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02호]고집이 만든 가치

쌍청당 

대전 역사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두 가지 전환 시점이 있다. 첫 번째는 1905년, 경부선 개통 시점이다. 이를 계기로 근대도시 대전이 탄생했다. 두 번째는 이보다 앞선 1432년, 쌍청당 건립 때다. 쌍청당을 계기로 회덕(지금의 대덕구 읍내동 일대)이 번성하기 시작했다. 대전의 조선 문화가 탄생한 거다. <대전지역 누정문학 연구>에서는 쌍청당 의의를 ‘회덕 황씨가 토성(土姓)이었던 회덕은 이때부터 은진 송씨의 집성촌, 즉 송촌이 되었다.’라고 설명한다. 

                     
 
조선시대 회덕의 종합문화센터

회덕의 토성은 원래 황씨였다. 은진 송씨가 회덕에 처음 들어온 건 1392년경이다. 송명의는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처가(미륵원 남루를 세운 황수의 딸)가 있는 회덕으로 내려왔다. 그 뒤 송명의 손자가 평생 후학 양성에 힘쓰며 은진 송씨를 번성시켰다. 그 손자가 쌍청당을 지은 은진 송씨 중시조 송유(1389~1446)다. 송유는 일찍이 벼슬을 버리고 ‘학문과 효행에 힘썼다.’라고 기록한다. 
특히 별당인 쌍청당을 지은 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10여 년간은 쌍청당에서 선조를 모시고, 후학을 양성하고, 풍악을 읊었다. 이는 박연(1378~1458, 우리나라 3대 악성)의 시에도 잘 드러난다. ‘쌍청당 작은 누각이 긴 길을 굽어보며/아침 저녁 명리(名利) 때문에 달리는 사람들을 한가로이 보네/개인 달빛이 뜰에 가득하니 빌려온 것이 아닐세/맑은 바람도 난간에 스치니 어찌 불러서 왔으랴/차가운 기운이 술잔에 스며들어 금물결이 가득하고/서늘한 바람이 구름길을 쓸자 나뭇잎이 가벼워지네/이 경치에 이 마음이 내 뜻과 같건만/다시 어느 곳에서 내 몸을 부려야 하나’ 이런 기록을 토대로 보면 쌍청당은 회덕을 대표하는 일종의 종합문화센터였다. 이 종합문화센터를 중심으로 회덕 사람의 교육과 교류가 이루어졌던 것이고, 그걸 밑거름으로 은진 송씨가 회덕에 자리 잡았던 거다. 은진 송씨에서 송유를 중시조로 모시는 이유이자, <대전지역 누정문학 연구>에서 쌍청당을 대전 역사의 전환 시점으로 보는 이유다. 

               

                

대전 별당 문화의 시초 


쌍청당은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호다. 대전에 남아 있는 민가 중 기록이 남아있는 것으로는 가장 오래된 건물이라고 한다. 그만큼 역사적 가치가 크다. 건물은 팔작지붕 홑처마에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다. 조선 전기 건축 양식을 잘 보여준다. 더불어 쌍청당은 대전 별당 문화의 시초이기도 하다. 후에 지은 동춘당과 송애당 등도 쌍청당과 같은 건축 양식을 따랐다. 


쌍청당을 찾은 때는 늦여름 오후였다. 배롱나무가 마지막 꽃잎을 피우고 있었다. 쌍청당을 관리하는 노미숙 씨가 배롱나무를 가리켰다.
“예전에는 저걸 나락꽃이라고 불렀어요. 저 꽃이 세 번 피고 지면 나락을 거둘 때라고 했거든. 저게 세 번째 핀 꽃이니까 나락 거둘 때가 됐다는 거죠.”


노미숙 씨 안내로 계단을 따라 쌍청당에 들어섰다. 오후 햇살이 쌍청당 문에서 부서졌다. 그 옛날, 회덕은 계족산을 중심으로 남서향에 자리했다. 송유는 방향을 살짝 틀어 쌍청당 정면을 남쪽으로 향하게 했다. 쌍청(雙淸)은 맑은 바람과 밝은 달, 즉 청풍명월(淸風明月)을 뜻한다. 그 이름과 잘 어우러지는 햇살이었다. 쌍청당을 천천히 둘러봤다. 
눈에 띈 건 쌍청당을 감싸고 있는 단청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1429년(세종 11년)부터 민가에 단청하는 걸 금지했다. 고관들의 집이 경쟁적으로 사치스러워지는 걸 우려한 까닭이었다. 이후 궁궐과 사찰, 향교에만 단청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국법을 시행하기까지 과도기가 있었다. 쌍청당은 그 과도기 덕분에 옷을 입을 수 있었다. 민가임에도 단청한 거의 유일한 사례다. 


송유가 세상을 떠난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쌍청당은 7차례 중수했다. 후손들은 그 중수 과정에서도 단청을 유지했다. 청빈함을 자존심으로 여겼던 사대부임을 고려할 때, 쉽지 않은 일이었으리라. 기록에서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3년은 아버지의 도를 기려야 효라고 할 수 있다는 공자 예법을 따른 것’이라고 전한다. 
알록달록한 단청이 배롱나무 꽃과 뒤엉키던 늦여름 오후였다. 고집이 만들어낸 소중한 가치, 쌍청당 문에 부서지던 햇살이 어느새 물러나 있었다. 

                       

                        


글 사진 송주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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