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07호] 부산 사람, 바다, 추억 같은 것들_부산시티투어

밤새 내린 눈이 도시 곳곳에 쌓였다. 
대전역 플랫폼에도 눈발이 떨어져 직원들은 긴 빗자루로 플랫폼을 쓸었다. 
부산으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며 내가 아는 부산을 떠올렸다. 
해운대와 광안리해수욕장이 아름다운 도시, 탁 트인 바다를, 바닷바람을 설레는 맘으로 맞았던 어느 하루. 
일상이 하나도 쫓아오지 않는 곳에서 나는 얼마나 들떴던가. 
                       

                                 

                     
버스에서 내리다

꼼짝없이 자리에 앉아 기차 창밖을 바라보는 것만큼 평화로운 시간이 또 있을까. 따사로운 햇볕에 가리개를 내리고 빠르게 흘러가는 실루엣에 시선을 두다 어느새 졸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것도 잠시, 안내 방송에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부산에 있었다.


열 시가 조금 넘은 시각 기차에서 내려 부산시티투어버스 티켓을 파는 매표소를 찾았다. 여행센터에서 원래 1만5천 원인 티켓을 1만 원에 판다는 것을 알게 돼 여행센터로 향했다. 직원에게 돈을 내니 티켓 대신 종이 팔찌 한 장을 들려 준다. 부산역과 해운대를 오가는 레드라인, 해운대에서 용궁사를 오가는 블루라인, 레드라인에서 환승해 오륙도에 갈 수 있는 그린라인을 이 팔찌 하나로 하루 동안 이용할 수 있다. 5천 원을 추가해 태종대 코스와 환승도 가능하다.


역 밖으로 나가니 바로 부산시티투어버스 정류장이 보인다. 탑승을 기다리는 사람들 뒤에 줄 섰다가 버스에 올랐다. 가족인 듯 보이는 사람들, 친구 사이, 연인 사이로 보이는 사람들, 아이에서부터 중년으로 보이는 이들까지 다양한 연령대가 버스에 탔다. 기사님이 몇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을 알려 준다. 항상 내리는 곳에서 다시 탈 것, 운행 시간을 잘 알아 둘 것, 보통 30분 간격으로 버스가 다닌다는 설명과 함께, 보고 싶은 곳을 먼저 봐야 한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오륙도와 황령산을 오가는 그린라인은 현재, 황령산 회차지 공사로 오륙도까지만 운행한다고 했다. 


버스가 출발하고 맨 앞에 설치된 모니터에서 안내 방송이 흘러나온다. 버스가 지나는 곳에 관한 설명, 지역의 유래, 관련 설화 등을 들을 수 있다. 안내 방송 중간중간에는 기사님이 직접 거들어 설명하기도 한다. 
눈을 크게 뜨고 창밖을 바라봤다. 부산에 놀러 왔을 때마다 지하철로 이동하느라 몰랐던, 못 봤던 부산의 모습은 관광지의 것이 아니었다. 볼 때마다 가슴이 확 트이고 설레고 무언가 특별한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들떴던 부산 대신, 누군가 살고 있는 도심의 모습이 보였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 자동차들, 바다를 가르는 다리, 그 위를 건너는 우리의 버스가 한데 섞여 있었다.


오륙도로 가는 그린라인 버스와 환승 가능한 용호만유람선터미널에서 나는, 버스의 첫 번째 하차 손님이 되었다.

                     

             

버스에서 만난 사람들

버스에 내려 오륙도로 가는 그린라인 버스가 언제 오는지 살폈다. 30분 정도를 기다려야 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돌아볼 만한 무언가는 없는 듯해 정류장에 서 있던 여고생 세 명에게 말을 걸었다. 편하고 저렴해 시티투어를 하고 있다는 세 친구는 오륙도에서 나오는 길이었고 내가 내린 레드라인 버스에 탔어야 했다. 그렇게 알려 주니 셋은 땅이 꺼질 듯 한숨을 쉬었다. 그것도 잠시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며 꺄르르, 탈 버스에 타지 못한 것도 잊고 즐거워했다. 


곧 이어 오륙도로 가는 그린라인 버스가 도착했다. 버스에는 기사님 말고는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았고 나는 그 버스에 타는 유일한 손님이 되었다. 그는 대전에서 온 손님에게 부산 곳곳을 친절히 설명해 주고 싶은 마음에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에 세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이러저러한 얘기 끝에 오른쪽으로 바다와 오륙도가 보이고 왼편에는 고층 아파트가 보인다.


“마 저기서 계속 살면서 바다 보면 허무하다 안 합니까. 우울증도 걸린다고 하고요.”
기사님과 인사를 하고 버스에서 내렸다. 오륙도는 단 한 번 눈에 담으면 끝. 돌아가는 버스가 올 때까지 시간을 채우는 건 내 몫이다. 사람들의 발걸음에 이끌려 발밑으로 오륙도 근처 바다를 볼 수 있는 스카이 워크에 갔다가 해안을 따라 만든 언덕길을 걸어 보기로 했다. 근처 주민으로 보이는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편한 차림으로 걷는 길이었다. 셀카봉을 들고 사진을 찍는 젊은이들도 보였다. 추운 날씨에 발목을 하얗게 드러내고 웃는 이들 사이로 무심한 일상의 사람이 지난다. 


바다가 주는 감동은 금방 끝났고 사람들이 궁금해졌다. 벤치에 오래 앉아 있으니 그 앞으로 망원경을 바라보는 한 사람이 눈에 들어온다. 언제까지 서 있나 기다리고 있다가 망원경 앞에 섰다. 멀리 배를 타고 낚시를 하는 사람 모습이 보였다. 손짓 하나 작은 움직임 하나까지 보였다. 그렇게 오래 배가 흘러가는 모습을 바라보다 돌아가는 버스 시각을 확인하고 정류장으로 향했다.

