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01호] 특별할 건 없어요, 함께 있는 게 좋을 뿐

“만약 당신이 동거란 말에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이 어둡고 음탕하며 축축하기만 한 무엇이라면 당신은 분명 동거를 해본 적이 없는 것이다. 동거에 관해 알게 된 것들, 첫째, 꼭 한 침대에서 자는 건 아니라는 것. 둘째, 매일 밤 하는 건 아니라는 것. 트렁크 팬티가 친근해지고 뽀뽀가 뽀뽀로만 끝날 때가 많아지는 것. 아닐 때도 있지만. 셋째, 시간이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다.”

2008년 방영한 드라마 <달콤한 나의 도시>에서 극중 주인공 오은수(최강희 분)의 독백이다. 서른 한 살의 오은수는 원룸에서 1인 가구를 꾸리며 사는, 서울의 여느 청년들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직장인이다. 바로 윗층에서 혼자 살던 여자가 살해 당하는 공포의 사건이 있은 어느 날, 그는 ‘무서움이 사라질 때까지만’이라는 전제를 붙인 애인 태오의 제안으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동거를 시작한다. 출근 준 비로 바쁜 아침 시간, 어질러진 방 안에서 휴대전화를 찾는 게 용이해지고, 숙제처럼 느껴지던 청소와 빨래가 즐거운 놀이가 되며, 혼자서 컵라면으로 때우던 끼니가 두 사람의 그럴듯한 식사가 되는 등, 혼자 살 땐 몰랐던 변화를 경험한다. 오은수는 동거라는 것이 세간의 시선처럼 편견을 가질만한 대상도, 터무니 없는 환상을 가질만한 대상도 아님을 독백을 통해 드러낸다. 때로는 달콤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덤덤하고 편안한 일상이기도 하고, 필연적으로 생기는 불편함이나 갈등조차 감내해야 하는 연애의 한 과정임을 말이다.

    

    

동거를 말하다

드라마가 방영된 때로부터 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동거’에 관한 시선은 그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1970년대 이후 거의 모든 유럽국가에서는 초혼 연령이 높아지면서 동거가 결혼에 대한 대안적 선택으로 자리 잡았다. 세계화와 경제적 어려움에 따른 고용불안정과 불확실성(실업, 계약직, 시간제 일자리 등)은 선진국의 가족변화를 이끄는 구체적인 요인이 됐고, 이는 청년층이 혼인을 지연하고 동거를 선택하는 경향을 만들었다.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여러 가족변화에 대응하는 가족정책을 시행해 왔다. 특히 서구 유럽의 가족 정책은 새로운 가족 유형이 사회적으로 수용되고 동거 또한 하나의 삶의 방식으로 안정성을 유지하도록 만들었다. 동거가 보편화된 노르웨이에서 법률혼의 지위를 대체하고, 약 50%의 자녀가 법률혼이 아닌 동거관계에서 태어나는 경우가 그렇다.

한국 또한 대체로 선진국이 경험한 인구학적 추세를 뒤따른다. 경제 위기나 경쟁적 자본주의의 여파로 고용안정성이 낮아진 상황에서 청년층은 결혼을 자발적, 비자발적으로 연기 혹은 포기하거나 대안적인 삶을 선택하고 있다. 2012년 ‘동거에 대한 태도’에 관한 통계청의 조사에 따르면 20대의 61.2%, 30대의 61.7%가 동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다른 설문에 따르면 ‘결혼하지 않아도 남녀가 함께 살 수 있다.’라는 질문에 20대의 53.1%, 30대의 59.2%가 찬성하는 의견을 보였다. 실제로 청년층에서 동거를 선택하는 경향이 늘고, 드라마의 주된 소재로 쓰이기도 하지만 실제 사례를 구체적인 자료나 통계를 통해 확인하기는 어렵다. 한국 사회의 고유한 가족이념과 제도적 속성 덕분에 동거가 사회적으로 공식적인 관계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가구·가족의 변동과 정책적 대응방안 연구』김유경·진미정·송유진·김가희, 한국보건사회연구원, 2013)

하지만 보이지 않고, 공공연히 말해지지 않는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모른 체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특히나 동거는 청년층의 연애, 결혼, 독립, 주거 등이 얽혀있어 청년에 관해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슈이기도 하다. 당사자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만난 네 명의 인터뷰이는 동거를, 언급한 것과 같이 사회적 변화에 따른 의식적인 선택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들에게 동거는 자연스러운 연애의 과정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동거를 하나의 대안적인 삶으로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엿볼 수 있었다.)

