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창고
글 이혜정
사람은 왜, 기억이 덧난 자리를 자꾸 돌아보는지 모르겠다. ‘기억이 덧난’이라는 표현이 좀 이상하지만, 그렇게 먼저 말해 본다. 과거 속에서 평탄하던 일상은 쉽게 잊히고 돌올하게 상처가 덧난 자리만, 약간은 다른 질감으로 생생하게 떠올라 있기 마련이다.
되새김질하듯이 떠오르는 게 그런 기억들이다.
아주 오랜만에 그곳에 갔다. 10년쯤 지난 것 같다.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 시절의 나를 생각하면, 오랫동안 연락이 두절된 학창시절의 친구와 마주친 것처럼 생경하다. 그래서인가. 그곳의 풍경 역시 같지만 달랐다.
황량하게 풀만 가득하던 그곳은 잘 정비된 공원이 되었다. 물기도 예전만 못했다. 임시로 세워 둔 목조 다리가 사라지고 널찍하고 튼튼한 다리가 생겼으며 휴일을 맞아 나들이 나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주변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물길은 좁아졌다. 갯벌에 한 달 동안 물이 두 번밖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붉은 칠면초가 가득 자라난 갯벌은 갯벌이라고 부르기에는 흙이 너무 말라 있었다.
되새김질하듯이 떠오르는 게 그런 기억들이다.
아주 오랜만에 그곳에 갔다. 10년쯤 지난 것 같다.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 시절의 나를 생각하면, 오랫동안 연락이 두절된 학창시절의 친구와 마주친 것처럼 생경하다. 그래서인가. 그곳의 풍경 역시 같지만 달랐다.
황량하게 풀만 가득하던 그곳은 잘 정비된 공원이 되었다. 물기도 예전만 못했다. 임시로 세워 둔 목조 다리가 사라지고 널찍하고 튼튼한 다리가 생겼으며 휴일을 맞아 나들이 나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주변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물길은 좁아졌다. 갯벌에 한 달 동안 물이 두 번밖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붉은 칠면초가 가득 자라난 갯벌은 갯벌이라고 부르기에는 흙이 너무 말라 있었다.
그나마 예전 그대로인 건 다리 아래의 검은 갯골이었다.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검은 강줄기. 개흙 때문에 강물도 검었다. 내륙에서 자라고, 가끔 동해에나 나가 보았던 나는 서해의 갯벌들이나 서해로 흘러드는 강의 하구들이 낯설었다.
거기 갯고랑 한쪽에 갈매기가 앉아 있었다. 갈매기의 모습이 수면에 비치도록, 갈매기는 꼼짝하지 않았다. 나도 꼼짝하지 않고 그런 갈매기를 쳐다보았다. 그냥, 혼자인 게 좋았다. 인간은 결국 혼자이기 위해 같이 있구나 싶었다. 그렇게 계속 혼자이고 싶었다. 저 갈매기처럼 가만히 갯고랑에 쪼그려 앉아 있고 싶었다.
이걸 어떤 마음이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으나, 그렇게 어둡고 습한 곳에 숨어 있고 싶은 마음이 사람에게는 있는 것 같다.
연인과 가족들 사이를 지나 계속 걷다 보니 소금창고가 나왔다. 소금창고에 세콤이 설치되어 있었다. 예전에 왔을 때는 천정과 벽이 뜯긴 거의 다 무너져 가는 소금창고 안에 들어가기도 했었다. 거미줄과 풀이 침범한 그곳에는 소금 대신 빛이 가득 쌓여 있었다. 흰 빛과 흰 소금. 완전히 비어 있지만 가득하다고 여겨졌는데, 온전한 소금창고들은 죄다 문이 잠겨 있고 그 가운데 완전히 폭삭 무너져 버린 소금창고가 하나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점점 나이가 들면서 이런 식 같다. 기억의 창고는 완전히 봉쇄되거나, 철저히 붕괴되어 버리거나 둘 중 하나였다.
