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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06호] 눈밭에서 목련을 생각하다
기다리던 택시가 오고, 당신은 가방이랑 짐꾸러미를 챙겨 들고 차 문을 닫습니다 짐을 챙기느라 당신을 미처 챙기지 못한 당신, 내 옆에서 무언가를 기다리며 당신이 서 있습니다 깜박깜박 졸음에 빠져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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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옵니다 저 저녁을 다 덮는 흰 이불처럼 눈이 옵니다 발걸음 소리가 들립니다 당신은 짧은 길을 길게 돌아서, 찬 기운 가득한 빈집에 들어가 버리고, 당신이 남긴당신과 나는, 이 눈을 다 맞고 서 있습니다
봄이 올 때까지 주먹을 펴진 않을 겁니다 내 주먹 안에당신에게 줄 밥이 그릇그릇 가득합니다 뜸이 잘 들고 있습니다 새봄에 새 밥상을 차리겠습니다 마디마디 열리는따뜻한 밥을 당신은 다아 받아먹으세요
(김소연, 「목련나무가 있던 골목」 부분,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민음사, 2006)
이 시의 배경은 눈 내리는 저녁이다. 눈이 내리는 가운데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짐을 들고 택시를 탄다. 언덕 아래에 불빛이 하나둘 켜진다. 택시가 오고 그 사람이 짐을 가지고 떠나 버렸는데도 남은 사람은 “당신이 서 있”다고 느낀다.
시의 화자가 느끼는 것은 당신의 부재이다. 화자는 “당신”이 이미 떠나 버렸음에도 눈 속에 홀로 서서 떠나가는 “발걸음 소리”를 듣고, “당신이 남긴 당신과 나”를 오래 응시한다. 당신이 남긴 것이 왜 “당신”만이 아니고 “나”인가. 이 지점에서 여운이 생겨난다. 대상이 있던 자리에 들어차는 것은 대상만이 아니다. 대상을 의식하던 나라는 존재도 새롭게 인식되며 다시금 불려 온다.
당신이 남기고 간 것은 존재의 그림자. 화자인 나는 그 그림자와 함께 있다.
화자는 주먹을 꼭 쥐고 서 있다. “당신”의 부재를 견디고 서 있다. 당신이 남기고 간 “당신과 나”를 끌어안고 눈을 맞으며.
화자는 말한다. “내 주먹 안에 당신에게 줄 밥”이 가득하다고. 봄이 오면 “따뜻한 밥을” 혼자 다 먹으라고 하는 마지막 문단은 부재를 견디는 자가, 부재하는 자에게 내뱉는 소극적인 공격, 빈정거림이 묻어난다. 어차피, 화자는 기다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월 들어 눈이 잦다. 얼마 전 무시무시한 한파가 몰아닥치기도 했다. 어느 밤, 영하의 추위 속에 눈이 내렸다. 가로등 불빛 아래서 가느다란 눈이 반짝거리며 떨어지고, 길에 쌓인다. 시인의 말처럼 “흰 이불처럼” 눈은 세상을 고즈넉하게 덮고 있었다. 추위와 흰 눈, 겨울만이 줄 수 있는 축복이다. 온갖 소란스러운 세상살이의 잡스러운 것들은 차갑게 얼어붙는다. 눈 내리는 소리와 눈 밟는 소리만 가만가만 들려 온다.
목련 꽃송이는 눈 내리는 날의 고요를 담고 있다. 흰 꽃송이 가득 눈송이같이 깨끗한 흰빛이다. 차가울수록, 눈 내리는 밤 추위에 시달릴수록 우리는 따뜻한 무언가를 그린다. 눈 내리는데 혼자 서서 쥔 주먹, 거기에 열기가 쌓이고 그 기다림의 열기가 흰 밥 같은 목련 한 송이로 피어난대도 믿고 싶은 그런 추운 날들이다.
이미 이 눈 속에 목련 한 송이 담겨 있다면, 또 동시에 지고 있다면 거짓말일까, 진실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