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06호] 레버넌트

이냐리투 감독_Photographed by Antonio Olmos for the Observer
# Intro
“단지 복수나 하려고 이렇게 돌아온 거야? 그럼 맘껏 즐겨, 글래스.
#1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은 중요한 사람이다. 대중에게 알려진 영화로는 숀 펜이 출연한 <21그램>과 마이클 키튼이 출연한 <버드맨>을 꼽을 수 있을 것 같고, 조금 더 찾아본 관객은 <비우티풀>과 <바벨>도 접했으리라 생각한다. 누군가 물어 좋아하는 감독의 이름 속엔 항상 그가 등장했지만, 사실 내가 그와 그의 작품을 제대로 이해해서는 아니었다. 내내, 정확히 안다고 말하기 어려운 모호한 느낌이 있었다. 가족이라는 테마 위에 수놓아진 화려한 카메라 워킹, 다국적 인물들이 처한 현실적이고 즉물적인 상황, 동서양의 정서가 뒤섞이며 전달되는 세계적인 느낌은 어렵지 않게 전달된다. 내 의문은 영화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굳이 왜 이 이야기를 선택했을까, 왜 이렇게 바라봤을까, 왜 이렇게 찍었을까 하는, 감독에 대한 의문이었다. 그가 영화로 포괄되는 모든 것과 자신을 어떻게 관계 맺음하고 있는지 단서가 필요했다. 그리고 <레버넌트>를 보고는 혹시 이 영화에 그 단서가 있진 않을지, 그의 전작들을 모두 떠올리며 서성이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이번 영화는 나에게 조금 다른 의미가 있다. 안갯속을 더듬어 나가다, 읽는 이를 염두 하지 못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 촘촘히 풀어 보겠다. 다만, 이번 글에서 다룰 <바벨>과 <비우티풀>, 그리고 <버드맨>을 시간이 가능할 때 보길 권한다.

#2

매직 아워(Magic Hour, 여명이나 황혼의 시간대) 활용의 교과서가 된 1978년 작 <천국의 나날들>이라는 영화가 있다. 이 작품으로 처음 칸에서 감독상을 받은 테렌스 멜릭 감독은, 브래드 피트가 주연한 <트리 오브 라이프>로 32년 만에 다시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받는다. 그의 작품은, 가족과 종교, 우주와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 등 거대한 이야기를 화려한 카메라 움직임에 담고 있다. 조금 시적으로 표현해 보면, 인간계에 사는 사람들 사이를 천상계에 사는 누군가가 잠시 방문해 훑고 지나간 느낌이 든다. 그리고 다음 해 <투 더 원더>라는 종교와 사랑을 테마로 한 작품을 발표했는데, 조금 희한한 상황이 발생했다. 칸이 손을 들어 준 <트리 오브 라이프>와 내용은 다르지만, 별반 다를 게 없이 표현된 이 영화가, 보는 내내 불편하고 식상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관객은, 멜릭 감독의 시선이 자신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 명백히 무관한 어떤 것이라는 판결을 내린 것 같았다. 잠시 주변에 머물던 천상계의 누군가가, 그러니까 이 영화가 흉내 냈던 신격화 된 무엇이, 사실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혐의가 멜릭 감독의 머리 위에 떨어진 것이다. 영화 속 인물과 상황, 그것을 표현하는 영화라는 매체, 표현하는 주체로서의 감독이라는 삼각형의 맨 꼭대기에, 감독 스스로를 올려놓은 것 같았다. 어쩌면 멜릭 감독은 자신의 영화에 만족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관객이 아닌 자신만 느끼면 족할 만족감이라도 괜찮다면 말이다. 그래서 또 한 번 신의 위상에 자신의 욕망을 거치시켜 만든 <투 더 원더>에서 그가 쓴 엉성한 탈이 벗겨지는 순간, 스크린을 우러러보던 어둠 속 평민들은 맥이 빠져 버렸던 것이다. 왜 멜릭 감독의 이야기를 하느냐면, 이 지점에서 이냐리투 감독은 조금은 더 영리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레버넌트>의 카메라 워킹, 즉 인물과 공간 그리고 상황을 보여 주는 물리적 시선은 멜릭의 영화들만큼이나 수려하다. 하지만 영화와 관객 사이에서 감독이 자신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가 다르다고 느껴졌다. 그리고 니체의 저서에 등장하는 위버멘쉬가 떠올랐다.

