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06호]시간의 그늘 아래서 책을 읽다

기사 제목

카페에서 누군가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문득 지나간 세월을 떠올렸다. 불현듯 내가 소설가로 등단한 이후에 흘러간 세월들이 주마등처럼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갔던 것이다. 갑자기 마음이 아득해져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내 시선은 흐려졌고, 그 흐린 시선 너머로 어떤 순간의 이미지들이 두서없이, 빠른 속도로 흘러갔다. 그 몇 개의 장면 사이에는, 먹빛의 텅 빈 여백이 가득했고, 이윽고 그것은 거대한 바위 덩어리 같은 것이 되어 나를 뒤덮어버리는 듯 했다.  
나도 모르게 탄식이 터져 나왔고,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그렇구나….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탁한 목소리가 내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고개를 떨어뜨린 채, 천천히, 한 해, 두 해, 나를 휘감았다 흘러 사라져간 시간들을 헤아려 보았다. 

 

그때는 저기에 있었고, 지금은 여기에 있다. 그때와 지금 사이, 저기와 여기 사이에서, 나는 그때와는 많이 달라진 모습으로, 그러나 동시에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상태로 머무르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세월이, 시간이 흐른 것이 아니라, 결국 내 정신과 행위의 총체가 축적되거나 사라져 버린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시간과 낡아진 육체를 제외한다면, 딱히 절망적인 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잃어버린 것들이 있다면, 반대로 내 삶의 일부가 된 것들도 있다. 두려움과 절박함, 열정과 호기심, 부단한 노력 같은, 다시 되찾아야할 것들의 목록들도 있을 터이다. 육체의 시간은 되돌릴 수 없으나, 영혼의 시간은 거부하는 가운데 그 생생함과 격렬함을 되찾을 순 있을지도 모른다.  생의 출발선을 다시 긋기, 부재와 결핍의 충만함을 정신의 연금술로 결박하기, 어두운 숲길에 다시 길 내기. 결국은 그리로, 그리로 갈 수밖에.     

 

 

내가 아직 시간 속에서 보지 못한 것들, 보지 않은 것들은 무엇일까. ​

 

 

시간은 직선으로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 마치 봄바람에 여기저기 허공을 떠도는 민들레 홀씨처럼 우리 존재 속에서 방황한다. 다시 말해, 방황하며 떠도는 우리 존재 자체가 바로 시간이다. 
고양이는 늘 내가 잠들려고 하는 깊은 밤시간에, 한껏 기지개를 켜고는 현관문을 열고, 그리고 밤의 어둠속으로 달려간다. 
고양이의 시간 궤적은 나의 그것과는 너무나 다르다. 고양이의 눈 속을 빤히 들여다볼 때, 불현듯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의 심연이 느껴질 때가 있다. 마치 태양빛처럼, 삶이 드리우는 그림자들이 있다. 빛이 그늘을 만들어 내듯이 삶이 만들어 내는 그늘이 있다. 어떤 삶도 그림자를, 그늘을 없앨 순 없다. 그러나 그것들이 마음에 주는 고통이 너무 크기에, 그늘 없는 존재를 갈망하고 상상하여 그럴듯한 이미지를 만들어 내곤 했다. 어쩌면 우리는 그늘을, 마치 타는 듯이 이글대는 8월의 태양을 피해 그늘 속에서 놀 듯이, 그늘마저 사랑하는 법을 먼저 배웠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수록 조금씩 뚜렷해지는 얼굴의 그늘마저도. 

 

 

깊은 밤, 나는 조용히 홀로 책상에 앉아 다시 책을 읽는다. 밤은 시간의 그늘이다. 태양빛이 환한 대낮엔 우리는 그 밝은 빛 아래서 업무들, 사람들, 사물들 틈에서 마치 넋을 잃은 사람처럼 오고 간다. 그러나 시간이 길게 그늘을 드리우는 밤이 되면, 우리는 다시 혼자가 되고, 그 혼자만의 시간에 책을 읽거나 사색에 잠긴다. 
밤, 시간의 그늘은 우리에게 고독을 선사하고 우리는 그 고독 속에서 비로소 자기자신으로 돌아와 자신의 내면과 만난다. 내가 나 자신과 대화를 나눈다. 혹은 한 권의 책 속으로 들어가 타인의 얼굴을 한 나 자신과 만난다. 분주한 날들 사이에서 그동안 내게 부족했던 것은 바로 그런 시간들이었다. 
나는 버지니아 울프가 쓴 아름다운 소설, 《등대로》 라는 소설 속 램지 부인을 떠올린다. 그녀는 지금 가족들, 손님들과 함께 영국 북구 스카이 섬의 핀레이 별장에 와 있다. 남편 램지와 여덟 명의 아들딸, 여러 명의 손님과 하인하녀들까지 합쳐 스무 명 가까운 사람이 그 별장에 머물고 있다. 


