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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02호] 갑천에 누운 버드나무가 들려주는이야기는그렇게흘러갔다.
지구를 콘크리트로 뒤덮기 시작했던 그 즈음에, 우리는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함께 덮어버렸다. 그 콘크리트 위에서 ‘돈’을 자양분으로 ‘오만함’은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랐다. 아무도 입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이 세상에 모든 땅을 콘크리트로 덮어버리면, 하늘에 둥실 떠있기라도 한 것처럼 생활이 무척 편리하고 삶이 행복하리라 믿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바벨탑을 쌓아 하늘에 닿을 것이라 믿었던 그 옛날 사람들처럼 말이다. 이 오만함이 얼마나 어리석었던 것인지 흙땅 위에 온전히 발을 내딛고 선 순간에야 비로소 깨닫기 시작한다.
흘러 내려온 월평공원 산자락 끝은 갑천에 닿았다. 옛날 할머니 치마폭처럼 그 끝자락이 펑퍼짐하게 펼쳐지다가 물 아래로 모습을 감춘다. 그 지점을 흐르는 갑천은 이미 많이 피로해 보인다. 도심과 가까워졌다는 증거다.
유성에서 월평공원 끝자락 즈음에 내팽겨치다시피 차를 세워두고 내려선 갑천에 쇠백로 몇 마리가 한가로이 노닌다. 불과 몇 미터 아래로 몸을 낮췄을 뿐인데 눈 앞에 펼쳐진 세상 풍경은 천길 낭떠러지 아래로 내려온 것마냥 사뭇 다르다.
큰물이 내려갈 때 틀림없이 물이 들어찰 둔치는, 군데군데 ‘습지’를 사이에 두고 갑천을 따라 이어진다. 산이 물러난 지점은 광활한 대지라고 할 만큼 넓다. 산이 바짝 다가서고 물이 물러난 곳은 좁다. 바짝 다가선 곳의 산세는 강인하고 당당하다. 물을 가둘 만큼 강인하지 못하다면 그렇게 물에 다가설 수 없다. 산과 물이 만나 그런 형태로 조화를 이루며 다양한 풍경을 만들어 낸다.
가만히 서서 갑천을 거슬러 오르며 이어지는 흙길을 바라본다. 두 사람이 걷기에도 어깨를 부딪혀야 할만큼 조붓한 길이 저 멀리서 소실점 끝으로 스며든다. 그 모습이 너무 이질적이어서 거대한 풍경 사진 앞에 선 것처럼 현실감이 없다. ‘따릉따릉’거리며 자전거 한 대가 멀어질 즈음에서야 감각이 돌아온다. 길 옆으로 비켜 설 만한 공간은 처음부터 충분했다. 다만, 그곳에 이름 모를 식물이 자라고 있어 망설였다. 잠깐 밟았다고 쉽게 삶을 놓아 버릴 만큼 약해빠졌다면 애초에 풀일 수가 없다. 다만, 그것도 생명이기에 조금 미안했을 뿐이다.
한동안 비가 뿌리지 않아 그랬는지 그 조붓한 길에 흙땅은 딱딱하게 굳었다. 아무리 딱딱해도 콘크리트로 덮어버린 땅과는 분명 달랐다. 밀어내지 않고 끌어안는다. 그 끌어안는 기운이 천천히 피곤한 다리를 타고 올라온다.
흙을 밟으며 풍경 속으로 들어선다. 갑천 우안을 따라 왼편에 월평공원을 두고서다. 아침이라 그런지 밤새 울었을 풀벌레 소리가 여전히 남아 귓가를 맴돈다. 갑천을 따라 자라는 버드나무 사이로 멀리 허여멀겋게 올라선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보인다. 허리 아래를 목욕타올로 가린 채 맨몸을 드러내고 하릴 없이 서있는, 모자라 보이는 사내가 떠오르는 풍경이다. 갑천과 이어지는 습지와 둔치, 야트막한 동산 너머로 그렇게 다른 세상이 서 있다. 얼른 시선을 거둔다.
군데 군데 피어 있는 이름 모를 풀꽃은 진귀하다. 눈 부시지만 한결 부드러워진 햇살이 바람에 흔들리는 물억새에 부딪혀 흩어진다.
