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03호]독일에서 보내는 편지

 
기사 제목

잘 지내고 있니? 오랜만에 너에게 안부를 전해. 이곳은 조금씩 해가 짧아지고 있어. 그래, 네가 좋아하는 밤이 길어지고 있다는 소리야. 장대비가 쏟아지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세 햇빛이 드리우는 변덕스러운 날씨가 익숙해지기라도 한 것일까. 한국의 가을이 어땠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아. 노란 단풍이 쌓여 있는 길목을 걷는 일을 참 좋아했는데. 내가 독일에 도착한 지 어느새 6개월이 지났어. ‘6개월’이라는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을 굳이 손가락으로 셈하고 있는 내 모습이 우습지만, 그건 이곳에서는 시간에 쫓기지 않은 채 흐르는 대로 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어. 미래를 염두하지 않은 채 떠나왔으니까. 

알람이 울리지 않는 아침을 맞이한다는 것도 새삼스러운 일이야. 한국에서 나는 어딘가 모르게 경직되어 있었잖아. 다섯 시간도 미치지 않는 수면시간에 익숙해진 것처럼 보여도 금방이라도 고꾸라질 것처럼 위태로웠고, 쏟아지는 일거리를 오기로 해내긴 했지만 만족을 느낀 적은 드물었어. 오로지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강박에 짓눌리고 있었으니까. 과거를 회상할 때마다 뿌듯하기 보다는 수치스러운 기분이 들어. 이제 와서 너에게 이런 말을 고백하는 게 웃기지?
 
그렇다고 해서 이곳의 생활이 순조롭고 마냥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야. 언어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한동안 약자가 되어버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으니까. 한국을 떠나 베를린 공항에 처음 발을 내딛었던 날은 아직도 선명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들이 소음처럼 밀려왔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이질적인 공기가 목에 턱 걸리는 것만 같았지.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그제야 실감하고 만 거야. 그들에게 나는 검은 눈동자를 느리게 깜빡이는 작은 동양인 여성일 뿐이었을 테니까. 내가 무엇에 감탄하고 무엇에 진저리를 치는 사람인지 그들이 알 게 뭐야. 서로를 부둥켜안고 재회의 순간을 만끽하는 낯선 이들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어. 그러고는 도망치듯, 내가 가진 전부인 28인치 캐리어를 끌고 공항 밖을 향해 나섰지. 어설픈 여행객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허리를 쫙 펴고, 자꾸만 땅으로 떨어지는 시선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너라면 ‘처음에는 다 그런 거야’라고 위로하듯 말해주었을까? 누구에게나 적응기가 필요한 것이라고,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라고…. 그래, 어쩌면 네 말이 맞아. 이곳의 생활이 익숙해졌는지 조금 뻔뻔해진 기분이거든. 허술한 독일어로 모르는 사람들에게 말을 건다든지, 시장에서 물건이 비싸다고 조금만 깎아달라고 얼굴색도 변하지 않은 채로 요구한다든지 말이야. 어느새 베를린 지하철 노선도를 보지 않아도 목적지까지 찾아갈 수 있게 되었고, 맛있는 케이크를 파는 카페를 아지트 삼게 되었고, 다양한 나라의 친구들을 사귀었고, 혼자서 떠나는 여행도 이제는 두렵지 않지. 여전히, 어쩌면 영원히 이 세계에서 이방인일지라도.

그래서 말인데, 너는 ‘여행’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떤 공간이 먼저 떠오르니? 자연의 위대함이라고밖에 설명이 불가능한 푸르른 산맥과 눈부신 바다,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유구한 인류의 역사를 담고 있는 유적지, 풍미 가득한 커피와 빵을 파는 개성 있는 카페 거리, 아름다운 예술품이 소장되어 있는 근사한 유럽의 박물관….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지 한 번쯤은 네 마음을 스친 도시나 나라가 분명히 존재할 거야. 사람들은 그 공간을 배경으로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건설해 일상의 동력으로 삼기도 하는 것 같아. 나도 마찬가지였어. 이른 아침에 학교를 가는 지하철 안에서 욱신거리는 눈을 질끈 감고 이어폰을 꽂고 잠시 현실을 잊곤 했지. 그러니까 더운 나라의 음악을 들으면서 여름 원피스를 입고 까만 피부를 아름답게 빛내며 춤을 추는 자신을 상상해 본다든지, 모로코 사막 입구에서 쏟아지는 별들에 감격해 ‘이 순간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는 말을 읊조리게 되는 그런 순간을 말이야. 상상이 끝날 즈음엔 ‘언젠가’라는 유보의 말로 나를 지탱하곤 했지. 그런데,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더라. 이 모든 게 단순히 환상으로 남는다면 내 삶은 얼마나 시시할까.

 

“어쩌면 나는,
환상의 공간을 현실로
만들고 싶었는지도 몰라.”

 

어쩌면 나는, 환상의 공간을 현실로 만들고 싶었는지도 몰라. 내 안의 환상을 깨부시고 싶었던 거야. 내가 꿈꾸는 공간도, 익숙한 장소와 별 다를 것이 없는 곳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어. “석양은 어느 곳에서 똑같은 석양이다”라는 페르난두 페소아의 말처럼 이곳의 사람들도 부단히 살아간다는 것. 밥을 먹고, 일에 몰두하고, 사랑을 하고, 잠을 자고, 그렇게 꿈을 꾸고 있다는 걸 직접 확인하고 싶었던 거야. 여행이 일상이 되는 순간을 위해 나는 비행기에 올랐어. 

처음에 다짐했던 거창한 이유와 목적을 잃어버린 채 단순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네게 제대로 작별인사도 하지 않은 채 이곳에 떠나온 과정을 솔직하게 적고 싶었어. 앞으로 부단히 너에게 편지를 보낼 예정이야. 내가 느끼는 것을 언어를 통해 우리가 함께 경험할 수 있다면 그만한 행복도 없겠지. 이곳에서 경험하게 될 공연들과 듣게 될 음악들, 읽게 될 책들과 만나게 될 자연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너에게 전해주려고 해. 답장은 하지 않아도 돼. 그저 첫 번째 편지가 부디 너에게 잘 도착하기를 바랄 뿐이야. 지금은 우리가 멀리 있을지라도. 


김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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