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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02호]이제는 완전히 무너졌어
동구 삼성동은 대전의 대표적인 구도심 지역 중 하나다. 북쪽으로는 성남동과 홍도동, 서남쪽으로는 중구 선화동과 중촌동을 면하고 있고, 동쪽으로는 소제동과 자양동, 동남쪽으로는 중동과 접경을 이룬다. 서남쪽으로는 대전천이 가장자리를 감싸 흐르고, 지류인 대동천이 삼성동의 가운데를 가로지른다. 대동천은 삼성1동과 삼성2동을 나누는 경계가 된다.
삼성동은 과거 회덕군 외남면에 속했던 지역이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대전면의 춘일정 일정목(春日町一丁目)·영정 이정목(榮町二丁目)으로 불렀다. 그러다 1946년 일본식 지명을 변경할 때 ‘삼성동’으로 개칭했다. 1970년에 삼성1동과 삼성2동으로 분리됐고, 2008년 삼성동으로 재통합했다.
삼성동은 경부선 철도가 중앙을 관통하는 교통의 요지로서 대전천 인근에서 천동, 효동과 함께 정미, 제사, 방적, 피혁 공업 등 경공업이 발전했고, 주요 산업 및 공공기관이 들어서 있었다. 하지만 80년대 중반 둔산 신도시 개발로 도시의 주요 기능이 속속 이전함에 따라 삼성동 또한 인근 원도심 지역과 마찬가지로 옛날의 빛을 잃어 갔다. 삼성1동의 중심부에 위치한 삼성시장은 그런 삼성동이 지나온 세월의 변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한밭중네거리에서 내려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대동천을 경계로 그 아래쪽에 해당하는 삼성1동 지역을 가능하다면 두 발로 샅샅이 디뎌볼 생각이었다. ‘삼성1동’이라는 것 말고는 특별히 목적지를 정하지 않았다. 늘 그랬듯 동네가 익숙해질 때까지 걷고 또 걷다가 ‘이야기’를 만나면 그곳을 좀 더 샅샅이 돌아볼 요량이었다.
대동천과 평행을 이루는 우암로 대로변을 따라 죽 걸었다. 비교적 한산한 6차선 도로 양 옆으로는 문구도매점, 완구점, 철공소 등이 드문드문 자리했다. 인쇄거리에서는 몇 블록 비껴나 있었지만 드물지 않게 보이는 인쇄사들이 이곳이 삼성동임을 말하고 있었다. 길 끝 삼성네거리를 만나는 지점에서 삼성초등학교를 오른쪽으로 끼고 돌아 대전로, 옛 인효로로 들어섰다.
거리는 어느 도심에서나 볼 법한 높은 아파트나 낮은 빌딩들이 심심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 모습을 표정 없이 바라보다 맞은편으로 ‘삼성시장’을 알리는 아치형 표지판을 발견했다. 건너편 길에서 바라보이는 삼성시장 초입은 그 거대한 구조물이 겸연쩍게 느껴질 정도로 무척이나 한산해 보였다.
1994년 발행된 『대전지명지』에 나타난 축척 400m의 삼성1동 지도에는 보문중고교, 한밭중교, 삼성국교, 동아연필, 계룡공고와 함께 삼성시장의 위치가 또렷하게 표시돼 있다. 해당 장소들이 삼성1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걸 방증하듯 말이다. 그러나 2015년 현재 삼성1동의 지도를 포털 사이트에서 찾아보면, 비슷한 축척에서 (사라진 건물을 제외하고) 삼성시장만이 나타나지 않는다. 축척을 25m까지 확대하면 그제야 ‘삼성시장’이라는 글자가 나타난다. 단지 과거와 현재 지도에서 차지하는 비중만으로도 예전과 달라진 시장의 위상을 짐작하고도 남았다. 무릇 시장이라면 동네의 오랜 얘기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길을 건넜다. 그렇게 삼성시장길에 걸음을 멈췄다.
삼성동과 인접해 있는 정동 판잣집촌을 지나 삼성시장1길로 들어섰다. 대로변에서 두 블록 떨어진 그곳에는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시장의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골목에는, 다닥다닥 붙은 낡은 집들이 오래고 고단한 삶의 냄새를 풍기며 늘어서 있었다. 그 길 초입에서 50여 년 동안 새마을방앗간을 지켜온 임희균 할아버지를 만났다.