    

    

혼자 아닌 함께라서 좋은 것

“자연스럽게 동거 아닌 동거가 이뤄졌어요. 서로의 집을 몇 번 오가다 보니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전세로 있던 원룸에서 함께 살게 됐어요. 경제적인 이유보다는 함께 있을 때의 편안함과 즐거움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우린 동거를 한다.’라고 명확하게 정의를 내리기 보다는 함께 있는 것을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받아들인 것 같아요.”

이정훈(29세, 회사원) 씨는 현재 아내와 결혼 전 6개월 가량 동거를 했다. 특별히 결혼을 전제로 하고 동거를 시작했던 건 아니었지만 함께 살며 정이 들고 상대방의 생활습관과 남을 배려하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결혼을 결심하게 됐다. 그는 당시 함께 살던 여자친구(현재의 아내)를 ‘타지인 서울에서 생활하며 힘든 시기를 같이 버텨낸 동지’라고 표현했다.

“동거를 하면 시간과 돈이 절약된다는 점도 있겠지만, 그게 저희에게 큰 이점은 아니었어요. 혼자 사는 직장인들 중에서도 집에서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을 텐데요. 저희 둘은 그렇지 않은 사람이었죠. 둘이 집에서 요리를 해 먹거나 때로 밖에 나가 간단하게 소주 한잔 기울이며 서로 의지했어요. 함께있는 시간이 서로의 생각을 잘 알 수 있는 시간이 되었고요. 이제는 서로에게 마음을 기댈 수 있는 동지라고 할까요.”

현재 여자친구와 1년 반 가량 동거를 하고 있는 김민호(29세, 유통업 종사) 씨 역시 함께 있는 것이 좋아서 자연스레 동거를 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있다는 것이 좋고, 퇴근 후 돌아왔을 때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동거의 이점으로 꼽았다. 한편 박재훈(28세, 취업준비 중) 씨는 함께 생활하지 않았을 땐 몰랐던 상대방의 매력을 알게 되어 좋다고도 했다. 여자친구와 연애 5년차인 그는 3년째 동거 중이다.

“여자친구가 퇴근 후에 집으로 돌아오면 종종 하루종일 회사에서 힘들었던 얘기를 조잘조잘 늘어놓는데 그 모습이 정말 귀여워요. 함께 살지 않으면 절대 모를 즐거움이죠. 원래도 배려심이 많던 사람이지만, 살면서 감정적으로나 생활면에서나 배려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되면서 관계가 더욱 공고해지는 것 같아요.”

    

    

결혼, 그 참을 수 없는 무거움

인터뷰이들은 파트너와 함께 살고 있는 것에 대해 정서적, 생활적인 면에서 높은 만족도를 표했다. 하지만 결혼이라는 선택에 관해서는 어쩔 수 없이 머뭇거렸다. 특히 미취업 상태인 박재훈 씨에게 결혼은 멀고도 무거운 주제다.

“동갑인 여자친구가 주변 친구들이 결혼하는 걸 보면서 근래들어 부쩍 고민하는 걸 봐요. 그런데 결혼은 제가 안정적인 직장을 가진 뒤에나 가능할 것 같아요. 결혼을 하더라도 화려하지 않고 소박하게 하고 싶은데, 상대방이 동의해 줄지도 걱정이고요. 주변에 동거하는 커플들도 보면 결혼식 할 때 남들 눈높이에 맞출 수 있을까 하는 부담감, 결혼 후 따르는 출산과 양육 등을 제대로 책임질 수 있을까 하는 부담감 때문에 망설이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박재훈 씨는 현재의 삶도 충분히 만족스럽기 때문에 여러가지 책임과 부담이 따르는 결혼을 당장은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편 김민호 씨는 결혼을 원하고 있지만 인격적, 경제적으로 준비가 되기까지 결혼을 연기하겠다고 했다.

