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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07호] 서울특별시기행_서울시티투어
정신을 차려 보니 서울이었다. 이번에는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 터미널에 도착해 사람들 행렬에 쓸려가듯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지하철에서 먼저 마주친 건 일상의 권태 같은 것이었다. 손에 든 스마트폰에는 어떤 콘텐츠들이 흐르고 있을까. 서울을 여행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기분이 묘했다. 무언가 보러 누군가를 만나러 간 적은 많았지만, 차근히 도시를 둘러보고 여행 기분을 느꼈던 적은 없었다.
서울로 가기 전 날, 서울시티투어에서 문자메시지 한 통이 왔다. 예약해 놓은 가이드와 동행하는 투어가 신청자 미달로 취소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가이드가 동행하는 투어는 광화문에서 오후 두 시에 시작하는 것이어서 그에 맞게 대전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예약해 놨다. 그것을 바꾸지 않고 그냥 비슷한 시간대에 도심·고궁 코스 시티투어버스를 타기로 했다.
광화문에 도착하니 오후 한 시가 조금 안 되는 때였다. 1만2천 원을 결제하고 시티투어 버스에 탈 때마다 보여줘야 하는 티켓 한 장을 받았다.
한 시에 출발하는 버스에 타 버스가 출발하기만을 기다렸다. 부산에서 온 여대생 네 명이 버스에 먼저 타 앉아 있었다. 이들은 이전에도 서울시티투어 버스를 타 본 경험이 있다 했다. ‘데려다 주는 점이 편해서’ 다시 이용하게 됐다. 부산에서 왔지만, 부산시티투어버스를 타 본 적은 없고 잘 모른다고 했다.
부산시티투어버스에서처럼 기사님이 이러저러한 설명을 해 주는 줄 알고 기다렸지만, 버스는 조용했다. 괜히 의자 뒤에 붙어 있는 방송 시스템을 조작해 헤드폰으로 들었다. 곧이어 버스 자체에서 방송도 시작됐다.
덕수궁, 창경궁, 창덕궁, 경복궁 등 고궁을 둘러 볼 계획이었다. 몇 번씩 가 본 기억이 있지만, 오랜만에 여유롭게 둘러보고 싶었다. 광화문을 지나 첫 번째 서는 곳이 덕수궁이었다. 그런데 버스가 서지를 않고 덕수궁을 지나쳤다. 방송 시스템 조작하느라 정신없이 기사님 말도 듣지 못하고 버스가 선지도 몰랐나 보라고 다음 내릴 곳을 생각했다.
서울역을 지나고 용산역을 지나며 버스는 자주 신호에 멈춰 섰다. 점심때라 그런지 혼잡했다. 어떤 차가 끼어들었는지, 기사님이 짧게 짜증 내는 소리를 했다.
앞에 앉아 있다 버스 내리는 곳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고 나서 창 쪽을 보니, 내리기 전에 벨을 울리라는 알림이 보였다. 서울시티투어버스는 기사님이 일일이 정류장마다 알려 주고 버스가 서는 방식이 아니라, 내릴 사람이나 타는 사람이 있어야 버스가 선다. 국립중앙박물관 정류장에 도착할 즈음 벨을 눌렀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처음이었다. 흥미로운 전시품이 많다고 들어, 한번 가 보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는 잊고 지냈었다. 박물관 앞마당은 평화로웠다. 추운 날씨였는데도 아이들은 좋다고 뛰어다녔다.
인공호수를 지나 박물관으로 들어가기 전 매점에 들러 요기를 했다. 기획전시실에서는 리히텐슈타인박물관 명품관을 하고 있었으나 상설 전시를 보고 싶었다. 6개 관, 50개 실에 1만2천 점이 넘는 유물을 전시하는 곳이다. 박물관에 들어가자마자 그 크기에 놀랐다. 그동안 가 봤던 어느 박물관보다 컸다.
1층 선사·고대관, 중·근세관을 천천히 둘러봤다. 유물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는 게 좋은 시 한 편을 읽는 것처럼 울림이 있었다. 그 옛날 사람들이 먹고살고 치장하고 사랑하는 모습이나 지금 우리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니 위로받는 느낌도 들었다.
