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02호] 기본소득과 노동자 또는 기본소득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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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 현실 그리고 문제점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 노동 유연화

1990년대에 중·고등학교를 다닌 독자라면, 사회 시간 혹은 정치·경제 시간에 산업혁명-자본주의-대공황·뉴딜정책-고정·변동환율제-케인즈주의·스태그플레이션에 이르는 자본주의의 역사를 간단하게 배웠을 것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가 무엇인지 학교에서 배운 기억은 없다. 필자 또한 그러하다. 1990년대 중반까지 한국은 호황기였고, 장밋빛 전망은 10년이고 20년이고 계속될 것만 같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실감하게 된 것은 IMF 외환위기 이후라는 사실에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기업과 정부는 IMF 외환위기 이전부터 신자유주의를 맞이할 준비를 해왔다는 것을 1996년 노동법 개정(보다는 개악)안을 통해 알 수 있다. 1996년 12월 26일 신한국당(당시 여당,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의 전신) 국회의원들에 의해 날치기로 통과된 개정법안의 내용을 현재와 비춰 이야기해보면 다음과 같다. 1. 계속되는 경영의 악화와 생산성 향상을 위한 구조조정 등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가 있을 때 정리해고가 가능하다 : 정리해고의 자의적 남발을 막기 위해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라는 조건을 달았던 것인데, 그때 이후 지금까지 사측은 툭하면 긴박한 경영상의 위기로 정리해고를 남발해 왔다. 2. 복수노조 허용시기를 3년 후로 미뤘다 : 현재는 복수노조 허용을 이용해 사측에서 어용노조를 조직하는데 더 많이 쓰이고 있다.

3. 파업 때 외부근로자를 쓸 수 있는 대체근로제가 도입되었다. 4. 파업 기간에 새로운 하도급 생산도 가능해졌다. 5. 한 달 단위로 한 주에 56시간 범위 안에서 근로시간을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는 변형근로제가 시행되었다. 6. 쟁의 기간 중 임금을 지급하지 않는 무노동 무임금 원칙이 적용되었다 : 한 마디로 요약하면 파업도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선뜻 하기도 어려워졌다(=사측의 요구를 더 많이 수용하게 되었다는 비약이 가능하다). 

               

                  

다시 돌고 또 돌고 : 비정규·불안정·저임금·장시간 노동

1990년대에 중·고등학교를 다닌 독그렇게 시작된 한국식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현재까지 수많은 문제점들을 떠안고 끈질기게 수명을 연장하며 한국 사회를 잠식해 왔다. 그 결과 비정규·불안정 노동자, 즉 프레카리아트가 지난 15년간 꾸준히 증가해왔고, 전체 노동자의 50% 정도, 혹은 그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2014년 8월 통계청 DB 자료는 당시 비정규직 노동자 비율이 32.4%라고 발표했지만, 이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비정규 노동자의 임금은 정규직 노동자 임금의 절반 정도이고, ‘투잡’, ‘쓰리잡’은 이제 더 이상 낯선 현상이 아니다. 거리에서 스치는 수많은 사람들과 버스에서 만나는 낯익은 여러 이웃들 모두가 저임금·장시간 노동자이다(적어도 내 주변은 그러하다). 생산과 소비의 비율이 불균형을 이루게 되었고(당연히 생산량이 훨씬 더 많다), 기업은 이윤을 늘리기 위해, 혹은 유지하기 위해 소비를 조장하고, 소비할 돈이 없는 노동자들에게 대출을 권유한다

                            

                      

여기서 잠깐 멈춰 생각해보자. 

우리 사회가, 정말로 주택 공급량이 턱없이 부족하여 주택난이 심각한가? 정말로 식량 공급량(생산과 수입을 합하여)이 부족하여 하루 한 끼도 먹기 어려운 노인과 어린이가 존재하는가? 나는 지금도 대전의 값비싼 땅에 지어진, 텅 빈 아파트들을 매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퇴근하고 있고, 어느 호화 레스토랑에서 갓 버려진 음식 쓰레기 냄새를 맡으며 배고픔을 느끼고 집에 돌아가, 라면 두 개를 끓여먹는다. 문제는 무엇인가? 바로 ‘어떻게 분배하는가?’의 문제다.

