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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06호] 마음의 휴식, 이푸가오 가는 길.
지난 2월 25일부터 29일까지 4박 5일간, 필리핀 공정여행 <천상의 녹색계단, 이푸가오 가는 길>에 참여하고 돌아와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해 보려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 지난 이선희 작가님의 연재 글을 쭉 다시 읽고 나서 할 말이 없어졌습니다. 이렇게 훌륭하게 여행을 담아 주신 글이 있는데 무슨 후기가 또 필요한가 싶어져서 할 말을 잃었던 것입니다. 소심하게 꿍해 있다가 내가 여행을 하며 보고 온 건 필리핀과 라이스 테라스가 아니라 ‘스물여덟의 나, 자신’이라는 생각에 다시 용기를 내어 끼적여봅니다. 여행을 많이 해 보진 않았지만 공감만세 여행의 강점이랄까 다른 여행사와의 차별된 부분에 대해서는 얘기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두 명의 코디네이터 그리고 저를 포함해 여덟 명의 여행자가 참가한 이번 여행의 오리엔테이션에서 저는 말했습니다. “아시아란 지역이 지리적으로 가깝지만 그 어느 곳보다 심리적 거리감이 멀었습니다. 그래서 아시아를 만나는 첫 여행은 좋은 길잡이와 함께하고 싶어 ‘공감만세’와 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좀 더 솔직하게 내면을 들여다보자면, 휴대전화와 ‘안녕!’ 하지 않는 지역이 아니고선 직장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고, 회사라는 집단이 보장하는 제도가 정말 보장된 것이 아니며, 외부적인 다른 힘(일례로, 기한이 정해진 여행사의 상품을 이미 구입했다^^*)을 빌리지 않고선 연차를 이틀 이상 쓰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깨달은, 만 2년 차 햇병아리 직장인의 선택이었습니다.
첫째, 이야기가 있는 여행이다
호세 리잘 기념관에 갔을 때예요. 필리핀 여행 동안 공항 외엔 한국인을 볼 일이 별로 없었는데 여긴 다른 한국인 관광객 분들도 많이 찾아오시더라고요. 단체여행의 한 가이드분이 어느 문 앞에서 간단하게 설명을 하고 지나가시더라고요. 그 뒤에 우리가 그 문 앞에 섰을 때 ‘쏘야(공감만세 여행 코디네이터)’가 해 준 설명은 앞의 가이드분이 한 설명과 사뭇 달랐습니다. 고개를 들어 조각상에 새겨진 말을 탄 스페인인과 말발굽 아래 짓밟히고 있는 필리핀인을 만날 수 있게 해주었고, 문 뒤쪽으로 바닥에 박힌 발자국 모양이 누구의 것인지 왜 그 보폭이 그렇게 좁은지 알려 주었습니다. 스쳐 지나갔더라면 알 수 없었을 이야기이지요. 이런 순간은 무척 많았습니다.
KFC와 맥도날드가 널려있는 마닐라에 다람쥐처럼 생긴 마스코트가 왜 저렇게 많은지도, 아시아 안에서도 최대 규모라는 ‘몰 오브 아시아(Mall of ASIA)’ 안에도 공정무역 가게가 당당히 자리 잡고 있다는 것도 알려 주었습니다. 이런 이야기 덕에 우리의 여행이 훨씬 풍성해졌습니다.
둘째, 여유가 있는 여행이다
제가 필리핀에서 머문 4박 5일은 길지 않은 시간이기에 좀 더 촉박했습니다. 하루는 비행기를 타느라 또 하루는 야간버스를 타느라 시간을 써야 했습니다. 그래도 크게 피곤하지 않았던 건 충분히 참가자들을 배려한 시간 배분 덕이었던 것 같아요.
밤늦게 삼팔록 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아침에야 바나우에에 도착했을 때, 저를 비롯해 모두가 지쳐 있었거든요. 따끈한 코코아와 샌드위치도 맛났지만 그보다 밤새 지친 몸을 쉴 수 있게 숙소를 잡아 오침을 취한 시간은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유럽여행을 할 때 돈이 없어서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국경을 넘는 야간기차를 타고도 도착한 국가에서 지친 몸을 끌고 다니다 울어 본 적이 있는 저에게만 특별한 사건인지는 몰라도요. 어찌 보면 바나우에에서 후딱 바타드로 넘어가 이미 잡은 숙소에서 휴식을 취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하나라도 더 보여 주겠다며 조급증을 낼 수도 있었을 텐데, 그보다는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아침 햇살과 푹신한 침대에서의 휴식을 선사한 마음에 코끝이 찡했던 건, 제가 감상적이어서는 아닐 겁니다.
이것 외에도 사이먼 산장에서 천상의 녹색계단이 놓인 산꼭대기부터 천천히 아침 햇살이 내려오던 걸 바라보던 순간, 바타드에서 새들까지 한 시간 남짓 걷고 지프니 위에서 매연을 듬뿍 맞은 채 샤워 순서를 기다리며 먹던 감자튀김, 아시안 브릿지에서 하루 묵고 산책을 하다 만난 어느 교회에서 들려오는 찬송, 그 모든 찰나가 저는 무엇보다 기억에 남습니다. 이런 여백이 전 참 좋았어요.
셋째, 만남이 있는 여행이다
해외여행을 다니다 보면 사실 한국 사람들의 꼴불견을 종종 보게 되는데요, 지금도 제가 기억하는 한 사건이 있습니다. 파리의 어느 식당에서 대학생쯤 돼 보이는 관광객 여덟아홉 명쯤을 데려온 인솔자가 여행객은 두고 자기 일정이 끝났는지 비용을 내고 떠나려는데 자기는 팁을 내지 않겠다며 식당 종업원과 싸우던 장면입니다. 사실 거긴 샹젤리제 거리에서도 가격이 저렴하기로 소문이 난 곳이었는데, 지금 생각해 봐도 그렇게까지 큰 소리로 종업원과 실랑이를 했어야만 했나 싶거든요.
그런데 저를 인솔해준 코디네이터들은 한국에서 온 친구들에게뿐만 아니라 필리핀 사람들에게 참 친절했습니다. 그들에게 안부를 물었고 함께 차를 타고 길에 내려 주면서는 잠시의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포옹해 주었습니다. 항상 고맙다고 말했고 이 코스를 한두 번 오는 것도 아닐 텐데 모르는 것이 생기면 진지하게 묻고 다시 우리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런 모습에 믿음이 갔습니다.
이들이 우리를 여기로 데려온 ‘공정여행’이란 단어가 허울이 아니라 진심이라고, 우리에게 한 약속을 지킬 것이고 필리핀들에게 준 신뢰도 함부로 허물지 않을 거라고 말이죠. 내가 가족에게 친구에게 이 여행은 꼭 가 보라고 추천해 줘도 부끄럽지 않겠다는 믿음을 주는 일은 쉽지 않은데 말입니다.
짧은 여행 기간 동안 필리핀에 대한 정보가 그다지 늘지도 않았고 남긴 사진도 몇 장 없습니다. 하지만 4박 5일간 함께 한 친구들과 나눈 수다가 제게 위로가 되었고 웃음과 활력이 되었고, 바타드의 논은 잊고 있었던 남해 가천 다랭이마을의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을 떠올리게 해 주었습니다. 문제는 또 떠나고 싶게 한다는 것이지만요. 즐거운 여행을 함께해 준 여덟 명의 친구와 공감만세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며, 저의 후기는 이만 마치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