일상의 덧은, 발랄한 코너였는데 참으로 음울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시월에 들어 내가 느끼는 감정은 이런 것에 가깝기에 어쩔 수가 없다. 일상에 녹아들어 있는 건 기억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저마다 가슴속에 꽁꽁 묶어 둔 시간의 창고를 하나씩 두고, 모른 척 길을 건넌다. 저기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사람이 예전의 누구를 닮았다고 해도 눈을 질끈 감고 지나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더 이상 갯골에는 물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운명이나 선택에 관한 짧은 생각
글 성수진
최근에 읽은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정신과 의사였던 빅터 프랭클이 독일의 강제 수용소이자 집단 학살 수용소인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엮은 것이다.
빅터 프랭클이 수용소 안에서 만난 포로들은 어떤 결정을 내리는 일과 어떤 일이든지 앞장서서 하는 것을 두려워하며 자신의 운명에 영향을 주는 일을 피했다. 사소한 선택이 생과 사를 가르기도 하며, 옳은 줄 알고 내린 선택이 결과적으로는 그른 선택이 되기도 했다. 빅터 프랭클은 관련된 이야기를 하며 ‘테헤란에서의 죽음’이라는 이야기를 인용한다. 이 인용된 이야기를 소개해 보자면, 돈 많고 권력 있는 페르시아 사람이 어느 날 하인과 함께 산책하는데 하인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면서 죽음의 신이 자신을 위협했다고 했다. 하인은 주인에게 말을 빌려 그날 밤 안으로 갈 수 있는 테헤란으로 도망치겠다며 떠났다. 이번에는 주인이 죽음의 신을 마주한다.
빅터 프랭클이 수용소 안에서 만난 포로들은 어떤 결정을 내리는 일과 어떤 일이든지 앞장서서 하는 것을 두려워하며 자신의 운명에 영향을 주는 일을 피했다. 사소한 선택이 생과 사를 가르기도 하며, 옳은 줄 알고 내린 선택이 결과적으로는 그른 선택이 되기도 했다. 빅터 프랭클은 관련된 이야기를 하며 ‘테헤란에서의 죽음’이라는 이야기를 인용한다. 이 인용된 이야기를 소개해 보자면, 돈 많고 권력 있는 페르시아 사람이 어느 날 하인과 함께 산책하는데 하인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면서 죽음의 신이 자신을 위협했다고 했다. 하인은 주인에게 말을 빌려 그날 밤 안으로 갈 수 있는 테헤란으로 도망치겠다며 떠났다. 이번에는 주인이 죽음의 신을 마주한다.
왜 자신의 하인을 위협했느냐고 묻자 죽음의 신이 대답했다. 오늘 밤 테헤란에서 만나기로 계획을 세웠는데 아직 이곳에 있는 것을 보고 놀랐을 뿐이라고 말이다.
지금 이 순간 내리는 선택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는 알 수 없다. 충분히 고민하고 내린 결정이라 하여도, 하나의 선택이 운명에 미칠 영향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 선택 역시 운명의 영향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
빅터 프랭클은 인생을 두 번째로 살고 있는 것처럼 살라고 조언한다. 내가 하려고 하는 행동이 첫 번째 인생에서 이미 그릇되게 했던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선택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우리가 가진 최고의, 최후의 자유는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과는 모르지만 선택은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스스로 하는 것..
지금 이 순간 내리는 선택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는 알 수 없다. 충분히 고민하고 내린 결정이라 하여도, 하나의 선택이 운명에 미칠 영향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 선택 역시 운명의 영향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
빅터 프랭클은 인생을 두 번째로 살고 있는 것처럼 살라고 조언한다. 내가 하려고 하는 행동이 첫 번째 인생에서 이미 그릇되게 했던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선택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우리가 가진 최고의, 최후의 자유는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과는 모르지만 선택은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스스로 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