             

                        

                          

                                

기본소득 : 지속가능한 사회, 그리고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대안사회로의 이행과정은 생산수단의 탈상품화(새로운 공공체의 형성)를 통한 기본소득의 재원 확보가 무조건적/보편적/개별적 기본소득의 지급을 통한 노동력과 자연력의 탈상품화(공통체의 해방)를 촉진하면서 서로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선순환 고리를 이루게끔 구성되어야 한다. 그럴 경우 역사적 사회주의의 실패를 넘어서 맑스가 말한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으로의 이행이 현실화될 수 있을 것이다.’1) 
완전고용은 있을 수도 없지만, 생태적 차원에서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자연 수탈을 통한 생산성 증가는 이미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고, 지금은 산업자본주의 시대가 아니라, 금융자본주의 시대, 그것도 수탈적 금융자본주의 시대이다. 따라서 일자리창출을 통한 실업문제 해결이나, 소비 증가의 결과 생기는 이윤을 통해 임금이 상승할 수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거나, 정말 모르고 하는 말이다. 종국적으로 문제투성이 자본주의 체제의 악순환 구조를 끊어야만 기계같은 삶이 끊어지는 것이다. 그 단초를 제공하는 것이 기본소득이라고 생각한다. 
기본소득의 주된 재원 마련 방법으로는 고율의 금융과세와 토지세, 생태(환경)세, 부자 증세 등이 있다. 재원 마련 방법 자체가 양극화 현상을 완화시키는 데 일조할 것이다.

위의 방법으로 마련된 재원이 모든 개인에게 무조건적이고 보편적으로 지급된다면, 빚을 진 사람들은 빚을 갚는데 보탤 것이고, 빚의 유무와 상관없이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의사에 따라 노동시간은 이전과 동일하게 하고 저축을 더 하거나, 노동시간은 이전과 동일하게 하고 소비를 더 하거나, 아니면 노동시간을 줄이고 수입을 그대로 유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소비를 더 한다고 해서 그것을 노동자 개인의 도덕성과 연결시켜 부정적인 현상으로 생각하려 하지 말자. 노동자는 개미처럼 일만해야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과소비하는 노동자가 도덕적으로 나쁜 것인가? 그 판단은 누가 하며, 기준은 무엇인가? 또한 소비를 더 하게 된다면, 기업가들이 바라마지 않는 이윤이 늘어나는 일이니 말이다.   


물론 재원 마련 방법에서부터 기대효과까지 우파 기본소득론자들의 그것과는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차이는 어디에 기인하는가? 바로 사람에 대한, 그리고 그 사람이 이루고 있는 공동체와 사회에 대한 철학의 차이에 있다고 생각한다. 기본소득은 제3의 민주주의라는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1차 총회에서의 외침은, 곧 돈보다 생명이 먼저인 사회를 지향하는 공동체관에 근거한다. 또한, 일하지 않아도 기본소득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가 가진 철학에 근거한다. 
여러분이 바라는 삶과 세상은 무엇인가? 나는 피 튀기는 경쟁이 필요 없는 사회에서, 그닥 잘나지 않았으나 공동체에 해를 끼치지 않는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받으며, 내일에 대한 염려를 오늘의 노동으로 애써 줄이려는 노력 없이, 나처럼 그저 그런 사람들과 함께 석양을 보고 저녁을 먹고 산책을 하고 싶다. 

                           

                         

참고문헌 및 웹사이트
1)    심광현, 「맑스의 관점에서 본 기본소득과 대안사회로의 이행의 과제」, 
    『시대와 철학』 제26권 2호(통권 71호),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15
2)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홈페이지 DB 자료 
    http://basicincomekorea.org/
3) 1996년 12월 26일자 MBC 뉴스 

                    


글 사진 정성희 (기본소득 대전네트워크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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