그 곁을 어깨를 맞댄 채 걸어가는 중년 사내 둘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도심 속 커피 가게에서 찻잔을 앞에 두고 나누는 이야기와 설혹 같은 이야기일지라도 막힌 곳 없이 열린 공간에서 나누는 이야기는 그 운명이 다르다. 이야기가 입밖으로 나와 막힌 공간에서 부딪혀 다시 내 안에 쌓이는 대신 허공으로 산산히 흩어지며 다시는 내게로 돌아오지 않을 듯싶다. 우리는 어쩌면 꽉 막힌 콘크리트 공간 안에서 너무 많은 이야기를 쏟아내며 사는지도 모르겠다. 인체에 노폐물이 쌓이듯 그렇게 내 입밖으로 나선 말은 흩어지지 못하고 내 안에 다시 쌓여 콘크리트처럼 딱딱하게 굳어가며 삶을 점점 더 무겁게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자전거를 나란히 풀숲에 세워 둔 채 걸어서 어디론가 사라졌다. 월평공원 산자락을 타고 강에서 산으로 이동한 듯싶다. 태초의 인류가 물에서 나와 산으로 올라갔다는 생각은 아마도 영화 <프로메테우스> 영향이 큰 탓이다. 산에 오른 자전거 주인은 등성이를 타고 이유도 모른 채 한참을 오르락 내리락 할 것이 분명하다. 물론 자각하지는 못한다. 맑은 공기를 쐬며 적당히 걸으면 건강이 한결 좋아지거나 나쁜 병(일테면 암따위)에 걸릴 확률이 현저히 감소할 것이라는 기대를 내심 할 것이다. 그것이 산등성이를 오르락 내리락 하는 분명하고 확실한 이유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것은 현상일 뿐, 숲속을 헤매는 것은 우리 인류가 물에서 걸어나왔을 때부터 이미 선택한 운명이다. 물 속에 그대로 있었다면 숲속을 헤매는 일도 없었을 터인데. 그렇다고 후회할 필요는 없다. 물에서 기어나와 산속으로 들어서는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그 호기심이 주는 강력한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문제와 이를 단초로 시작하는 혁명의 기운은 이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는 인류의 나약함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숲속에서 내려온, 자전거 타는 인류는 다시 자전거를 끌고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한결 건강해졌다는 만족감을 한가득 안고 이번에는 콘크리트 숲 속을 헤맬 것이다.
굽이굽이 이어지는 조붓한 길을 바라보며 문득 이 길이 반듯하지 않은 것은 산줄기의 흐름 탓일까, 물줄기의 흐름 탓일까, 애시당초 반듯하게 걸어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우리 인류의 본성 탓일까, 궁금했다.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이 눈 앞에 나타난 것은 이런 생각에 걸음이 더 휘청거릴 즈음이었다. 그 구조물 위로 덩치 큰 버스가 지나가며 용도를 설명한다. 미리 약속한 기호가 적힌 거대한 깃발이라도 흔들어주는 듯하다.
동서대로가 월평공원을 뚫고 나와 갑천을 가로지르는 그 즈음은 지금까지 걸었던 그 어떤 곳보다도 아름다운 참나무숲길이다. 활엽수인 참나무는 그 종류도 다양하다. 참나무마다 잎의 모양도 제각각이고 수피도 다르고 도토리 모양도 다르다. 그 다양함은 참나무라는 좀 더 큰 테두리로 묶였다. 그 참나무 한 그루가 어울리지 않게 아주 얇은 가지를 드리웠고 그곳에 거미 한 마리가 소박한 거미줄을 쳤다. 그 작은 거미줄이 햇볕을 반사하지 않았다면, 어지간히 관찰력이 좋은 사람도 그곳에 그런 것이 있다는 사실을 쉽게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거미줄 위치나 모양새 등을 고려했을 때 집중력이 떨어져 멍하게 주변을 배회하는 벌레를 목표로 했다기보다는 딱 그 시간, 참나무 숲길에 쏟아져 내리는 오전 햇살을 잡아두려는 참나무의 욕망이지 싶다.
제 생명을 다하고 누워버린 버드나무 한 그루가 처연하다. 아직까지는 밑둥은 그냥 둔 채로 과거 가지가 축축 늘어졌을 부분에만 넝쿨식물이 풍성하게 올라앉았다. 그렇게 누워버린 버드나무가 여전히 살아 있는 듯하다. 그 너머로 반듯 반듯, 절대로 쓰러지는 일이 없다는 걸 웅변이라도 하듯 아파트 단지가 곧게 섰다. 그 순간, 버드나무는 건장한 침략자 앞에 쓰러져 밭은 숨을 쉬며, 삶의 순환을 이야기해주는 현명한 노인과 같았다.
갑천에 누운 버드나무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강물 위에 얹혀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