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06호]나,잘해요_칼럼,서한나

세상에서 제일 매력 없는 말은 ‘취업 준비생’이다. ‘취업 준비 중’이라는 말이 이름 앞에 붙는 즉시 신체에 변화가 생긴다. 먼저 어깨가 굽는다. 눈빛이 불안해진다. 온몸으로 주변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이런 사람은 매력적이지 않다. 
 

 

 

 
나,잘해요

나는 취업을 준비하는 25세 A양이 아니라 그냥 서한나인데, 나를 처음 만난 사람들은 “취업 준비 중이겠네요.” 넘겨짚는다.  
상대가 정보처리를 끝내고 내게 라벨을 붙이기 전에 재빨리 뱉는다. “저는 취업 준비 같은 거 안 해요.” 세게 나간다. 그럼 무엇을 하면서 지내느냐고 대번에 묻는다. 대전청년잡지 <보슈>를 만들고 있다고 하면, 상대방이 30세 이하일 경우 그 활동은 ‘대외활동’이냐고 묻는다. 40세 이상은 ‘동아리’냐고 묻는다. 둘 다 아니라고 하면, 그럼 뭐냐고 묻는다. 글쎄요…. 제가 뭘 하고 있는 걸까요. 정체성 혼란이 일어난다. 이 도끼가 내 도끼가 맞나 싶다. 자신이 아는 범위 내에서 상대를 규정하는 것은 편하고도 폭력적인 일이다. 


내 일과를 말해 보겠다. 월요일 기준 오전 11시 기상, 시내버스 114번을 타고 충남대학교 도서관에 간다. 앉아서 간다. 읽고 싶은 책을 한두 권 빌린다. 시집도 빌리고, 에세이도 빌린다. 1층 도서관 카페에서 커피를 시켜 놓고 그걸 좋아라 하며 읽는다. 오후 두 시쯤 밥을 사 먹고 <보슈> 에디터팀 회의를 하러 카페로 간다. 회의는 저녁 먹기 전쯤 끝낸다. 집에 가서 컴퓨터로 웹 매거진 <아이즈>를 읽다가 지겨워지면 영화를 다운받아 새벽까지 본다. 눈이 빠질 때쯤 잔다. 
매일 이렇게 산다. 어쩌다 돈이 생기면 어은동 란 스시에서 특 초밥을 사 먹는 정도의 이벤트가 있을 뿐.    


2015년 3월, 학교에서 <미디어 비평> 수업을 들었다. 자기소개서를 쓰는 과제가 있었다. 일필휘지로 써냈다. 교탁 짚고 낭독도 했다. 이보다 더 만족스러울 수 없었다. 그 속에 있는 건 진짜 ‘나’였다. 내 발표가 끝나고 한 언니는 이렇게 말했다. “자기를 한 번 돌아보고 쓴 자기소개서 같아요.” 물론 교수님께선 4학년인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 취업준비용 자기소개서를 써오라고 하신 거였다.
거기에 이렇게 썼다. “저는 감과 촉이 좋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웬 순진한 소리인가 싶지만 진심이었다. 감과 촉이 좋은 사람이 되려면, 앞으로 5년은 더 세상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겨야 한다. <보슈> 만드는 일을 하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과 협업하는 건 늘 어렵고(내 말이 다 맞아) 매일 크고 작은 폭력을, 그것이 폭력인지도 모르고 저지르면서 살고 있다. 나 같은 사람이 섣불리 사회에 데뷔하는 것은 모두에게 위험하다.


준비되지 않은 로켓을 “자, 이제 때 됐으니 화성으로 가라!” 하고 발사하면 어떻게 될까? 폭발하지.   
5년 더 백수 내공을 쌓으려면 생활비가 있어야 한다. 가족 집에 빌붙으면 집은 없어도 되고, 최소한의 품위유지비를 포함해서 한 달에 40만 원이 필요하다. 스무 살부터 지금까지 분야를 넘나들며 열 종이 넘는 아르바이트를 해 왔으니 이제 시급 노동은 그만하겠다. 그러자면 대안은 하나. 누군가 나에게 매달 40만 원을 투자해야 한다. 
당당하게 말도 잘하는 나. 취업 준비하는 또래를 감히 안쓰러워하는 나. 언제까지 고고한 척하면서 살 수 있을까?  
아직은 버틸 만하다. 누군가 내 신분을 물으면 대학생이라고 말하면 되니까 민망한 상황을 피할 수 있고, 학생이니까 집에 붙어있는 것도 정당하다. 그러나 올해 8월, 나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영혼을 팔아 취직하거나, 얼굴 가죽을 두껍게 만들어서 더욱 뻔뻔하게 집에 빌붙거나.
영혼을 팔아 취직을 한다고 말한 건 이런 거다. 내가 면접관의 선택을 받아야 한다는 전제를 인정하는 일. 누군가의 마음에 들어야만 밥벌이를 하고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면, 내가 내 주인이 되기 쉽지 않다. 지금, 한국에서 취업 준비는 제삼자에게 주권을 넘겨주는 과정이다. 취업 준비생들의 몸과 마음은 프로그래밍 된다. ‘나를 선택해 주세요. 나, 잘해요.’  


자존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이 시스템을 모르면, 취업 준비는 쉬워 보인다. 한 몇 년 ‘나 죽었소.’ 낯선 사람들이랑 옹기종기 모여 앉아 스터디하고 예쁘게 증명사진 찍고 몇 번 서류 탈락하고 면접 탈락하다가 썩 내키지 않는 어딘가에 취직하면 될 일 아닌가. 아, 여자는 스물다섯 살 넘으면 신입으로 취직하기 어렵다니까, 4년 내내 휴학 없이 다니다 마지막 학기에 착- 붙으면 된다. 간단하다. 그런데 이게 사는 걸까? 난 취업 준비 같은 거 안 하겠다. 야, 니들도 그런 거 하지 마.  
“사람이 어떻게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아.”라는 말을 친구 중에 철 좀 들었다는 애한테 들어 본 적 있다. 어땠냐면, 웃겼다. 그러다 무서워졌다. 저 말은 사람을 노예로 만든다. 권리를 주장할 수 없게 만들고, 자존감을 후려친다. 다들 영혼의 생명력을 죽이면서 사니까, ‘매력 없는’ 인간이나 된다.   
친구야, 사람이 어떻게 하기 싫은 걸 하고 사니.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아도 살 수 있는 세상이 맞는 거지. 이건 순진한 소리가 아니다. 순진한 소리라고 치부하는 사람들이 모여 이 사회를 굴리고 있을 뿐이다.  

 


서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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