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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99호] 청산 5일장
충북 옥천군 동쪽에 있는 작은 면 중 하나가 청산면이다. 충북 보은군, 영동군과 이웃했다. 이곳을 마을 이름 앞에 수식어처럼 붙는 말이 ‘칠보단장’이다. 보통 우리가 아는 칠보단장은 한자로 ‘七寶丹粧’ 이렇게 쓴다. 갖가지 패물로 정성스럽게 몸을 꾸민다는 뜻이다. 그런데 청산면을 부르는 칠보단장은 음은 같지만 좀 다른 의미를 갖는다. 한자로 쓰면 ‘七洑單場’이라고 쓴다. 한자를 풀어보면, 일곱 개의 보와 장 하나, 라는 뜻이다. 청산면과, 이웃한 청성면을 흐르는 하천 이름은 보청천이다. 이 하천을 가로막은 ‘보’ 일곱 개가 있다. 토사유출을 막고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설치한 보다. 그리고 ‘단장’은 청산면과 청성면을 통틀어 하나밖에 없는 오일장, 청산오일장을 가리킨다.
몸을 꾸민다는 의미를 지닌 ‘칠보단장’이라는 말이 일곱 개의 ‘보’보다는 먼저 생긴 말일 터이니, 긍정적이고 좋은 말에 청산면의 상황을 덧붙여 마을 이름을 꾸며주는 말로 삼았을 게다. 청산면에 사는 재치 넘치는 몇몇 사람이 막걸릿잔을 기울이다가 이런 의미를 부여했고 말이 전해지면 자연스러운 꾸밈말로 붙어 지금까지 내려올 가능성이 크다.
당시에는 장이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 어떤 의미였을 지 모르지만 현재는 좀 신기한 일이기는 하다. 전통 오일장 자체가 많이 쇠락하고 사라지는 지금, 면 단위에 전통 오일장이 지속적으로 열리는 곳은 그리 흔하지 않다. 지난해 말 기준, 주민 3,400여 명 남짓 모여 사는 작은 고장이지만 한 때는 제법 규모가 있던 중심지 구실을 했음이 틀림없다. 오일장은 아무 곳에나 서는 장이 아니니 말이다.
면사무소 측면을 접하고 지나는 지전1길과 바로 옆 공터가 오일장이 서는 공간이다. 길과 공터 사이는 집 몇 채가 길게 늘어서 경계를 만들고 그 중간에 짧은 골목을 통해 넘나듦이 가능하다. 2일과 7일이 들어가는 오일마다 장이 선다.
작은 시골 마을 오일장에는 활기와 북적임이 없었다. 한 번 굴러가기 시작한 바퀴가 동력이 완전히 사그라지기 전까지 계속 그 움직임을 지속하듯 오일장은 버릇처럼 그곳에 섰으나 이미 예전의 장은 아니었다. ‘메르스’라는 낯 설고 어색하며, 절대로 친숙해질 수 없을 것만 같은 낱말은 이곳 오일장에서도 비 내린 후 버섯 솟아 오르듯 피어났다. 더군다나, 전날 그렇게도 기다리던 비가 내리면서 물기를 머금은 땅에 작물을 심기 위해 모두 들로 나간 모양이다. 뜨거운 태양 아래 강아지 한 마리는 주인이 비어 둔, 빨간색 간이 의자 그늘로 파고들었다. 저도 외로운지 낑낑거리는 소리가 애닯다. 작은 트럭에 도장을 팔 수 있는 각종 장비를 설치한 아저씨도 햇볕 아래 트럭만 덩그러니 세워둔 채 다른 장 친구 가게에서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여념이 없다.
