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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01호] 우리가 좇고있는 가치는 무엇일까
“자동차 사고가 난 적이 있어요. 주차장을 나오는데 갑자기 차가 제멋대로 돌진하더니 벽을 들이박은 거예요. 고개를 들어 백미러를 봤는데 찢어진 머리에서 나오는 피가 얼굴을 덮었더라고요. 왜, 영화 속 장면처럼요.”
다행히 몸은 가벼운 타박상 정도로 그쳤지만, 벽이 부서지고 차는 폐차시켜야 할 정도로 큰 사고였다. 삶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당연하다는 듯 시작되는 하루가 내일은 찾아오지 않을지도 몰랐다. 하고 싶은 일을 미루지 말자 마음먹었다. 그러나 막상 해보려니 뭘 하고 싶은지 몰랐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구제 옷을 차에 싣고 길거리에서 팔아보는 것. 우선 모아둔 목돈으로 삼백만 원짜리 중고 다마스를 샀다. 밋밋한 차체에 페인트를 칠해 핑크색과 올리브그린색 옷을 입혔다. 친구들은 이 차를 ‘핑크택시’라 불렀다. 대구에 있는 구제 창고에서 저울에 올려놓고 킬로그램으로 값을 매겨 구제 옷을 떼 왔다. 페루의 전통 타악기인 카혼도 중고로 구입했다. 기타 치는 친구와 함께 거리공연을 하기 위해서였다.
“구제 옷을 파는 것은 리사이클의 개념이에요.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다 중요한 재생이란 가치를 공유하는 거죠. 동시에 히피 문화를 나누고 싶었어요. 거리공연도 하고 드로잉도 하면서 인생을 함께 즐기는 거예요. 옷을 사고파는 과정 안에서 여러 가지 문화적인 자극을 주고받는 거죠.”
2012년 봄에 출발한 핑크택시는 피어나는 벚꽃을 따라 여기저기서 모습을 드러냈다. 대전에서는 선화동 닷찌플리마켓을 자주 찾았다. 사람들은 귀여운 핑크택시에 이끌렸고 구제 옷의 독특한 개성에 빠졌다. 어설픈 거리공연도 함께 즐겼다. 옷을 떼러 갈 때마다 핑크택시는 경부선을 힘차게 내달렸다. 많은 사람을 만났고 깊은 추억을 만들었다.
“가을 학기가 시작되면서 핑크택시를 정리했어요. 쌓여가는 재고를 감당하기도 힘들었고,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고 생각했거든요. 복학해서 공부에 집중했어요.”
전공인 패션마케팅 공부를 하면서 서울에 있는 마케팅 동아리에 들어가 다양한 공모전에 참가했다. 동아리는 ‘엔젤스브렌딩’이라는 사회적 기업에 소속되었고 송파구청장에게 점자를 새긴 명함을 홍보해 송파구청의 점자 명함 도입을 이뤄내기도 했다. 그는 동아리 활동에 전념했고 취직에 도움이 되는 스펙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졸업 시즌을 맞이했다.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다.
“바보가 된 기분이었어요. 내 열정은 아무 쓸모가 없었던 것인가, 좋아하는 것을 하며 산다는 게 실패를 의미하는 건가 하는 회의감이 들었어요. 감정적으로 굉장히 외로운 시기였어요. 그러다 우연히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에 설비와 장비 제작에 관련된 도면을 공부하게 되었죠. 최근 3개월 동안 파주 반도체 공장에서 도면을 보고 장비를 조립하는 일을 하면서 사회가 좇는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어요. 재충전 할 수 있는 시간이었죠.”
파주에서의 생활은 단조로웠다. 공장에서 제공하는 기숙사에서 먹고 자고, 일어나면 공장에서 일하고, 남는 시간에는 해이리 산책로를 조깅했다. 벌이는 제법 괜찮았다. 아침 아홉 시부터 시작해 저녁 여섯 시까지 일하면 십만 원 정도를 받았고, 일이 많아 야근하면 두 배였다. 공장이 바쁜 시기에 주 5일씩 한 달을 꼬박 채우면 여느 기업의 신입사원 월급 못지않은 임금을 받을 수 있었다.
“처음 시작하는 초보 근로자라서 임금이 적은 거예요. 공장에서 좀 오래 일한 분들은 기본 수당이 더 세죠. 야근하면 세네 배까지 더 받아요. 기분이 이상하더라고요. 뭐하러 대기업에 들어가나, 돈을 벌려면 여길 오면 되지 싶었어요. 결국 우리가 좇는 것은 돈이 아니에요. 주변에서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사는 거죠. 등산복 유행하는 거 보세요. 마치 유니폼처럼 모두 같은 걸 입고 다니잖아요. 노스페이스 패딩, 폴로 카라티 다 마찬가지예요. 이런 유니폼화는 우리나라에서만 발견되는 특이한 현상이에요. 주위를 너무 의식하는 것에서 비롯되죠. 주변에서 다 똑같은 옷을 입으니까 나도 따라 입는 거예요. 무엇이 번듯한 직장이죠? 우리가 사는 집은 꼭 평수 넓은 아파트여야 하나요? 사람들이 남들과 비슷한 선택을 내리다가 자기 색깔을 잃어버리고 있어요. 저는 사회 구조도 그렇지만 우리의 의식 자체에도 문제가 있다고 봐요. 모두가 생각의 폭을 넓게 가졌으면 해요.”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문화 공간을 갖는 것. 그 공간을 통해 자신만의 색깔을 가진 사람이 더 많이 늘어나길 희망한다.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며 반짝이는 그의 눈은 아직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