1층 전시를 반 정도 봤을 때는 세 시였다. 선택해야 했다. 도심·고궁 코스의 막차는 오후 여섯 시 차였고 둘러보고 싶은 곳이 많았다. 아쉬웠다. 국립중앙박물관 안에서 종일을 보내도 시간이 부족하게 느껴질지 몰랐다. 버스가 올 시각까지는 30분여가 남아 있었다. 결단을 내렸다. 30분 안에 1층만 빠르게 보고 가기로. 이곳에서 시간을 더 보냈다가는 시티투어버스를 이용하는 것이 의미 없을 거였다. 본전에 관한 생각을 하다 정류장으로 향했다.
다시 버스에 올라탔다. 이번에도 버스에는 네다섯 명 정도가 타고 있었다. 버스 안은 조용했다. 모두 창밖 풍경에 집중해서인지 대화 소리 대신 방송 소리가 버스를 채웠다. 버스는 곧 이태원을 지났다. 내려서 둘러볼까 잠깐 고민했는데, 버스 창밖으로 동네의 모습을 보는 것으로 대신했다. 앤티끄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가구점, 구제 옷 가게, 세계 음식점 등이 길가에 길게 이어졌다. 이태원을 지나 명동의 모습이 밖으로 보였다. 명동에서도 내리지 않고 있다 남산골 한옥마을에 내렸다.
정류장에서 함께 내린 사람들을 따라 3분쯤 걸으니 바로 남산골한옥마을 입구가 보였다. 남산골한옥마을은 한옥 다섯 채를 이전 복원해 만든 곳이다. 이곳을 천천히 둘러보며 고즈넉한 분위기를 느껴 보고자 했던 계획은, 한옥마을에 들어서자마자 끝이 났다.
한옥마을 안은 한복을 입고 웨딩 사진 촬영을 하는 사람들을 비롯해 기념 촬영을 하는 사람들로 빽빽했다. 이 모습을 보고 얼른 다음 버스 시간을 떠올렸다. 한 시간쯤 느긋하게 둘러볼 계획을 30분 안쪽으로 바꿨다. 다시 정류장으로 향하는 길에서 외국인 관광객을 태우고 온 버스를 보았다. 남산골한옥마을이 이들의 여행 코스 중 하나였나 보다. 그들이 이곳을 어떻게 기억할지 생각했다. 내 기억에는 별로 남지 않을 곳이 되었다.
정류장에는 제법 많은 사람이 시티투어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중 반쯤은 외국인이었다. 한 외국인이 정류장에 쓰여 있는 전화번호로 전화해 경복궁이 궁전이냐고 묻는 게 들렸다. 곧이어 버스가 도착했다. 먼저 타 앉아 있는 사람이 많았다. 시간이 늦어질수록 버스에 사람이 많아진다는 게 기사님의 설명이었다.
빈 좌석이 거의 없는 버스는 호텔 두 곳을 지나 N서울타워에 섰다. 열 명쯤이 내리고 그만큼이 탔다. 나는 그저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서울의 모습을 보며 만족했다. 무수한 건물지붕들 아래로 수많은 사람이 지나다니겠지만, 얼만큼이나 위로 올라왔다고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복잡한 서울의 모습도 남산 위에서는 별스러울 것 없는 무엇이었다.
창밖을 바라보며 오후 햇살에 잠깐씩 졸았다. 그리고 다가올 창경궁 정류장에 내리기만을 기다렸다. 대학로를 지나며 기사님이 창경궁, 창덕궁은 다섯 시에 문을 닫았다고 볼 수 없다고 했다. 다섯 시가 막 넘은 때였다. 좀 더 계획을 자세하게 짰어야 했나 후회했다. 도심·고궁 코스에서 고궁을 한 군데도 가지 않게 됐다니. 스스로에 탓을 돌리다가 예약해 둔 가이드와 동행하는 투어가 취소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과거의 어떤 순간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투어 시작 전 매표소나 버스를 탈 때 경유지에 관한 짧은 안내라도 있었으면 어떨까 생각했다.
