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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02호] 활짝 핀 꽃 백송이 같이
중구 대흥동 가톨릭문화회관 건물 1층 한구석에 자리한 성림상회는 1986년부터 같은 자리에서 동네 곳곳을 지켜본다. 30년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동네의 변화를 때론 안타까운 시선으로 지켜 봤고 그 변화에 따라 성림상회 또한 여러 번 모습을 바꾸며 제 역할을 달리했다. 가지 철이 끝나가는 초가을 어느 날의 성림상회. 열 평 남짓한 작은 가게 앞의 얕은 단에 가지가 줄을 지어 누워 있다. 큰 놈은 네 개, 작은 놈은 다섯 개쯤이 천 원이다. 자세히 보면 드문드문 상처가 나 있기도 한 가지들이 주인을 잘도 찾아간다. “가지 하나 주세요.” 가게 밖에서 손님이 가지를 찾으면 카운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비닐봉지 한 장을 꺼내 나가는 사람. 성림상회의 주인 엄춘자 씨다.
조그마한 공간에 들어가자마자 눈을 사로잡는 건 한쪽 끝에 있는 담배 진열장이다. 담배회사에서 설치해 줬을 법한 화려한 조명이 눈길을 끄는 진열대는 이 가게에서 가장 화려하다. 담배는 성림상회의 효자 상품이다. 주로 단골과 우연히 가게 근처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사 간다.
어느 볕 좋은 아침, 성림상회에도 어김없이 평화로운 시간이 흐른다. 엄춘자 씨는 카운터 앞에 앉아 가지를 자르고 있다.
“가지를 말리려고 자르지. 말려서는 팔지. 말린 가지를 볶아 먹지 뭐해? 한 번에 수십 키로씩 사가는 걸.”
남편 변택선 씨가 직접 농사지은 가지는 인기가 좋다. 한 번 맛본 사람은 꼭 다시 와서 사갈 만큼 맛이 좋다는 게, 엄춘자 씨의 자랑이다. 친환경으로 농사지어 매끄러운 모양새를 하고 있지는 않더라도 맛은 그만이라, 찾는 사람이 꽤 많다. 냉장고에 한가득한 가지가 하루이틀이면 동난다.
가게 내부는 좌우를 반전시킨 ㄴ자 형태다. 왼쪽에는 아이스크림 냉장고와 음료 세트 등이 있고 오른쪽 뒤로 이어진 공간에는 라면, 과자, 냉장고 등이 놓였다. 슈퍼마켓에서 볼 수 있는 물건들은 다 있다. 그리고 흔히 볼 수 없는 것들도 있다. 풍선이라든지, 본드라든지 문구점에 있을 법한 것들도 진열장 한편에 자리했다.
“예수님 그런 걸 뜻하겠지. 나도 뜻은 잘 몰라. 성림이 30년 전에 했던 성당 교우 모임 이름이었거든. 그 이름 그대로 성림상회라고 한 거야. 사람들이 내 이름이나 딸 이름이 성림인 줄 알고 자주 물어봐.”
엄춘자 씨는 성림상회를 간단히 소개했다. ‘성림’이 성당 교우 모임의 이름이었으며, 1986년에 문을 열었고, 잡화를 다룬다고 말이다.
서울에서 양장점 기술자로 일하다 변택선 씨를 만나 결혼해 이것저것 한 게 많았다. 이사를 열댓 번씩 다녔고 소도 돼지도 키우고 여러 일을 했다. 밥 한 그릇 먹기도 어려운 시절이었다. 소를 키우면 소 값이 떨어졌고 돼지를 키우면 돼지 값이 떨어졌고 빚을 졌다.
변택선 씨가 돈을 벌러 미국에 3년 동안 가 있으면서 빚을 다 갚았다. 그가 미국에 있을 때 엄춘자 씨는 혼자 대전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미국에서 돌아온 그와 함께 시작한 것이 바로 성림상회다. 변택선 씨의 친구가 하던 가게 점포에 성림상회를 차렸다.
밥은 먹고 살았지만, 여전히 어려웠다. 월세를 내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변택선 씨가 직접 농사지은 농작물을 팔기 시작했다. 엄춘자 씨는 과거 양장점에서 일했던 경험을 살려 수선 일을 겸한다. 가게를 돌봐야 하기 때문에 다른 수선집보다 빠르게 마칠 수는 없지만, 예쁘고 꼼꼼한 바느질 솜씨 덕에 수선 단골도 많다. 특히 근처 지하상가 옷가게에서 수선을 맡겨 온다. 처음에는 맞춤 옷도 주문받아 만들었다. 성모병원 합창단 단체복을 40벌 만든 일은 지금도 가끔 회상하면 흐뭇해지는 기억이다.
“대흥동 엄청 변했지. 중구청이며 시청이며 다 우리랑 거래했었지. 외환은행, 주택은행, 성당, 유치원, 한나라당 다 우리랑 거래했는데 언젠가부터 떨어져서 없어. 지금 오는 손님들은 다 개인이지. 왔다 갔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이야.”
현재 우리들공원 자리에 중구청이, 중구청 자리에는 시청이 있고 그 옆으로 충남도청도 있었을 때가 성림상회의 호황기였다. 주요 관공서가 다른 곳으로 이전하고 나서 손님 수가 줄었다. 손님이 준 데 그 탓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성림상회 근처에는 없지만, 대형마트라는 것이 생기고 나서 손님이 현저하게 줄었다. 장사가 제일 안 될 때는 명절 전이다. 살 것이 많을 때 작은 가게에 들르는 사람은 없었다.
