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가 없었다. 휴대폰도 없었다. 누군가를 만나려면 수첩을 꺼내 공중 전화기에 동전을 넣고 불러내거나 집에 찾아가야 했다. 1980년대 대전역 광장에서 바라보면 왼쪽에 하늘색 공중전화가 열 대쯤 놓여 있었고, 부스마다 길게 줄을 선 모습은 흔한 풍경이었다. 어느 역이나 터미널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개인전화가 없었던 시절이니 만큼 친구와 통화를 하려면 가족한테 바꿔달라며 이쪽의 신원을 밝히곤 했다. 주머니를 뒤져 동전이 없으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전화비 20원을 구걸하기도 했다. 전화를 걸다 동전이 남으면 수화기를 올려 놓고 누군가 필요한 이들이 쓰도록 배려하기도 했다. 때로는 휴가 나온 군인이 애인한테 전화를 거는 과정에서 상대쪽에서 남자 목소리라 바꿔주지 않을 경우에는 지나가는 여성에게 대신 전화 부탁을 하기도 했다. 지나가던 여성들도 익숙하게 연기를 해주었다.
당시 중심가였던 대전역에서 지금의 옛 충남도청으로 이어지던 길가에는 그 시대를 대표하는 장소들이 있었다. 대전역 맞은 편에는 에펠제과, 지금의 성심당 자리보다 더 길가에 있던 성심당과 그 맞은 편의 봉봉제과 그리고 델리제과 같은 제과점들은 당시 고교생들의 미팅 장소이기도 했고 배고플 때 싸고 큼직한 맘모스 빵을 뜯어 먹으며, 입시 공부의 괴로움에서 잠시 벗어나게 해 주던 해방공간 같은 곳이기도 했다.
당시 중심가였던 대전역에서 지금의 옛 충남도청으로 이어지던 길가에는 그 시대를 대표하는 장소들이 있었다. 대전역 맞은 편에는 에펠제과, 지금의 성심당 자리보다 더 길가에 있던 성심당과 그 맞은 편의 봉봉제과 그리고 델리제과 같은 제과점들은 당시 고교생들의 미팅 장소이기도 했고 배고플 때 싸고 큼직한 맘모스 빵을 뜯어 먹으며, 입시 공부의 괴로움에서 잠시 벗어나게 해 주던 해방공간 같은 곳이기도 했다.
또한 숱한 옷가게와 보석 가게, 소극장과 음악감상실, 식당, 우산가게, 맞춤 양복점까지 품고 있던 홍명상가와 그 맞은 편의 중앙데파트는 대전천 위에 우뚝 세워져 그 시대 쇼핑의 중심가 역할을 해 주었다. <나바론2>라는 영화를 마지막 상영하고 헐렸던 시민관 자리에 1980년 동양백화점이 생기기 전까지, 대전의 쇼핑 중심가 역할을 했던 곳이 바로 거기였다. 그 뒤로도 한동안 홍명상가와 중앙데파트는 배고플 때, 영화보고 싶을 때, 누굴 만날 때, 찾아가던 공간이었다.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결코 순진할 리가 없었을 순진 전당포도 생각나고, 연극을 종종 무대에 올리던 떼아뜨르, 웬만한 영화는 다 그곳을 거쳐 갔던 , 인기 좋은 영화는 서서도 많이 봤던 대전극장과 그 옆에 있던 서라벌 극장, 중앙 시장 옆에 있던, 가끔은 쥐도 나왔던 중앙극장 그리고 한밭식당, 이모 쫄면, 기신양복점, 사리원면옥 그리고 가벼운 주머니로도 막걸리를 마시기 좋던 대중집과 서라벌 같은 술집도 생각난다. 광천식당, 청양식당 같은 곳에서는 동아리 모임도 많이 했다. 두부 두루치기, 칼국수를 맛으로 먹었다기보다는 주머니 사정에 맞춰 먹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이폰으로 커피를 내려주던 커피숍들도 시나브로 떠오른다. 그때는 교회 건물을 개조해서 천정이 높던 브라암스, 대흥동성당 옆에 있던 산에 언덕에, 마음의 고향, 1988년에 대전경찰서 옆에 문을 연 전람회, 대전천 옆 신발을 벗고 들어가던 뮤즈, 지하에 있던 사계, 2층에 있던 검은 돛배, 1층에 있던 나룻배와 행인, 그런 커피숍의 문을 밀면 향긋한 커피향이 퍼져나오는 낭만 그 자체로 좋았다. 음악을 듣기 어려웠던 시절에 음악도 듣고 커피를 마셨다. 그곳은 추울 때 따뜻했고 더울 때 시원해 좋았다.