내일은 바다 건너 등대로 가기로 했고, 누군가에게 줄 뜨개질을 해야 하고, 오늘 저녁 만찬을 준비해야 하고, 여섯 살 짜리 아이를 위해 책을 읽어 주어야 하고, 남편과 손님들, 하인들이 끊임없이 드나들며 그녀에게 무언가를 묻고, 부탁하고, 의지한다.  남편은 내일 등대에 갈 수 있을지, 자신의 업적에 대한 고민, 실패한 것 같은 자신의 인생에 대해 끊임없는 자기 연민에 빠져 아내에게 동정과 위안, 공감을 끌어내려 하고, 그런 모든 것이 그녀의 신경을 긁어 댄다. 복잡한 인간 관계, 경험들의 소통 불가능성, 각자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는 내밀한 비밀의 벽이 사람들 사이를 갈라놓는다. 
그러나 시간은 흐른다. 시간은 흐르고 비로소 혼자가 된 순간, 그녀는 고요한 평화를, 무한한 자유를, 그리고 휴식을 얻는다. 그녀는 고독 속에서야 비로소 자기 자신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녀는 온전히 자기 자신일 수 있고, 홀로 있을 수 있었다. 이따금 필요하다고 느꼈던 건 바로 그것이었다. 생각에 잠기는 것. 글쎄, 생각에 잠기는 것도 아니었다. 말없이 있는 것. 홀로 있는 것. 모든 존재와 행위가 팽창하면서 반짝이고 시끌벅적하다가 흩어져 버린다. 그러면 사람은 엄숙함을 느끼며 오그라들어 본연의 자신이,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쐐기 모양 어둠의 응어리가 된다. 그녀는 똑바로 앉아서 계속 뜨개질을 하고 있었지만 스스로를 그렇게 느꼈다. 밀착되어 있던 것들이 떨어져 나간 이 자아는 더없이 자유롭게 기이한 모험을 떠날 수 있었다. 삶이 잠시 침잠할 때, 경험의 영역은 무한히 넓어 보였다. 그리고 누구나 이처럼 무한한 원천을 느끼는 법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나 릴리, 오거스터스 카마이클, 모두들 제각기 자신의 환영, 자신을 알아볼 수 있게 해 주는 겉모습들이 유치할 따름이라고 느끼기 마련이다. 그 환영의 밑바닥은 온통 어둡고, 사방으로 퍼져 있으며, 포착할 수 없이 깊다. 그러나 이따금씩 표면으로 솟구치는 것이 남들에게 보이는 우리의 모습이다…이 어둠의 응어리는 누구도 볼 수 없기에 어디라도 갈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걸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의기양양했다. 자유가 있고, 평화가 있었다. 무엇보다 반갑게도, 모든 것을 다 그러모아 확고한 기반 위에서 쉴 수 있었다. 경험 영역에 한정된 자신이 아니라, 어둠의 쐐기로서 휴식을 얻었다.”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쐐기 모양의 어둠의 응어리” -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모든 것들이 떨어져 나간 후에 남는 것, 시간의 그늘인 밤이 혼자가 된 우리를 자신의 독특한 힘으로 만들어 내는 결정체, 그것이 바로 어둠의 응어리일 것이다. 램지 부인은 이 어둠의 쐐기가 됨으로써 비로소 자기 자신이 된다. 램지 부인은 비록 다 함께 모이는 만찬이라는 행위를 통해 소통 불가능하고 파편화된 타인들을 유대와 조화로 묶어 내려 애쓰지만, 궁극적으로 인간은 그러한 고독 속에서만 진짜 자신을 만난다는 걸 알고 있다. 
깊은 밤, 램지 부인은 침실에서 고요히 책을 읽는다. 나는 램지 부인을, 그녀의 내면을 따라간다. 그리고 한 권의 책 속에서, 그 내밀한 목소리를 통해, 내가 아닌 누군가의 내면을 통해 나를 읽는다. 그런 게 바로 책읽기다.  

 

 

 


김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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