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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06호] 단장한 새 얼굴의 고향 마을 덕명동_대전여지도
겨울 같지 않은 겨울이 며칠째 이어졌다. 귀를 에일 듯한 매서운 바람은 언제부턴가 자취를 감추고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바람이 불었지만, 해가 높이 뜬 오후면 어김없이 푹했다. 덕명동으로 향한 날은, 진짜 겨울의 얼굴이 빼꼼 하고 얼굴을 내밀었다. 노은터널쯤에서부터 일자로 이어지는 동서대로를 건너 덕명동으로 향했다. 오랜만의 추위 때문인지, 거리에는 사람 대신 다른 것들이 동네의 얼굴을 했다. 저 멀리로 계룡산의 줄기인 도덕봉, 옥녀봉이 넉넉한 품을 펼쳤고 동네는 그 앞으로 형성됐다. 산과 가까운 쪽에는 전원주택 모양새로 지은 집들이 자리했고 동서대로쪽으로 나오며 상가 건물이 놓였다. 대로 쪽에서 산 쪽으로 향하는 길, 말소리 대신 새소리가 조용하고 평화로운 아침을 깨운다.
마을의 초입이라는 느낌이 드는 곳, 도덕봉, 옥녀봉을 바라보고 서서 왼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수통골이 있다. 마을 사람들이 이곳을 부르는 이름도 수통골 혹은 화산이다. 법정동으로는 덕명동이다.
드문드문 밭이 있고, 1층에는 상점이 자리 잡은 건물 몇 채가 눈에 띈다. 종종 ‘원룸 임대’라는 알림이 보인다. 까치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니, 까치 한 마리가 수확하지 않은 배추가 얼어 있는 밭을 율동감 넘치는 움직임으로 지난다. 가까이 다가가자 푸드덕, 몇 번의 날갯짓으로 밭 가장자리를 두른 펜스 위에 잠시 올랐다가 자리를 옮긴다.
폭신한 흙바닥을 밟으며 걷자 얼마 지나지 않아 아스팔트 길이 이어진다. 그 길을 따라 좌우로, 전원주택들이 펼쳐졌다. 좁게나마 잔디가 깔린 마당 혹은 정원이 있고 마치 빨간 머리 앤이 얼굴을 내밀고 손을 흔들 것 같은 2층 다락방이,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각각 다른 모습의 주택에 눈길을 두고 걷다 보니, 제법 오랜 시간, 사람을 마주치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도 잠시, 곧이어 경비업체 제복을 입은 직원이 주차해 둔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이 보인다. 그러고 보니 집집마다 그 경비업체의 상징 같은 파란 패널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좀 더 넓은 길로 들어서니, 작은 소나무 묘목을 재배하는 밭도 보이고 수확을 마치고 잠시 휴식기에 들어간 배밭도 보인다. 멋들어진 주택 사이로 카페와 식당도 자리했다. 시선을 좀 더 멀리 두니 녹색 그물의 골프연습장도 보인다.
잠시 서 동네를 훑어보고 있다, 올해 예순여덟이 된 이영호 씨를 만났다. 이곳에서 산 시간도, 나이와 같다. 올해로 68년째, 이곳에 발 디디고 살고 있다. 이영호 씨는, 이곳이 지금이야 잘사는 동네가 됐지만, 옛날엔 어렵기 그지없는 곳이었다고 회상한다. 1996년, 근처에 한밭대학교가 이전해 오기 시작하고, 이곳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논과 밭이었던 자리에 건물이 들어섰다. 그리고 이곳에서 농사짓고 살던 사람들이 마을을 떠나기 시작했다.
“저 한밭대학교 근처가 개발되기 전에는 이곳에 방이 없어서 학생들이 못 왔어요. 그때 우리도 방을 여섯 칸 놨었지. 그때가 좋은 시절이었죠. 그전에는 너무 어려웠어요. 지금이야 부촌이 됐죠. 옛 동네 사람들은 지금 3분의 1이나 남았을까. 땅값이 평당 20만 원이었다 30만 원 되고, 50만 원 되고, 80만 원도 됐어요. 그때 사람들이 많이 나갔죠. 여기 집들은 거의 시내 사람들이 와서 지은 거예요.”