음악은 버스를 타려고 버스 정류장에 서 있을 때도 들을 수 있었다. 이문세, 변진섭, 민해경, 김광석, 김종찬, 들국화, 수와진 등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공짜로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당시에는 거의 대부분 LP 음반이었고, 음반을 선물받으면 판이 닳도록 듣기도 했다. 음반이 있는 곡 중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들만 모아 카세트 테잎에 담아서 선물 하는 것도 유행이었다. 드라마 응팔의 정봉이가 여자친구에게 카세트 테잎을 선물했던 것은 당시의 지극한 정성으로 기억된다. 직접 녹음하지 않아도 곡목을 적어 주면, 레코드점에서 녹음해서 파는 서비스를 하기도 했다. 오디오가 좀 더 많이 보급되고 스테레오 카세트 녹음기가 늘어나면서 각자 직접 녹음을 해서 선물을 하곤 했는데, 방송국에는 “녹음하게 몇 시 몇 분에 무슨 곡을 들려주세요” 하는 엽서도 많이 왔다. 저작권이 중요하지 않을 때라 방송국에서도 그냥 들려주었다.
그다지 멋진 곳도 없고, 변변한 공원도 없어서 시간이 남아 돌아 심심했던 청춘들은 지하상가와 대전에 하나 뿐이었던 백화점과 남루한 식당들과 학사주점과 꽃집과 카페를 쏘다녔다. 걷다 보면 군고구마와 군밤을 팔고 카바이트 불을 켜놓은 채 귤과 땅콩과자와 오방떡을 팔았던 은행동과 대흥동 그리고 선화동. 그래도 그 거리에 나가면 아는 얼굴들을 몇 미터 간격으로 마주쳤다. 동시대를 살아가던 친구, 선배, 동창, 그냥 어쩌다 아는 얼굴도 많았다. 마주치면 멀뚱하니 보고 지나치거나 미소를 짓거나 “어?” 하며 스쳐갔다.
그 거리를 걷던 시절, 서글프고 주머니는 비어 있고, 앞날이 캄캄하고 막막했다. 사는 게 무척이나 괴로움이었다. 훈훈한 추억 속에 등장하는 드라마처럼 골목을 마주한 집들이 서로 돕고. 서로의 숟가락 숫자까지 세며, 니꺼 내꺼 없이 살지는 않았다. 그때도 많은 사람이 자기 살기 바빴다. 속이기도 하고 뺐기도 하고 배신하기도 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좋았던 것을 많이 기억한다. 그래서 옛날이 더 좋았다고 애써 기억을 편집한다.
그 시대의 거리에서 사라진 것들을 생각한다. 사라진 건 이유가 있었을 것이고 남은 것도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한 번 사라지면 다시 데려올 수 없는 소중하고 안타까운 것들을 지켜내는 것이고, 사라져 마땅한 것들은 미련없이 떠나보내는 일일 것이다. 추억이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것만을 기억하려는 또 다른 욕망이 아닐까. 응답하라는 외침에 응답하지 않는 것들이 무엇이 있을까 돌아보는, 응팔의 여운이 진한 2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