파는 것이 너무 많아 도대체 무엇을 파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시장만물’ 이연우 씨는 벌써 30년 째 청산장을 본다. 시계, 스탠드 조명, 모기퇴치팔찌, 칫솔, 가위, 파리채…. 정말 ‘없는 것 빼고 다 있다’는 말을 실감한다. 요즘 인기 품목은 플래쉬다. 여름에 올갱이 잡을 때 필수 장비이기 때문이다. 또 전기가 나가면 필요해 가정에 하나씩 있어야 하는 물건이다. 이외에 쿨토시도 인기 품목이다. 최근에 들여놓은 모기퇴치팔찌는 초창기라 사람들이 그 쓰임을 잘 모른다. 딸이 사다줘서 한 번 차보았는데 정말 모기가 다가오지 않았다. 직접 임상실험을 해 보고 효과가 있어서 가져다 팔기 시작했다. 처음 30년 전에 장에 나설 때는 전자시계 하나만 팔았다. 그런데 점점 안 팔려서 그때부터 이것저것 들여놓다 보니 만물 상회가 되었다.
“처음 장에 나왔을 때는 공사판에서 막일하는 것보다 돈을 더 많이 벌었어요. 지금이야 인구도 줄고 대형 마트 같은 것이 많이 생겨서 장사가 잘 안 되지만. 그때는 괜찮았어요. 노점상에서 파는 물건을 처음부터 믿고 사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다들 의심하지. 그러다가 하나씩 써보면 단골이 되는 거예요. 그렇게 단골 장사하는 거지요.”
이연우 씨가 처음 장에 나올 때보다 지금 장 크기는 1/3로 줄었단다. 그래도 초등학교 다니던 아이들이 마흔을 훌쩍 넘겨 장에 나타나 “어, 아저씨 아직도 장사하고 게시네요~”라고 인사를 건네면 신이 난다. 돈을 많이 벌지는 못해도 사람 만나는 게 좋아 계속 장에 나온다.
“장에는 보통 아침 일곱 시 30분에 나와서 저녁 다섯 시까지 있어요. 이곳 청산장 말고도 학산장, 옥천장, 영동장, 무주장을 보러 다녀요. 그중에서는 영동장이 아무래도 제일 잘되죠. 제가 영동에 살기도 하고요.”
해산물이 담긴 상자 안에 얼음은 견디지 못한 채 연신 녹아내렸다. 그 모습에 풍경도 함께 녹아내린다. 그 풍경을 추스리는 것은 생선을 펼쳐놓은 아주머니 몫이다. 드문드문 그 앞을 지나는 주민에게 던지는 말이 예사롭지 않다. 정말 곁에 사는 이웃에게 묻듯 제법 깊은 대화가 오간다.
“나야, 아이엠에프 때 장사를 시작했지요. 우리 아저씨가 그때 회사에서 목이 댕강 잘렸거든. 둘째 아주버니가 부산에서 해산물 도매업을 해가지고 그냥 이렇게 생선을 팔게 된 거지.”
아주머니는 장사를 시작하고 3년을 울었단다. 그냥 서러웠다. 대전에서 옥천으로 시집올 때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삶이었기 때문에 더 그랬을 것이다. 그렇게 매일 울다가 마음을 고쳐먹은 것 아는 사람들 때문이다.
“어떤 동창이 시장에 있는 나를 우연히 보고는 주변 지인들에게 그렇게 얘기했나 봐요. 민망할 수 있으니까 아는 척은 하지 말고 장에서 보면 물건 좀 많이 사주라고.”
친구들이 그렇게 배려를 해주는데 매일 눈물을 흘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마음을 고쳐먹고 제대로 장사를 시작했다. 성격도 조금씩 변했다. 어지간히 기운센 남자들과 드잡이하는 것도 예사였다. 보통 오일장에서 자기 자리를 잡으려면 3개월 이상은 신경전을 벌여야 한다. 만물상회 이연우 씨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3개월은 꾸준히 자리를 지켜야 하고 그 자리를 탐내는 사람과는 때로 싸움도 불사해야 한다. ‘자리’와 관련한 어려움은 오일장을 보는 사람 누구나 한 번쯤 겪은 일이다.