* 위버멘쉬 프리드리히 니체《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 2부 <행복의 섬에서> 中 좀 더 강한 종류의 인간, ‘극복인(김정현 교수 의역)’, 이하 ‘초인’

#3

작은 진드기조차 현미경으로 보면 하나의 세계다. 발이 달려 이불을 움켜쥐고 걸어 다니는 것은, 이미 진드기와 그것이 살고 있는 표피 밖 세상 사이에 관계가 성립되고 있는 것이다. 생명체는 아니지만, 영화 역시 운동성을 가진 하나의 세계이며 감독은 영화 속 세계와 현실 세계를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는 자다. 그는 본래 현실 속에 있는 것들을 재구성해 창작하는 사람이기에, 자신이 세상에 없는 것을 창조한다고 착각하는 것은 위험하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인간을 짐승과 위버멘쉬 사이를 잇는, 심연 위에 걸쳐진 하나의 밧줄 같은 존재라고 이야기했다. 영화로 예를 들면 이해가 편하겠다. 이냐리투 감독의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도덕이나 양심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돈 때문에 배신하고, 타인의 명성을 질투하며, 부모가 없는 결핍에 괴로워하고, 세상 끝까지 따라가 복수한다. 인간의 본질을 그대로 보여 주면서도, 그 인물들을 표현함에 있어 감독의 시선은 어딘가 조금 다르다. <비우티풀>에서 하비에르 바르뎀이 연기한 욱스발의 눈에는 죽은 자의 영혼이 보인다. 그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외려 그 능력으로 돈을 벌기도 한다. 결국 병들어 천장 모서리에 붙어 있는 자신의 영혼을 느낀 후 딸의 옆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이 세상이 아닌 어느 곳에서 내내 그리워하던 아버지를 만난다. 과연 욱스발은 어떤 존재일까. 총이라는 파괴의 상징물로 네 개의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바벨>에서 놀라웠던 부분은 마지막 테라스 장면이었다. 결핍으로 가득 차 나체로 울며 서 있는 딸과, 아마도 처음 그녀를 안아 주는 것 같은 아버지를 잠시 바라보던 카메라가, 그들의 어깨 위 비슷한 높이에서 빌딩 밖으로 떠가며 멀어진다. 마치 두 사람을 연민하며, 영화 속에서 해야 할 일을 다 한 누군가가 천천히 이 세계를 떠나는 느낌이었다. 그건 누구의 시선일까. <레버넌트>에서 톰 하디가 연기한 피츠제럴드는 자신을 죽이러 4천km를 쫓아온 휴 글래스에게, 복수나 하려고 먼 길을 돌아온 거면 맘껏 즐기라고 조롱한다. 상황상 저 대사는 곧 죽임을 당할 사람이 하는 말이 아니다. 나는 감독이 휴 글래스를 한 인간에서 또 다른 무엇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피츠제럴드라는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인간을 반대편에 도사리게 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영화 초반부터 ‘나에겐 삶이라는 건 없다’며 거짓도 살인도 서슴지 않다가, 마지막 순간에 휴 글래스를 조롱하며 각성시킨다. 인간 이상의 무엇인 양 먼 길을 걸어왔으면서, 인간처럼 그저 복수나 하고 말겠냐는 질문을, 피츠제럴드의 입을 통해 감독이 던진 것이다. 그렇다면 휴 글래스는 결국 어떤 존재인가. 나는 그들이 짐승의 위상인지, 인간의 위상인지, 혹은 극복하려는 자의 위상인지, 아니면 신의 위상인지가 궁금해졌다. 또한 현실적인 톤에 어딘가 낯설고 비현실적인 인물을 어색하지 않게 그리기 위해, 감독 자신은 밧줄 어느 부분에 스스로를 위치시켰는지도 말이다. 나는 이 지점에, 그간 모호하기만 했던 이냐리투 감독에 대한 단서가 있다고 생각됐다.

