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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02호] 인간이라는 직업병, 의미강박증
얼마전 친구 P를 만났다. 책을 좋아하는 그답게 역시 자리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 두 권의 책. 한 권은 장 뤽 낭시의 새 책, 몸의 들림에 대한 에세이인 『나를 만지지 마라』였고 다른 한 권은 나도 최근에 읽은 알렉산드르 졸리엥의『인간이라는 직업』이라는 책이어서 반가웠다. 마침 책이 지긋지긋해진 상태라 또 책을 보자 한숨부터 나왔다.
그래서 커피를 마시며 그 책들을 뒤적이다 내가 엉뚱한 소리를 했다.
“인간이라는 직업에 독특한 직업병이 있는데 그건 우울증과 의미강박증이야. 이놈의 책들이 그걸 더 강화시키는데 큰 기여를 하지. 책 좀 그만 읽고 운동이나 좀 하시지 그래?”
그러자 친구는 헛헛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의미강박증은 내가 아니라 그대의 고질병이잖아? 의미는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아.”
“선승같은 말씀이시군요. 하하”
그 날이 지난후, 나는 페터 비에리가 존엄성에 관해 다룬 훌륭한 책 『삶의 격』을 뒤적거리다가 다시 삶의 의미와 존엄성 문제에 관한 문장들을 발견했다. 그는 삶의 ‘의미는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지 발견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걸’ 말하고 있었다. 그 명제는 일찍이 사르트르가 논증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즉 어떤 존재의 의미는 그것이 가지는 목표와 관련된 기능적인 면에서 정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선풍기의 의미는 바람을 일으키는 것이고, 망치는 못을 박기 위한 것이고, 라이터는 불을 켜기 위한 것이다.
사르트르식으로 말하면, 본질(목적)이 주어져 있다. 다시 말해 본질이 실존에 앞선다. 사실 모든 인공적인 존재 사물들의 실존은 그 기능적인 목적이 본질이며, 그것으로 의미가 규정된다. 바람을 일으키는 기능을 더 이상 수행하지 못하는 선풍기는 더 이상 선풍기가 아니다. 불을 켜지 못하는 라이터는 더 이상 라이터가 아니다. 반면에 의식을 가진 존재인 인간은 본질 혹은 목적이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지 않다. 인생의 객관적 목적은 주어져 있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다시 말해 ‘인생, 이건 도대체 어디에 쓰는 물건인가?’ 라는 물음은 인간을 창조한 신이라는 외부적인 존재를 상정하지 않는 한, 무의미한 질문이라는 것이다. 페터 비에리도 바로 그 점을 지적한다.
“이 물음(인생의 객관적 목표나 의미)은 피할 수 없음과 동시에 어디서 답을 구해야 할지 방향성도 찾기 힘들다. 그래서 혼란스러운 물음이다. 이 혼란에서 벗어나는 길이 있다면, 질문은 그것이 주는 첫인상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아무 사상적 내용이 없기 때문에 설령 답을 찾지 못하더라도 하나도 이상하거나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힌트를 얻는 것이다.”
결국 인생의 객관적 의미는 없다. 그것은 잘못 질문된 질문에 속한다. 사르트르가 인간은 자유다, 라고 선언했을 때 그 자유의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생의 의미를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할 저주받은 자유를 가진 존재다. 당신의 생의 의미는 바로 당신이 창조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청사진에 스스로를 동일시 할 수 있고 그 청사진에 따라 생활하는 한, 우리는 인생의 의미에 대해 그리 고민하지 않는다. 그렇게 살아가는 동안에는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이 인위적이고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느껴진다. 그러다가 그동안의 계획이 무산되거나 끝났을 때 그런 질문이 갑자기 커다랗게 다가온다. 하지만 그때 와서 자신의 삶과 연관 관계도 없는 뭔가 원대하고 총체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것은 전혀 소용이 없다. 도움이 되는 것은 단 한가지, 내게 중요한 것을 새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과정에도 역시 존엄성과 독립성이 요구된다. 내게 중요한 것이 뭔지 그리고 삶을 결정하는 것이 뭔지 직접 지휘하는 것이다. 페터 비에리. 374쪽”
밀란 쿤데라는 『무의미의 축제』에서 무의미 - 더 정확하게는 사소한 것, 하찮은 것 - 를 사랑하라고 했는데, 결국 그 말도 속내를 들여다보면 인생에 뭔가 객관적으로 거창하고 중요한 어떤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 그저 일상의 하루하루 작고 소박한 것들 가운데서 생의 기쁨과 의미를 찾으라는 말이다.