“그냥 ‘악’으로 장사하는 거지요. 원래 먹고 사는 게 전쟁이잖아요. 누구한테나. 그러니까 그렇게 축 처져서 댕기지 말아요. 이 뜨거운 날씨에 포도밭에서 하루종일 서 가지고 봉지 씌우는 사람도 있어요. 나도 아직 인생공부 다 하려면 멀었지요. 저기 할머니 이마에 골파진 거 보여요? 저렇게 인생의 골이 좀 파여야 그제사 좀 알겠지요.”
쨍쨍거리며 어깨에 내려앉은 태양빛이 너무 무거워 축 처진 모양이다. 그리고 그 모습이 꼴 뵈기 싫었던 모양이다. 그늘에 들어섰는데도 땀이 난다. 때마침 자반고등어 가격을 물어보고 그냥 지나쳤던 할머니가 다시 가게 앞으로 다가 선다. 그 사이 자반고등어 한 손 가격은 3천 원이나 내려갔다.
“우리 어머니, 시어머니 저녁 반찬 해드리려고 하는 것 같은데, 좀 싸게 해드려야지. 우리 어머니 참 곱지요?”
자반 고등어를 큰 무쇠칼로 툭툭 쳐내 삼등분으로 나누는 아주머니는 쉴 새 없이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꺼낸다. 벌써 주머니에서 돈을 빼들고 손을 삐죽 내민 할머니는 그 이야기가 싫지 않은 모양이다. 슬며시 웃는다.
“내가 젊었을 때는 곱기는 했지. 우리 동네에 나때문에 죽을라고 했던 총각도 있다니까. 내가 연분홍치마에 흰저고리를 받쳐 입고 댕기머리 길게 늘어뜨리고 고개너머 들판으로 밥을 가지고 가면, 산에서 나무하던 그 동네 총각이 안절부절 못했다는겨. 가서 확 껴안고 싶은데 우리 아버지가 엄청 엄했거든. 지금 그 양반이 요 근처 마을에 사는데, 언젠가 술 한 잔 먹고 나한테 얘기하더라고.”
여든을 바라보는 전 씨 할머니는 쉼없이 내쳐 얘기한다. 한국전쟁 때 겪은 고생담을 얘기하듯 심드렁하게 진술하는 할머니는 여전히 곱다. 7남매를 다 키워 밖으로 보내놓고 남편은 20년도 더 전에 먼저 보내고, 지금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산다. 오늘 전 씨 할머니의 시어머니 저녁 밥상에는 노릇노릇 잘 구운 자반고등어가 오를 참이다.
“다, 우리 어머니 같은 분들이잖아요. 시골에 살면서 얼마나 외로우시겠어요. 집안 살림 사정 잘 기억해두었다가 한 번씩 물어보면 그렇게 좋아하세요. 그러니까 이곳에서는 내가 처져 있으면 안 돼요. 그럼 손님들도 다 같이 처져요.”
만물상회 이연우 씨
“노점상에서 파는 물건을 처음부터 믿고 사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그러다가 하나씩 써보면 단골이 되는 거예요.”
전통 오일장이라면 시끌벅적하고 오가는 사람이 어깨가 부딪칠 정도로 복작거릴 수도 있지만 나른한 졸음이 밀려올 정도로 고요할 수도 있었다. 일상이 늘 북적거릴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청산장 안에는 사람이 있고 관계가 있다. 본인이 처지면 그 공간을 공유하는 다른 사람도 함께 처진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늘 웃으며 목청을 높이는 사람이 있다. 대전에서 청산장으로 옷을 팔러나오는 아주머니는 행복에 관해 이런 말을 했다.
“행복이든 불행이든 다 자기가 만드는 겨, 별 거 없어. 다 마음이 만들고 생각이 만드는 데로 가는 겨.”
(왼쪽부터) 해산물 가게 아주머니
“원래 먹고 사는 게 전쟁이잖아. 누구한테나. 그러니까 그렇게 축 쳐져서 댕기지 말아요.”
전 씨 할머니
“내가 젊었을 때 곱기는 했지.
우리 동네에 나 때문에 죽을라고 했던 총각도 있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