#4

<버드맨>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퇴물이 된 배우로 등장하는 마이클 키튼은 모두가 그의 욕망을 무가치하다 말해도, 허무한 자신의 삶을 끝까지 붙들고 밀어 올린다. 마치 날개 달린 시지프스 같기도 하다. 그런데 감독은 마침내 자신이 하늘 위로 날려 보낸 그에게 카메라를 비추지 않는다. 그가 날아가 신이 되었든 다른 무엇이 되었든, 이미 극복한 인간을 비추는 것은 불필요하거나 일종의 거짓이라고 여기는 듯하다. 그의 인물들이 일반적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육체를 벗어나 신이 되려고 하는 자들은 아니다. 마치 <레버넌트>에서 끝내 살아남은 휴 글래스가, 죽은 아내의 망령을 마주하지만 따를 수 없어 괴로워하다가, 이제 자신이 무엇인지 묻는 듯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처럼 말이다. 그의 영화에 나오는 주요 인물은 현실을 극복하려는 인간이다. 그들에겐 지켜야 할 가족이 있고, 순전히 인간적인 욕망이 있다. 이냐리투 감독은 추구하며 살아가려는 인간의 의지를, 무엇과 견주어 바꿀 수 없을 만큼 소중하고 애잔한 가치로 표현한다. 또한 그들을 바라보기에 적합한 시선이 필요하다고 여기고, 자신을 신의 영역도 사람의 영역도 아닌, 처연한 인물의 어깨 위 어디쯤에 위치시킨다. 스스로 무언가를 초월한 위치라는 자의식이 없기에, 그가 그린 일반적이지 않은 인물들이 현실적인 톤에 어색하지 않게 자리 잡을 수 있고, 관객 역시 그 인물을 낯설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결국 <바벨>에서 꼭 끌어안은 딸과 아버지의 곁에 머물렀다가 서서히 떠나가는 카메라는, 감독 자신인 것이다. 반면 <투 더 원더>의 테렌스 멜릭 감독은 고통에 찬 인간들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한 것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자, 그럼 이제 내가 너희들의 신이 되면 되는 것인가?’

#5

그는 때로 계급과 폭력, 불평등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사회의 가장 작은 단위인 가족을 놓치지 않는다. 그중 누군가의 남편 혹은 아버지를, 현실을 극복하려 애쓰는 유약한 인간의 표상으로 선택한 것 같다. <바벨>에서는 총 맞은 아내를 들고 뛰는 브래드 피트, 자식이 쏜 총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아버지, 엄마를 잃은 딸을 보듬는 아버지를 등장시켰고, <비우티풀>에서는 가족을 흩어지지 않게 애쓰다 병으로 죽고는, 다른 세계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만나 처음으로 웃는 욱스발을 보여 줬다. <버드맨>에서 퇴물이 된 아버지를 안쓰러워하던 딸에게, 병실 창문으로 사라진 자신이 하늘로 날아가는 것을 지켜보게 했으며, <레버넌트>에서는 아들의 복수를 위해 사지에서 살아 돌아온 괴물 같은 아버지를 그려 냈다. 이냐리투 감독이 그린 아버지들은 각자의 그곳에서 고통받다가, 영문도 모른 채 생의 과정에서 이탈하고, 기어이 바스러진다. 그들이 어딘가에서 더 나은 삶을 찾아 헤맨 흔적 같은 것은 없다. 감독은 내내 마음이 쓰이는지 그들 근처를 어슬렁거린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나는 이것이 이냐리투 감독이 영화와 맺은 관계라고 느껴졌다. 그는 자신이 영화 속에서 그린 인물에 대하여, 아버지와 같은 눈짓과 몸짓으로 주변을 맴돌며 걱정하고 응원하는 것 같다. 기댈 수 없는 신이나 세상에 없는 초인 같은 것 말고, 그저 우리가 애쓰며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는 사람 정도로 족하다는 듯 말이다.

#FIN

가끔 회자되는 문장이 있는데, 영화를 사랑하는 세 가지 방법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를 사랑하는 첫 번째 방법은 영화를 두 번 보는 것이고, 그다음은 영화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이고, 마지막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프랑수아 트뤼포라는 감독의 말이다. 나는 이번 호에서 이냐리투 감독의 영화에 대해 글을 쓰는 기쁨을 충분히 누렸지만, 혹시 이 글로 인해 독자들에게 ‘두 번 본 영화’가 하나 더 생긴다면 더욱 기쁜 일일 것 같다. 다음 화에서는 내가 디카프리오를 얼마나 열렬히 사랑하는지 적어 보려 한다. 21세기 어떤 피사체도 범접할 수 없는 20세기 레오라는 미소년의 모습을 지면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글  이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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