충남 대덕군 유성면 소재 수통골이 유성읍이 되고 대전시에 편입되는 동안 이곳 마을과 주변의 모습도 많이 변했다. 1970년대에 유성컨트리클럽이 생겼고 근처 갑동에 1970년대 말 공사에 착수한 국립대전현충원은 1985년 준공했다. 그리고 한밭대학교가 이전했고 그 앞을 잇는 동서대로가 생겼다. 모습은 많이 변했지만, 이영호 씨에게 이곳은 여전히 정든 고향이다.
“나감 뭐혀. 배운 게 없는데. 농사 유지하는 게 나가는 거보단 낫지. 옥녀봉, 도덕봉 있지, 빈계산 있지. 얼마나 좋아요. 고향 지킨 사람들이랑 말동무 하는 것도 좋고요.”
이영호 씨는, 자신과 함께 오랜 시간 이곳에 머문 사람들을 ‘고향을 지킨 사람들’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이어서, 고향을 지킨 사람들과 고향은 아니지만 인생의 마지막 시기를 이곳에서 보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음력 1월 7일이면 모여 옥녀봉 아래 큰 소나무에 산제를 지낸다고 말한다.
이영호 씨와 헤어지고 그의 말에 따라 화산 노인정으로 향했다. 마을의 한쪽 끝으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그 길을 따라 높다란 펜스가 둘러져 있다. 그 안으로 펜스보다 몇 배는 키가 큰 나무들이 섰다. 펜스 너머는 유성 컨트리클럽이다.
노인정에서 만난 할머니는 시내 쪽에서 수통골로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이른 아침이라 아무도 나오지 않은 노인정 바닥에 혼자 누워서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아들이 여기 오면 건강해진다고 해서 그냥 왔어. 산 있고 공기 좋으면 뭐혀. 친구가 많아야지. 여기 할머니들도 별로 없어. 다 젊은 사람들여. 노인들은 배나무 팔아서 다 이사갔댜. 요 근처 노인네들 아프면 가는 디 요양원인가, 거기에는 노인네들 많겄지. 시방은 젊은 사람들이 오줌똥 안 받아 내려고 거기다 보내. 몰라 나는, 죽으면 죽고 말면 말지 뭐. 명 짧으면 죽는 거고. 안 그러면 길게 사는 거지.”
자식들을 여우 살이 시키기도 전에 남편을 잃었다고, 할머니는 힘들었던 지난 세월을 펼쳐 놓았다. “힘들어서 죽을 뻔했어.”라는 말로도 전부 치환될 수 없는 시간이다. 그 시간이 조금이나마 위로 될까 싶어 아들은, 공기 좋은 이곳으로 할머니와 함께 이사했다. 아직 적응이 안 된 탓인지, 할머니는 옛 동네가 그립기만 하다. 산에 오를 수도 없고 특별히 할 일도 없어 노인회관에 나와도 사람이 없다. 오후에 사람들이 모여 회의를 하기로 했는데 할머니는 아침부터 나와, 누가 안 오나 기다리던 참이었다.
점심 때가 지나고 노인정에 마을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귤과 빵, 간단한 다과 준비는 막내 격인 장남우 씨가 맡았다. 마을 이야기를 시작하자, 어김없이 한 할머니가 “옛날 동네 사람들 다 나갔어.”라고 운을 뗀다. “좋은 사람들 다 나갔어.”라는 말에 “그런 얘길 뭣 하러 햐. 오해하기 딱 좋은 말이지.”, “좋은 사람 나쁜 사람 따로 있어?” 하는 투닥거림이 이어진다. 그도 그럴 것이, 한밭대학교가 들어서며 처음 수통골에 온 교수가 이곳에 산 지도 20년이 넘었다고 했다. 이제는 원주민과 시내 사람이라는 구분도 무색해지고 있었다.