기사님의 설명에도, 외국인 몇이 창경궁 정류장에 내렸다. 닫힌 문 앞에서 그것을 배경으로 셀카봉을 들고 사진을 찍는 모습이 차창 밖으로 보였다.
어쨌든 창경궁과 창덕궁을 지났다. 그리고 어디에 내릴까 생각했다. 애초에 창경궁, 창덕궁, 경복궁을 보리라 계획했던 게 틀어졌으니 말이다. 선택의 여지는 많이 없었다. 인사동 정류장에서 내려 하루 여정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10년 전쯤 인사동을 찾았던 기억이 있다. 친구와 함께 차도 마시고 고물상 같은 곳을 들락거렸다. 도자기로 만든 피리 목걸이를 하나씩 사 목에 걸고 불면서 다녔었는데. 그때 인사동의 모습은 어땠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시티투어버스를 타고 내리는 세 번째이자 마지막 행선지. 이곳에서는 시간을 염두에 두지 않고 좀 더 느긋하게 곳곳을 바라보기로 했다. 풍문여고 옆 길을 따라 쭉 올라갔다. 이제 막 어둠이 내리는 때였다. 예쁜 소품 가게와 흥미로운 먹거리를 파는 작은 가게들을 보며 길을 따라 걸었다. 이 거리에도 한복 입은 사람들이 많았다. 사람들은 여러 색이 화려한 한복을 입고 사진을 찍으며 즐거운 나들이를 기념했다.
대전으로 돌아가는 버스 시각까지 시간이 제법 남아 있어, 휴대전화로 시간을 확인하지 않고 쏘다녔다. 이상하게도 다시 탈 시티투어버스에 관해 생각하지 않으니, 마음이 편했다.
작은 갤러리를 둘러보는 재미도 있었다. 공간의 외관만 보더라도 그곳의 특색이 드러나는 개성 있는 공간들이었다. 그렇게 한 갤러리 앞에서 모습을 보고 있으니, 안에서 전시하는 작가가 나와 들어와 보라고 말한다. 황동진이라는 동화 작가의 원화 전시였다. 작가는 친절하게, 벽에 걸린 그림들은 이 근처를 돌아다니며 이끌리는 ‘문’들을 그린 것이라 설명했다. 벽에 걸린 문을 하나씩 들여다보았다. 오래되고 정겨운 문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 마음이 따뜻해졌다.
갤러리 옆 자연스레 구획된 옆 공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리에 앉아 있는 이가, 이곳은 관광안내소라며, 구경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인지 물었다. 막 올라가는 길이라고 했더니, 이제 곧 어두워지니 북촌 중 사진 찍으면 가장 예쁜 두 곳에 가 보라며 지도에 형광펜으로 표시를 해 줬다.
북촌이라니. 이곳저곳에 흩어진 퍼즐이 맞춰지는 느낌이었다. 인사동 정류장에 내려 인사동 쪽으로 가지 않고 안국동 쪽으로 올라왔던 것이다. 지도를 보니 북촌의 서쪽으로는 경복궁이, 동쪽으로는 창덕궁이 있었다. 시티투어버스의 한 정류장, 이곳에서 내리지 않으면 ‘오늘 이곳에 가는 건 글렀다.’ 같은 식의 좌절은 애초에 필요 없을지도 몰랐다. 조금만 걸으면 거기가 거기였다.
지도를 들고 북촌화동관광안내소에서 나왔다. 해가 지기 전에 두 곳을 모두 둘러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느리게 걸었다. 기념 사진을 찍는 사람들 사이에서 산책하는 사람처럼 걸었다. 북촌 어디에 들어갈 내 집은 없었지만, 편하게 걸었다. 해가 지고 있었고 붉고 어두운 하늘과 한옥 지붕의 경계 같은 것을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그러다가 소란스러운 사람들 말소리에 질려 고개를 젓고 터미널까지 갈 지하철역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