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04호] 엄격하지 않은 사람들의 오후 4시반

 

 

오후 네 시 반을 돌아본다. 저녁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이르고 오후로 둘러 이야기하기에는 ‘늦은’이라는 말로 괜한 수식을 해야 할 것 같은 시간. 12주년을 맞이한 제스튀스가 정기공연으로 올린 신체극 <엄격하지 않은 사람들의 오후 4시 반>은 그 이름처럼 묘한 지점에 위치한다. 하나의 줄거리로 대치되는 극의 명쾌함을 예견했던 기대는 ‘4시 반’ 앞에서 무력하게 깨지고 만다. 몸의 언어는 말이나 글로 쉽사리 대치돼 기억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몸이 말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임을, ‘4시 반’은 ‘기억의 부재’로 증명해 보였다. 70여 분이 지나고 ‘4시 반’은 짧은 한 단어로 대치됐다. “그렇지.” 우리 사는 모습이 그렇다는 동의의 표시였다.




한 사람 위로 떨어지는 핀 조명. 무표정한 듯하기도 하고 고뇌에 찬 것 같기도 한 사람은 손바닥 거울로 자신을 들여다본다. 팔을 쭉 뻗고 손바닥이 자신을 향하게 한 모습은 명확하게 거울을 연상케 한다. 실제 거울도 등장한다. 사람은 거울 앞에서 갈등한다. 아니, 갈등하는 것 같기도 하고 고뇌하며 끊임없이 관찰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한 사람의 모습이 보이고 그 사람이 거울에 비친 모습이 보인다. 거울 속 자신을 들여다보는 한 사람의 모습을 관객이 다시 한 번 들여다본다. 언제부터인가 사람의 손에는 빨간 사과가 들렸다. 어둠 속에서 빨간 사과는 시선을 단단히 붙잡는다. 사람은 그 빨강을 탐한다. 빨강의 유혹에 못 이겨 체념하듯 이끌리는 욕구가 아닌, 거울을 찬찬히 들여다보듯 자신의 내면의 결을 섬세하게 더듬어 찾은 열망이다. 그리고 그 열망은 사과를 반으로 가름으로써 해소된다. 갈라진 사과가 파괴나 좌절의 상징이 아니라는 것은, 사람의 몸이 말해 준다. 1장의 이름은 ‘반사(reflection)’다. 


2장은 ‘군상’과 ‘에피소드’로 구성된다. 어떠한 표정이나 특색이 없는 사람들은 무대 위에서 군상으로 표현된다. 군상을 이루는 개인을 드러내는 어떠한 표지도 없다. 걷고 또 걷는 동작은 획일적이며, 사람들은 서로에게 무관심하다. 쳇바퀴 돌듯 돌아가는 군상의 모습은 ‘에피소드’에서 그 분위기를 전환한다. 군상으로 바라봤을 때 획일적이었던 이들의 삶을 면면히 따라간다. 울다가 웃기도 하고, 자신이 제일 잘난 줄 알고 살아가기도 하며, 때론 만나선 안 될 사람을 만난다. 남녀는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며, 누군가에게는 돈이 전부다. 돈으로 사지 못 하는 것은 없고 그래서 돈에 환장한다. ‘에피소드’는 숨 쉴 틈 없이 진행된다. 배우들은 무대 한 쪽에서 의상을 갈아입음으로써 자신들의 행위가 허구임을 알리지만, 관객은 여전히 무대 위 허구에 몰입한다. 허구이지만, 실제와 다르지 않은, 진실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허구는 사실보다 진실에 가깝다. 


3장의 이름은 ‘오후 4시 반’이다. 오후 네 시 반은 곧 다가올 퇴근 시간을 기대하며, 한편으로는 밀린 업무를 확인하는 시간이다. 삶의 가벼움과 무거움이 교차하는 이 시간, 무대 위에는 삶의 트라이앵글이 존재를 드러낸다. 한 여자와 여자를 둘러싼 두 명의 남자는 서로 엇갈리며 밀어내며 끌고 당긴다. 손끝에서 발끝에서 그리고 눈빛에서 여자의 과거나 현재에 맞닿은 인연이 교차하고 이어진다. 이 사람은 저 사람을 원하고 저 사람은 그 사람에게 손길을 뻗는다. 

<엄격하지 않은 사람들의 오후 4시 반>은 우리가 사는 모습을 70분으로 응축한 것의 다른 이름이다. ‘4시 반’에는 ‘나’가 있고 ‘군상’으로 표현되는 ‘우리’가 있고 ‘관계’가 있다. 그리고 이 삶의 모습은 신체극이라는 몸의 언어로 표현된다. 단순한 몸의 언어에 그치지 않고 극적인 요소를 포괄한다. 대화가 등장하지는 않지만, 음성으로서의 말소리가 이해를 돕고 재미를 더한다. 

<엄격하지 않은 사람들의 오후 4시 반>은 진지하고도 가볍게, 무겁지만 음울하지 않게, 따뜻한 연민으로 우리의 삶을 그린다. 무대 위의 시간은 우리의 시간과 다르지 않다. 무대 위에서 배우가 연기하는 그 시간을 우리는 보고 있으며, 그것이 우리 삶의 한 연장임을 안다. ‘오후 4시 반’은 반복되는 일상, 즉 삶이다

 
글 성수진(ssj21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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