자리에 모인 사람들도 짧게는 1년, 16년, 길게는 60년 가까이 수통골에서 살았다. 채승자 할머니는 올해 일흔아홉으로, 스무 살에 이곳으로 시집와서 마을의 변화를 지켜봤다.
“가난하다고 가느작골이라고 불렀어. 그땐 말도 못하게 가난했지. 박정희 대통령 이후부터 전기도 들어오고 수도도 설치하고 한 거지. 예전에는 수통골에 도랑도 없었어. 박정희 대통령이 개천 만든 거야.”
채승자 할머니가 이야기하자, 장남우 씨가 예전엔 그랬었냐며 말을 잇는다.
“수통골 좋은 게 미국에까지 소문이 났더라고. 미국 박사님이, 대전에서 왔다고 하니까 수통골 이야기를 딱 하더라니까. 수통골에 동그랗게 물 해 논 데는 여자의 자궁이고, 수통골 이름에 ‘수’ 자가 있으니까 남자의 기운을 받아서 돌이 다 서 있대요. 등산 많이 하는 사람들도 다른 데 등산하면 몸이 아픈데, 수통골은 아픈 게 없다는 거야. 남녀의 기운을 받는다고 아주 소문났어. 명당이라고 사람들이 많이 와요.”
모인 이들은 한참을, 이곳이 살기 좋은 곳이라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대전에서 이만큼 살기 좋은 곳이 없다고 말이다. 그리고 ‘살기 좋다’는 이야기에는 ‘지금은’이라는 단서가 꼭 달렸다.
수통골의 큰 굴과 작은 굴에, 6·25 전쟁 당시 피난민들이 내려왔다는 이야기, 그들에게서 나쁜 병이 옮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 같은 것들은 이제는 여느 설화처럼, 감정 없이 말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유성 컨트리클럽 얘기는 다르다. 채승자 할머니가 대화를 이었다.
“예전에 임업시험장 있던 곳에 유성 컨트리클럽이 들어왔지. 마을 사람들이 반대는 안 했어. 마을 안쪽에 생기는 게 아니니까. 근데 코스 만드느라 산 중턱을 깎은 그해 3년 두고 열일곱 분이 돌아가셨어. 명산을 깎으니 중치들이 많이 돌아가셨지.”
마을에 없던 것들이 생기고 있던 사람들이 떠나가는 동안, 자리를 지켰던 사람들은 종종 마을 사람이 모두 있던 옛 마을을 그리워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리움은, 삶의 대근함 앞에서 맥을 못 추고 만다.
“너무 힘들 게 살았는데 옛 생각 하겠어? 먹고살기 대간했지. 지금은 개발이 돼서 돈 많은 엄마, 아빠, 의사, 박사들이 많이 와. 세월이 바뀌어서 더 좋은 동네가 됐지. 이제 바라는 건 먹고 노는 거밖에 더 있겠어? 노인회관 지원이나 더 많이 받았으면 좋겠어.”
채승자 할머니가 지금 더 바라는 건 없다며 이야기한다. 다른 할머니들도 얘기를 돕는다. 산 좋고 공기 좋고, 교통 좋고, 부촌도 됐겠다, 더 바랄 게 없다고. 그러다, 누군가 불쑥 쓸쓸한 한마디를 던진다.
“지금은 삭막한 건 있지. 예전에는 10리, 20리 밖에 사람들 이름까지 다 알았는데, 지금은 모르잖아.”
그러다가도, “그건 지금 어디나 다 그런 거고.”라고 누군가 거든다. 흘러간 시간에 비해 다가올 시간은, 편하지만 재미는 덜하고, 깔끔한데 삭막한 무언가일 것이다.
귤을 건네는 할머니의 손은 투박했다. 핏줄이 볼록하니 드러나고 잡아 보지 않아도 거칠었다. 그런데 귤을 까 놓은 모양새는 그야말로 고왔다. 먹으라고 건네는 귤 알맹이가 찬데도 따뜻했다. 그런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