서로 잘 몰라요. 모여서 소통하고 연대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만들게 됐어요.”(김보람 작가)

지난 해 4월 권영성 작가를 중심으로 몇몇의 20~30대 젊은 작가들이 모였다. 처음에는 회화 작가들이 주를 이뤘으나 점차 공연기획자, 미술평론가, 퍼포머, 조각가, 음악가, 웹툰 작가 등 다양한 분야의 문화예술인들로 범위가 확장됐다. 그러나 권영성 작가는 ‘블랭크’를 모임이 아니라 ‘장(場)’이라고  말한다. 대전 지역의 젊은 작가들이 각자의 필요에 따라 정보, 인적자원, 공간 등을 나누고 소통하는 교류의 장인 것이다. 이들은 공통의 관심사나 프로젝트 아래 함께 모였다가 또 각자의 자리로 흩어질 뿐, ‘모임’이라는 이름 아래 구성원을 구속하지 않는다. 굳이 모임이라는 표현을 쓴다면 ‘부정형적 모임’이라고 칭할 수 있다. ‘비어 있다’라는 뜻의 ‘블랭크’라는 이름은 그래서 붙였다.

“작년 4월 블랭크가 모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월호 사건이 터졌어요. 세월호 사건은 만나면 늘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주제였고, 결국 이를 주제로 우리끼리 뭔가 해보자는 얘기가 나왔어요. 1년여 정도가 흐르면서 개인과 사회문제 등으로 이야기가 확장돼 «기체도시»전을 만들게 됐어요.”
«기체도시»전은 전시로는 블랭크의 첫 프로젝트였다. 그밖에도 블랭크는 대흥동 독립출판물 서점 ‘도어북스’에서 매주 미학스터디를 꾸려왔다. 이 또한 모두가 아닌, 미학에 관심 있는 이들이 ‘헤쳐 모여’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자리다. 블랭크는 2주에 한 번 꼴로 회의도 한다. 대개 밥을 먹고 술을 마시며 각자 사는 얘기나 관심 있는 주제에 관해 얘기하다 종종 프로젝트에 관한 고민으로 이어지는 자유로운 자리다.

“각자 하고 싶은 프로젝트가 많은데, 전시가 끝나면 그것들에 관해 구체적으로 얘기하고 펼쳐보일 거예요. 사실 블랭크는 비단 작가들만 모이는 장이 아니에요. 문화예술 영역에서 조금 더 다양한 사람이 왔으면 좋겠어요. 들어오는 걸 어렵게 느낄 수도 있는데, 이곳에 있는 사람들 또한 한편으로 어색하고 그래서 맞춰가는 관계인 걸요. 블랭크는 출신 학교, 출신 지역 등을 따지지 않는 유동적이고 수평적인 관계를 지향해요.”


글 사진 엄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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