인생에 객관적으로 아무런 의미나 목적이 없다는 것, 어떻게 생각하면 절망적으로 슬픈 일일 수도 있다. 그래서 알베르 카뮈는 생의 부조리를 인식하는 가운데 ‘반항’이라는 윤리적 지침을 내주기도 했지만, 내 생각엔 그가 말한 부조리라는 개념 자체도 지나치게 인간중심주의적일 뿐, 인생은 반항할 것조차도 없다.
반항이란 곧 부조리라는 대상을 향한 반항인데, 객관적으로 부조리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으면 반항할 것도 사라지는 것이다. 부조리라는 개념 자체가 사실 인간적인 감정, 즉 객관적인 세계의 무의미와 세계에 의미가 있기를 바라는 인간감정 사이의 괴리, 즉 인간적인 감정을 설명하는 개념일 뿐이기에.
우리의 생에는 객관적 의미도 없고, 객관적인 부조리도 없다. 그런 고상하고 복잡해 보이는 개념들도 실은 알고 보면 의미 강박에 시달리는 인간이라는 직업이 가진 기이한 직업병일 뿐이다. 우리가 ‘의식’ 이란 것에 기괴한 특권적인 지위를 부여하지만 않는다면, 고양이나 인간 사이에 존재론적인 위계서열 따위는 없지 않겠는가? 생노병사를 겪어야만 하는, 생명 가진 존재들, 우주적인 차원, 즉 스피노자가 말한 <영원의 시선> 아래서 보면 모두 같은 우주 먼지일 뿐이 아닌가? 인간은, 그 의식이라는 것 때문에 생각이 복잡하고, 자신의 존재 의미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답이 없으니 종교나 철학 같은 것도 만들어내고 그러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존재하는 것들은, 그저 그러하게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스스로 그러함, 그게 바로 원래의 노자가 말한 自然이란 개념이었다. 우리는 그저 스스로 그러하게 진화했고, 그렇게 존재하다 가는 것 뿐이다.
단지, 그 의식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각자 좋아하는 것, 어떤 꿈꾸는 것을 어떤 하나의 생의 목표로 삼고 그것을 의미로 받아들이면서 열심히 이 순간도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각자가 추구하는 생의 목표나 목적이, 어떤 보편적인 생명가치에 부합하고, 거기에 조금이라도 기여하는 것일 때, 우리는 그 생이 아름답다고, 의미 있다고 간주할 뿐이다.
살인 같은 범죄행위를 생의 목적이나 의미로 추구하는 자, 사자 같은 동물을 자기과시용으로 마구 총질하여 죽이는 사냥을 즐기면서 그것이 자기 생의 의미라고 간주하는 자를 의미있는 생이라고 하진 않는다. 비록 스스로에게는 정당화될 진 몰라도.
생의 의미의 주관성이 객관성을 갖는 것은, 임마누엘 칸트가 취향판단에 대해 주관적 보편성 개념을 내세운 것과 동일한 의미 정도의 객관성만을 갖는다. 그것이 생의 의미 문제의 한계요, 주관적 의미론의 한계이기도 하다. 어쩌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페터 비에리가 ‘피할 수 없다’ 고 한 것처럼, 자꾸만 어떤 완벽하게 객관적인 생의 의미 같은 걸 찾으며 방황하는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생의 의미를 추구하는 것은, 불가피하고 운명적인 직업병이기도 하다. 이런 인간적인 직업병을 살면서 단 한번도 겪지 않는 인생보다는, 심하게 홍역을 앓듯 진지하게 앓아본 후에 벗어나는 사람이라야 인간이라는 직업을 더 잘 수행할 수 있는 것도 인간의 운명이라면 운명이다. 인간적인 삶의 격도 그런 물음들을 탐구하는 가운데서 깊어지는 까닭에. 그리고 그런 탐구에서 우리의 진실한 동반자, 친구가 되어주는 것이 바로 한 권의 책이라는 사실 또한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