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96호]

    

더 많은 유해가 있을 거라고 짐작하면서도 발굴을 계속할 수는 없었다. 지난 2월 23일부터 3월 1일까지 낭월동 일대에서 벌어진 2차 유해 발굴 마지막 날이었다. 3월 1일 오전 11시 기자회견이 열렸다. 그동안 발굴한 유해를 가지런히 모셔두고, 민간인학살공동조사단 박선주 발굴단장이 현장에 온 사람들에게 발굴 상황에 관해 설명했다.

“1950년 9월 ‘한국에서의 정치범 처형’이라는 제목의 보고문과 함께 미 육군정보부에 제출된 현장 사진 열여덟 장을 바탕으로 유력한 매장지 중 하나로 보이는 낭월동 15-1 지점에서 유해 발굴을 시작했습니다. 지금 보시는 것처럼 경계면에 아직 발굴하지 못한 유해가 있는 것으로 보아 발굴을 진행하면 더 많은 유해가 나올 것으로 생각됩니다. 발굴한 유해는 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아마 더 시간이 지나면 더 많은 손상이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시급한 조치가 필요합니다.”

    

    

3월 1일, 유해발굴 현장      

3월 19일, 다시 찾은 현장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기만 하다

기자회견을 마치고, 모든 사람이 빠져나갔다. 현장에는 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이하 대전희생자유족회)와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이 남아 있었다. 3월 1일은 모든 것을 마무리하고, 현장을 정리하는 날이었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여기 이렇게 계시게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산내학살사건 유족들이 푹 패인 땅에 엎드려 연신 머리를 숙였다. 발굴한 유해를 모두 모아 소독하고, 현장을 정리해야 했다. 매일 같이 발굴 현장에 와 자리를 지키던 유족들이었다. 현장을 마무리하던 날, 막걸리와 과일 몇 개를 두고 제사를 지냈다. 절을 하기 전, 대전희생자유족회 이계성 부회장이 담배에 불을 붙여 유해 앞에 두었다. 푹 패인 땅 위에서 혹여나 유해를 밟을까 염려하며, 발굴 현장에 들어가 조심스럽게 절을 하는 유족들은 비통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 목소리가 조용한 동네에 메아리처럼 떠돌았다. 짧은 의식처럼 제사를 마치고, 현장을 정리했다.

“3월 1일까지 발굴 작업을 마무리하고 바로 원상 복귀하기로 땅 주인과 약속을 했어요. 땅 주인이 그곳에서 농사를 지었거든요. 지금은 임대 이야기가 나와서 아직은 그대로 두었지만, 임대하지 못하면 농사를 짓겠죠. 임대해서 더는 농사를 짓지 못하도록 할 거예요. 이제 현장이 훼손되지 않도록 보존해야죠.”

대전희생자유족회 모소영 사무국장의 이야기다. 3월 20일, 대전희생자유족회와 대전 산내 민간인학살 유해 발굴 공동대책위원회(대전지역 19개 시민사회단체, 이하 산내공대위) 임원진이 대전광역시청에서 권선택 시장을 만났다. 대전희생자유족회와 산내공대위는 위와 같은 입장을 전했다. 이에 대전시는 당장은 예산확보가 여의치 않다고 답변했다.

“당장 시나 국가에서 발굴에 관한 반응이 없기 때문에, 그곳에 유해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시 발굴을 시작하기는 어려워요. 그래서 보존을 해야 하는데, 그 예산을 유족회에서만 마련한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예산이 없어서 그 비용을 요청하는 게 아니라 시 차원에서도 이 사건에 대해서 반응을 하고 노력을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에 면담을 요청했던 거예요. 시에서는 이번 달에 열리는 시의회에서 ‘산내 사건 위령 사업에 관한 조례’를 재정할 예정이고, 거기에 맞게 예산을 만들어야 한다고 이야기해요. 일단 당장 급한 건 발굴 현장을 보존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에 관한 방안은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니 마음이 급하죠.”

모소영 사무국장의 이야기다. 모 국장의 이야기를 들으니 현장에서 나누던 유족들의 대화가 떠올랐다. “우리가 건강해야 해. 이제 시작이잖아. 앞으로 해야 할 게 얼마나 많아. 그러니까 스스로들 건강을 잘 챙겨야 해.” 라며, 유족들은 서로 위로하고 다독였다. 땅 위에 드러난 유해는 모두 거두어 현장 근처에 마련한 컨테이너에 임시 안치했다. 대전산내학살사건 현장은 다시 흙으로 덮였다.


글 사진 이수연

관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