“이 동네는 내가 환하지. 스물다섯에 논산서 여기로 왔어. 양철 일도 하고, 함석 일도 했지. 시장 들어서기 전에는 여기가 다 미나리꽝이었어. 나중에는 대리석 공장, 빵 공장, 간장 공장… 공장이 엄청 많았지. 그때는 여기를 깡시장이라고 했어. 이 길로도 사람이 무지 많아서 댕기덜 못했어. 여기서 방앗간 한 지는 50년 정도 됐지. 이 건물은 69년도에 지었나 그럴 거야. 이걸로 벌어서 애들 다섯 키우고, 지금은 공무원 하고 있어. 한 30년 전만 해도 방앗간이 열세 개 정도 있었는데…. 엑스포 때도 엄청 바빴어. 새벽에 나가서 저어기 동양강철, 연구단지며 신흥제분 같은 데 고춧가루 배달을 했어. 청주, 괴산, 상주… 안 간 데가 없어. 그때는 하루에 천근씩 고춧가루를 빻았어. 이제는 집도 다 뜯기고, 이사 가고 사람들도 죽고 없고, 나밖에 없어.”
점포 앞 빨간 대야에 소복하게 쌓여 있는 고춧가루가 아니었더라면 여전히 영업 중이라는 걸 모를 뻔했다. 오전 열 시부터 오후 여섯시 까지. 어느 때로부턴가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방앗간에 할아버지는 매일 출근한다. 이제는 비록 소일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말이다.
임희균 할아버지는 여든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무척이나 유쾌하고 낙천적인 사람이었다. 그가 던지는 농담에 무표정하게 길을 가던 동네 사람들은 종종 웃음을 터뜨렸다. 덕분에 쓸쓸하게만 보이던 골목도 조금쯤은 환해진 듯했다.
“오늘 죽어도 만족, 내일 죽어도 만족이야. 없어도 재밌게 사는 게 좋아. 죽으면 빈주먹인데 뭐.”
삼성시장은 본래 ‘삼성동 농수산물시장’이었다. 오정동 농수산물시장이 생기기 전에는 원동의 농수산물시장과 함께 상거래가 활발했다. 당시에는 대전에서 거래되는 농·축·수산물의 경매와 도매가 이루어지던 큰 규모의 시장이었지만, 오정동 농수산물시장이 생긴 이후 상권이 급속하게 쇠퇴했다.
“대전에서 제일 큰 시장이었지. 그때는 깡시장이라고 해서 과일이고 야채고 여기서 경매하고 다 출고됐어. 이 앞에 아파트 생기기 전에 다 시장이었지. 오정동 시장 생기고 나서는 다 거기로 옮겨갔잖아.”
삼성시장2길 모퉁이 떡집 앞에 앉아있던 60대 아저씨가 시장길을 두리번거리는 기자에게 삼성시장의 옛 모습을 일러줬다. 도매시장이 들어선 게 정확히 언제쯤이냐고 묻자 아저씨는 고개를 갸우뚱 하더니 맞은편 생선가게 아주머니에게 묻는다.
“생긴 지가 46년 됐지.”
굽은 허리로 분주하게 일을 하는 와중에 ‘춘광상회’ 아주머니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을 해 왔다. 올해 예순여덟이 된 아주머니는 스물넷에 부산에서 대전으로 시집을 와서 지금까지 줄곧 장사를 해왔다고 했다. 미나리꽝이었던 곳에 남편이 가게를 지었기에 시장이 생긴 때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옛날에는 여기가 아주 금싸라기였어. 잘됐지, 말도 못혀. 우리 가게도 사람 여섯 명을 두고 장사하고, 차가 몇 대나 됐는 걸. 이 안쪽에 가게가 마흔네 개가 있었는데, 이제는 저쪽에 닭집이랑 우리집만 남았지. 이렇게 있어도 오는 사람 별로 없어. 자식들도 힘들다고 못하게 하는 걸 이러고 있는데 이제는 나도 그만 할라고.”
삼성시장2길은 총 세 블록에 걸쳐 있었다. 한때는 점포로 들어찼을 가장 아래블록은 터만 남은지 오래된 듯했다. 가운데 블록에는 건어물상, 떡집, 옷집, 젓갈가게 등 그나마 예닐곱 집이 남아 근근이 영업을 하고 있었다. 도매시장이었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고, 수십 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상인들의 대답에는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한때 활기가 넘쳐 발 디딜 틈이 없었다던 시장의 일부는 아파트가 됐고, 풋살장이 됐고, 빌딩이 됐다. 삼성 농수산물시장, 아니 ‘깡시장’을 기억하는 몇 남지 않은 상인들 또한 머지않아 슬슬 이곳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