             

                       

소원이 없는 시간

좀 전에 봤던 기사님을 다시 만났다. 반가웠다. 여전히 버스엔 나 혼자였다. 내 질문에 부산 토박이인 기사님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해 줬다. 서면, 해운대가 신도심, 남포동 근처가 원도심이라고 했다. 근처 광복동에 있는 용두산 공원은 부산의 상징이라고 했다. 가 보았지만,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게 없었다는 내 말에 기사님이 얘기를 잇는다.


“추억이 많은 곳이에요. 부산 사람이면 한 번쯤 기념사진 찍어 봤을 걸요. 옛날엔 그 주변에 음악다방도 많았어요. 지금은 다 없어졌죠.”
즐겁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니 금방, 레드라인 버스로 환승하는 용호만유람선터미널이다. 버스에서 내려 레드라인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가 올 때까지는 또 한참이었다. 이번엔 가만히 서 기다리지 않고 주변 산책에 나섰다. 버스가 올 시각에 맞춰 다시 정류장. 멀리서부터 보이는 레드라인 버스가 반가웠다. 차창 밖으로 광안리해수욕장을 지나 마린시티, 동백섬이 보이고 그다음이 블루라인 버스와 환승할 수 있는 해운대해수욕장 정류장이었다. 버스에서 내렸다. 다음에 탈 블루라인 버스가 오기까지는 50분이 좀 안되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얼른 점심을 먹고 재빨리 해운대 바다를 눈에 담았다. 


다시 블루라인 버스를 탔다. 이번 기사님은 마치 쇼 프로그램의 진행자처럼 버스 분위기를 쥐락펴락했다. 멋진 풍경을 소개하는 말에 박수와 환호성을 유도했으며, 소리가 작다 싶으면 다음 좋은 풍경은 “쌔리 막 달려 볼까.” 하며 금방 지나가 버릴 거라고 말했다. 해동용궁사에 도착하기 전, 그는 이곳이 전국에서 기도발이 제일 잘 받는 곳이라며 소원 한 가지를 생각해 두었다가 해수관음대불 앞에 빌라고 했다. 떠오르는 게 없었다. 


소원 따위는 접어두고 해동용궁사에 내렸다. 왼편에는 수산과학관이, 오른편으로 바다를 따라 쭉 난 길을 따라가면 해동용궁사가 있다. 몇 해 전 이곳에 왔을 때보다 느긋하게 걸었다. 혼자였고 자유로웠다. 거기에다 돌아갈 버스가 있으니 걱정할 게 없었다.

                  

                    

2층 버스 위에서 아이처럼 웃다

해동용궁사를 천천히 둘러보고 수산과학관에 들를 계획이었다. 천천히 바다를 바라보며 시티투어버스 정류장이 있는 수산과학관 근처로 다시 왔다. 전에 본 적이 있던 수족관을 다시 둘러볼 생각이었는데, 정류장에 서 있는 시티투어버스를 보고 생각이 달라졌다. 버스에 타지 않고 수산과학관에 들어간다면 30분 이상을 보내야 했다. 그냥 앉아서 쉬고 싶었다. 버스에 올라 자리에 앉았다. 피곤했는지 잠이 왔다.


버스는 출발했고 나는 꼬스름을 타며 꾸벅꾸벅 졸았다. 블루라인에서 레드라인으로 환승할 수 있는 부산시립미술관 벡스코 정류장에서 내려야 해 근처에서 정신을 차리고 정류장에 내렸다. 기왕 내린 김에 시립미술관을 둘러보기로 했다. 《스테이징 필름 ; 비디오 아트, 공간과 이미지의 체험》 전이 흥미로웠다. 아침 일찍 일어나 찬 바람 맞으며 돌아다니느라 지쳤었는지, 전시실 안에서 나는 충분히 이완됐다. 이후에 광복로에 내려 국제시장 등을 둘러볼 생각이었으나, 이제는 그만 집에 가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류장에서 부산역으로 향할 레드라인 버스를 기다렸다. 2층 버스였다. 아무 생각 없이 1층에 앉아 있다 시티투어버스도 이제 마지막이란 생각에 2층에 올라갔다. 2층은 열려 있었다. 찬 바람이 머리를 헤집었고 버스의 흔들림에 따라 몸이 휘청였다. 웃음이 절로 났다. 조금 더 높은 곳에서 자동차와 사람을 내려다보는 것이 색다른 체험이었다. 


다시 1층으로 내려가자, 여러 번 마주쳤던 부부가 2층은 어떠냐고 물어 왔다. 둘은 포항에서 왔다고 했다. 부부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둘은, 최근에 여러 도시를 여행했다. 강릉에 가서는 택시 한 대를 대절해 돌았는데 돈이 많이 들었다. 시티투어버스란 것을 알게 됐고 지난 1월에는 서울 시티투어버스를 타고 여행했다. 정신없었지만 재밌었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들은 부산 야간 시티투어버스도 예약했다고 했다. 


좋으시겠다고 얘기했지만, 밤에까지 시티투어버스를 타고 부산을 여행하고 싶지는 않았다. 적당히 지치기도 했다. 바다를 보고 어떤 추억도 떠올리며, 2층 버스에서 머리를 산발해 가지고는 큰소리로 웃기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것으로 충분했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는 잠에 들지도 않았는데 시간이 금방 흘렀다. 이상하게도 부산시티투어버스에서 만난 기사님들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느새 또 대전이었다. 

                  

                           

                                


글 사진 성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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