줄곧 어렵게 살았고 항상 바빴다. 가게에 나오면 챙길 것이 많았다. 가지도 손질해야 하고 수선 일을 하고, 가끔 TV 프로그램도 챙겨 보고 하면 시간이 후딱 갔다. 아침 아홉 시쯤 나와서 밤 열한 시가 넘어야 집으로 돌아가는 하루하루가 금방 흘러갔다. 이렇게 보내는 하루를 쉽게 거른 적은 없다. 성림상회 운영을 시작한 날부터 지금까지 특별한 일이 없으면 쉬는 날 없이 매일 가게에 나와 자리를 지킨다.
일요일 오후에는 변택선 씨가 가게를 본다. 엄춘자 씨가 유일하게 가게에 나오지 않는 시간이지만 마음이 쉽게 놓이지는 않는다. 물건 가격을 잘 모르는 변택선 씨가 집으로 전화를 해 오기 때문이다.
“딴 데 가서 이 돈으로 할 수가 있간? 우리 아저씨가 노다지 가게 내놨었지. 서로 달라고 그랬지. 그런데 내가 안 혔어. 내 성격이 한 번 붙들어 놓으면 놓질 않거든.”
1986년부터 지금까지 가게를 운영하며 어려운 일도 많았지만, 엄춘자 씨는 30년 가까이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 무엇보다 가게에 나오는 일이 행복하기 때문이다.
“구멍가게야 만날 똑같지 뭐. 남들 같으면 30년 가게 하면 지겨워서 더 못한다더라고. 활동적인 사람은 절대 못 해. 얼마나 답답할 겨. 나는 한번도 하기 싫었던 적이 없었어. 하기 싫었으면 벌써 못했지. 질리지가 않았어. 가게 나오면 좋았으니까.”
엄춘자 씨는 화장실에 갈 때나 볼일이 있을 때 잠시 가게 문을 닫아 두고 자전거를 끌고 밖으로 나온다. 하루 중 가장 좋은 시간은, 장사가 잘될 때다. 장사가 되지 않는 날에는 어떻게 세를 감당할까 싶어 스트레스 받기도 하지만, 엄춘자 씨의 천성이 긍정적이어서 많은 것이 즐겁다. 가게를 찾는 손님들과 짧은 대화를 이어가는 것도 재미있고, 어렸을 적 자주 왔었다며 부러 찾아오는 손님들과 마주하는 것도 기쁘다. 얼굴은 기억나지 않더라도 그저 반갑기만 하다.
“지금이야 행복하지. 젊어서는 고생을 너무 많이 했어. 근데 지난 일은 어쩔 수가 없잖아? 안 좋은 것, 남이 잘못한 것을 기억하면 나만 손해야. 지나간 걸 왜 끄집어내고 매달려서 병들고 그래? 지나간 건 지나간 거야.”
시골에서 농장을 하던 젊은 시절. 장에 무얼 사러 나가면 산에 가 꽃을 한아름 꺾어 가지고 왔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아저씨가 참 속 터져했을 거라고 회상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엄춘자 씨는 꽃을 좋아한다. 그래서 얼마 전 생일 날, 딸이 선물해 준 꽃바구니의 꽃들을 말려서 잘 보관하고 있다.
“꽃바구니에 꽃을 하나하나 세어 보니까 작은 꽃까지 합하면 백 송이가 넘더라고. 너무 좋은 거야. 집에다 뒀는데 나는 집에서는 잠만 자니까 일주일만 뒀다가 가게로 가지고 왔어. 사람들이 이런 꽃이 어디서 났느냐고 놀라더라고. 자기네들은 누가 꽃을 사 오면 돈 아깝다고 왜 샀느냐고 한다더라고. 나는 정말 좋아서 딸을 안아 줬었어.”
“겨울에는 고구마 농사지은 걸로 군고구마 장사를 해. 유명하지. 그때 되면 다섯 시부터는 아저씨가 가게를 봐 줘. 숯불에다가 고구마를 구니까 맛있지. 얼마나 잘 나간다고. 겨울에 아저씨가 돈 많이 벌어. 내가 용돈 하나도 안 줘. 오히려 나한테 벌어서 주지. 나는 고구마 통도 못 건드리게 하는걸.”
12월쯤까지 농사지은 배추를 다 팔고 나면, 성림상회에 군고구마가 등장한다. 계절의 흐름에 따라 성림상회 앞을 장식하는 농작물의 종류도 바뀐다.
한 가지 변하지 않는 것은, 똑순이 아줌마 엄춘자 씨다. 15년 전쯤, 한 매체가 엄춘자 씨를 취재한 적이 있었는데 그녀를 ‘똑순이 아줌마’로 소개했다. 지독하게 열심히 일하니까 똑순이였다고 엄춘자 씨는 말한다.
밤 열두 시에 가게 문을 닫고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엄춘자 씨. 대전천을 따라 집까지 돌아가는 그 길은 언제나 신이 난다.
“몸은 늙어도 마음은 아가씨 같아. 젊었을 때 기분으로 살아. 늙었다는 생각이 안 들어.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댜. 나중에 늙어 봐. 즐겁게 살아 난. 걱정거리가 없는 사람이 어딨겠어. 남들이 나를 보면 불행하다 생각할지도 모르지. 그런데 나는 즐겁게 살아. 없는 사람은 암만 벌려고 해도 못 벌어. 돈이 있어야 돈을 벌겠더라고. 그런데 어느 궤도에만 올라가면 돈이 조금씩 벌리더라고. 그때부터 어려운 건 없어. 나는 이제 돈 때문에 절절매거나 남한테 손 벌리는 정도는 지났어. 나이가 몇이여. 가게는 수족 못 쓰고 계산 못 하면 그만 둬야겠지. 그때까지는 못 그만 둬. 아저씨가 몇 번 그만두려고 했지. 그런데 내가 꽉 잡고 있으니 못 그만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