“결혼의 가장 큰 조건은 상대방과 내가 준비돼 있는가 입니다. 부모로서 올바른 사고를 갖추고 경제적인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조금 어려운 문제입니다. 단순히 사랑해서 결혼한다면 서로는 물론 장차 태어날 아이들도 불행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가끔 그런 걸 신경쓰지 않고 결혼을 하고 싶기는 하지만, 그래도 결혼은 장난이 아니잖아요. 이러다 못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웃음)”

박재훈 씨의 여자친구인 김은주(27세, 직장인) 또한 가까운 미래에는 결혼을 생각하지 않는다. 경제적으로 인격적으로도 한 사람의 인생을 책임지기에게는 성숙하지 못했고, 아직 하고싶은 일이 많다는 것이 이유다.

    

    

그냥 자연스럽게 바라보면 안 되나요?

어쨌든 경제적이고 개인적인 이유로 현실적으로 당장 결혼이라는 선택지를 호기롭게 뽑아들 수 없는 이들에게 동거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고, 정서적인 안정도 얻을 수 있는 자연스럽고도 합리적인 선택으로 보인다. 하지만, 유교적 가족제도와 가족주의 이념이 뿌리 깊은 이 사회는 사회·경제적인 변화와 맥락과는 상관없이 동거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며, 그들의 삶을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규정 짓는다. 함께 살기를 선택한 이상 주위의 시선은 크게 괘념치 않는다 해도, 이들은 때때로 그런 시선이 불편하다.

“남녀 간 동거에 관해서 연애의 한 형태로 봐준다면 좋겠는데, 한국은 이 문제에 관해선 전반적으로 보수적이고 동거라는 단어 자체도 불순하게 여기는 것 같아요. 실제로 처음 남자친구와 원룸을 알아보러 다닐 때 저희에게 방을 내주기 싫다고 한 할아버지도 계셨어요.”(김은주)

김민호 씨 또한 동거를 불편하게 바라보는 시선 이면에 깔린 편견을 지적하며, 긍정적인 면을 생각해주길 바랐다.

“동거에 관해 너무 성적인 문제로만 바라보는지 모르겠네요. 그런데 그건 너무 일차원적인 생각이라고 봐요. 동거의 가장 큰 장점은 상대방을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울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결혼하고 나서의 신혼을 큰 신혼생활이라고 한다면 동거를 작은 신혼이라고 비유하고 싶어요. 서로가 상대방에게 어떤 사람인가를 알 수 있어서 가장 좋습니다.”

이정훈 씨 역시 동거를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보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결혼으로 가는 하나의 과정이 아닌 연애의 심화된 과정”으로서 말이다. 박재훈 씨는 여자친구 부모님의 염려와 헤어진 후에 서로가 감당할 몫을 생각하면 신경이 쓰이지만 그럼에도 동거에는 여러모로 장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동거에 관해 너무 안 좋게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결혼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전혀 살아보지 않은 상태에서 결혼하는 것보다 함께 부딪히고 살아본다면 이혼하는 케이스도 줄지 않을까 해요. 함께 많은 걸 공유하고 요리, 청소 등을 같이 해보면 서로에 대한 생각도 많이 달라질 거예요.”

    

    

동거에 관한 사회적 시선은 당사자들에게 불편하게 감당해야 할 무엇일지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 동거를 선택한 이들은 그러한 편견에 상관하지 않거나 때로는 맞서며 자신들이 원하는 또다른 방식의 삶을 만들어 간다. 청년들의 동거는 드라마 속 오은수의 말마따나 “어둡고 음탕하고 축축하기만 한 무엇”이 아니다. 그들에게 동거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기를 택하고, 혼자 살 땐 얻을 수 없는 정서적 충족을 얻으며 삶의 균형을 찾고, 동시에 한 사람의 동반자로서 인격적 성숙까지 도모하는 적극적인 삶의 방식이다.

때때로 “나는 동거에 관해서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솔직히 사회적 통념이 그렇지 않냐.”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그들 역시 자신이 말하는 ‘사회적 통념’을 만드는 일부는 아닌지, 사실은 색안경을 낀 채로 ‘사회적 통념’이라는 그럴듯한 핑계 뒤에 숨는 것은 아닌지, 한 번쯤 돌아볼 일이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동거에 관해 두번째 의미로 ‘부부가 아닌 남녀가 부부 관계를 가지며 한집에서 삶.’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 사이의 동거가 남녀 사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며, 성적인 부분이 동거에 관해 많은 것을 말해주지도 못한다. 동거, 영어로 하면 ‘live with’이다.


엄보람

관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