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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01호] 깨달음은 찰나에 오는 것 같아요_감규랑 씨
장맛비가 내리던 한여름 날,
감규랑 씨는 처음으로 삼팔광땡장을 찾았다.
네일아트라는, 오일장으로서는
신선한 아이템을 가지고서 말이다.
부득이하게 북카페 이데 안에서 장을 열던 때,
감규랑 씨는 카페 모서리
은은한 조명이 비추는 자리에서
네일박스를 펼쳐 두고 손님을 맞았다.
그녀는 능숙한 솜씨로 손톱을 다듬는 동시에
다부진 입매로 자분자분 이야기를 건네며,
낯선 이에게 손을 내맡긴 사람의 마음을
금세 편안하게 만들었다.
디자인이나 미술에 관심이 많았어요. 상고에 진학하면서 디자인과를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만류에 상과로 진학했어요. 졸업하고서는 대학에 가고 싶어서 선생님의 취업 추천을 요리조리 피해 다녔는데, 하필 아버지가 신협 합격 전화를 받는 바람에 그대로 입사하게 됐어요. 성실한 직원이었어요. 사내에서 동료나 상사에게 아부는 못 하는 성격이었고, 오직 손님에게 인정받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일했죠. 그러다보니 손님이 저를 칭찬해서 상사에게 인정받는 일도 있었어요. 그런데 스물네 살이 되던 해, 한 손님이 “올해 나이가 몇이냐.”라고 물었어요. 근데 제 나이가 생각이 안 나는 거예요. 주민등록증을 꺼내서 나이를 계산했어요. 나이를 잊고 살았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어요. 달 보고 출근하고 달 보고 퇴근하고, 때론 주말도 없이 일하는 삶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죠. 하루하루 고민에 빠져 있던 어느 날, 우연히 신문에서 메이크업·네일아트 수업 광고가 눈에 들어 왔어요. 바로 수강등록을 했고, 퇴근 후 짬을 내어 수업을 들으러 다녔어요. 내가 하고 싶었던 것, 그런데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걸 하고 있다는 사실에 뿌듯했어요. 인생에서 스스로가 가장 부끄럽지 않은 시기였던 것 같아요.
스물다섯 살에 6년을 일한 신협을 그만두고 당시 학원 원장님이 운영하시던 도마동의 네일숍에 취직했어요. 왜 그 좋은 직장을 그만두냐는 주위의 만류가 있었지만 미련이 없었어요. 일하면서 정말 다양한 사람을 만났어요. 출장 마사지 브로커, 호스트바 사장,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여성, 여성 벤처사업가, 재벌 남편을 뒀지만 항상 신경질적이던 여자 손님 등….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생각을 듣다 보니, 어떤 일에 대해선 ‘그럴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공감 능력이 커졌다고 할까요. 원래는 꽤 보수적인 사람이었는데 말이에요.
네일숍을 그만둔 건 지난 유월이에요. 그간 아이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는데, 과감히 접었어요. 십년 정도 했네요. 그 후로 그동안 못 만난 지인도 많이 만났는데 얼마 전 오랜만에 만난 램프의진희의 진희 쌤이 저한테 삼팔광땡장에 셀러로 나가 보라는 거예요. 내가 거기에서 뭘 파냐고 했더니, “뭐 팔긴, 네일아트 하면 되지.”라고 하더라고요. 지금까지 다섯 번 정도 참여했는데, 구경하는 것도, 사람 만나는 것도 재밌어요. 셀러 분들도 재밌고요. 대흥동이 은근 재밌는 동네더라고요. 오일장에 참여하게 된 것도 그렇고,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요즘은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또 배우는 데 재미를 느끼고 있어요.
출산하고 나서는 꽤 우울했어요. 밖에서 일만 하다 집에 있으려니 답답하고, 혼자서 무언갈 잘 못하기도 했고요. 한번은 눈 오는 날 강의를 들으러 갔는데 강사 분이 “혼자 커피를 마시러 가 보라.”라고 하셨어요. 어떻게 혼자 가냐고 했더니 “왜 혼자야? ‘나’랑 같이 가는데.”라고 하는 거예요. 강의가 끝나고 버스를 탔는데 갑자기 주변 소리가 하나도 안 들리고 오로지 저만 의식하는 경험을 했어요. 지금까지 ‘내’가 없었구나, 라는 걸 깨달았죠. 그 후로 혼자서 전시도 보고, 어딘가를 다니고 하는 경험을 통해 나도 혼자를 잘 즐길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알았어요. 이전엔 혼자 아이를 데리고 밖에 나가는 것은 꿈도 못 꿨는데 말이에요.
어렸을 때 오빠와 남동생 사이에 자라서 그런지 늘 배려하고 양보하는 게 익숙했고, 저보다는 가족이나 남의 시선이 먼저였어요. 제가 원하는 걸 당당히 요구하지도 못했고요. 예전에는 그런 시절을 돌아보면 마음이 아팠는데, 이젠 담담하게 추억할 수 있어요. 지금은 점점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살다가 세월이 훅 지났을 때 돌아보면 과거의 일이 내 인생에 있어서 어떤 메시지처럼 느껴질 때가 있죠. 깨달음은 찰나에 오는 것 같아요.
최근 사이버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했는데 이 달 말에 졸업해요. 남편 덕분에 얼떨결에 시작했는데, 나랑 상관없다고 생각한 사회복지학이 제 일에 정말 도움이 되더라고요. 인간관계나 심리 등을 다루니까요. 제 직업이 사람들의 외모를 예쁘게 가꾸어주는 일이잖아요. 훗날에는 경험과 지혜로 사람들의 내면도 예쁘게 해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 사람의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꺼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요. 막연하지만요. 최종목표는 내 삶에 온전한 나로 녹아드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