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마음이 괴로울 때 무얼 하는지 묻고 싶다.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바로 대답을 들을 순 없겠지만 말이다. 나는 마음이 힘들면 음식이 잘 안 먹혀서 담배만 피우곤 한다. 해결되지 않는 문제라면 별수 없이 시간이 지나길 바랄 뿐이다. 관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가장 마음을 힘들게 하는데, 요즘도 그렇다. 서로 다른 상식과 숨겨진 날카로운 이기심들이 귀를 베고 마음을 벤다. 뭐 내가 다 잘했겠냐마는 말이다. 문득 영화가 내게 위로가 되었던 적이 있는지 생각해 본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 <카페 뤼미에르>, <환상의 빛>,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 <여인의 향기>, <봄날은 간다>, <오아시스>, <러스트 앤 본>, <사랑에 빠진 것처럼>,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원더풀 라이프>. 좋은 영화들이 참 많고, 그 속에 그려진 사람을 보는 게 행복했다. 그런데 마음이 힘들 때 찾는 것이 영화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역시나 사람이었지. 영화의 본령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영화가 뿜어내는 의미들이 꼭 사람이 사는 데 실제적인 도움으로 연결되지는 않는 것 같다. 이야기 없이 살아갈 수는 없지만, 영화 안에 있는 것도 결국 다 남의 이야기다. 우리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할 때가 많은데 말이다. 시간이 지나니 어떻게 영화를 시작하게 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대답이 달라진다. 대단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심정과 가장 가까웠던 이유는 하나 있다. 나라는 사람이 말을 하면 아무도 안 들어주는데, 영화로 만들면 봐주기도 하고 욕도 칭찬도 해주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조금 덜 외로워졌다. 근래에 영화를 하나 찍었다. 대전에 계신 많은 분의 도움을 받았다. 사람들이 봐 줄 만큼만 잘 나오면 좋겠다. 칼럼을 마무리하고 편집을 해야 한다. 이미 국장님께 죄송할 만큼 늦어버렸다. 이해해 주실 거라 생각한다. 그냥 요즘 내가 마음이 좀 그랬다.
# 2
존경해 마지않는 가와세 나오미 감독의 <앙>을 네이버 N스토어에서 다운받아 보았다. 토렌트에서 받지 않은 것을 자랑하고 싶었으나, 쓰고 나니 자랑거리는 아닌 것 같다. 이 영화는 그녀의 영화답다. 그녀의 영화는 대부분 자연이 나오고, 아름답게 죽는 사람이 나오고, 그걸 지켜보는 사람이 나온다. 그리고 남겨진 사람은 어떤 깨달음으로 위로를 받고, 힘을 내어 살아간다. 갑자기 팔레스타인 분쟁이 생각난다. 이 영화의 주제가 ‘모든 인간이 각자 의미를 가지고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다.’ 정도이기 때문인 것 같다. 며칠 전 뉴스에서 가자지구와 요르단 강 서안지역에서 이번 달에만 60명이 죽었다고 들었다. 부상은 300명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쩌면 살아갈 가치 있는 사람들이 60명 죽었다. 모든 인간은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 부분이 생각나 다시 플레이 해본다. 어쩌면 살아갈 가치 있는 사람들이 이미 60명이 죽었다. 다시 모든 인간은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 부분을 플레이 해 본다. 영화가 어떤 주제를 향해 달려가서 그곳에 멋지게 깃발을 꽂더라도, 그 깃발에는 각기 다른 창작자의 주장이 적혀 있을 뿐이다. 그 주장은 대부분 우리의 생존과 별 상관이 없다. 그래서 먹고살 만해야 보거나, 먹고살 길이 막막해서 아무 생각하기 싫을 때 영화가 더 효용이 있을 수도 있다. 이렇게 이야기하고는 스스로 조금 놀랐다. 오래전 영화에 대해 논하며, 종교처럼 숭배하던 때가 떠올라서이다. 그런데 지금이 더 행복한 것 같다. 좋아죽던 가와세 나오미 영화의 불편한 점도 눈에 보이고, 무엇에 경도된다는 것을 믿지 않게 되었으니 말이다. 내가 이 영화를 바라보며 불편했던 것은, 주제가 먼저냐 이야기가 먼저냐의 문제였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와 같은 이야기다. 현대미술에서 아무렇게나 그려 놓고 의미와 주제를 붙이는 것을 조금 우습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 방식을 이야기를 직조하는 차원에 적용했을 때, 주제를 박아놓고 시작하는 것보다 훨씬 자연스러운 방법일 수 있다는 것을, 이 영화를 통해 조금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 3
이 영화의 주장을 응원하지만, 실제적이지 않은 주제를 인물과 촬영으로 기막히게 발랐다고 생각한다. <앙>은 도리안 스케가와라는 작가의 원작을 바탕으로 했다고 찾아지고, 아직 국내에 번역되어 출판되지는 않았다. 이 영화의 내용을 잠깐 설명해야겠다. ‘세상의 편견 속에서 50년간 단팥소를 만들어온 나병 환자 할머니가, 과거 폭력으로 누군가에게 장애를 갖게 한 전력이 있는 남자를 만난다. 남자는 작은 마을에서 도라야키(경주빵처럼 속에 앙금이 들어있는 케이크)를 만들고 있고, 할머니는 그 가게에서 단팥소를 만들며 잠시 아르바이트로 일하다가 물러나게 된 얼마 후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남자에게 꼭 무엇이 되지 않아도 인간은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다는 메시지를 남긴다. 남자는 자신의 전사에 이입해 다시 살아갈 깨달음을 얻고, 세상 밖으로 나와 힘을 내 도라야키를 판다.’ 이 내러티브를 반대로 풀어 보면 주제와 이야기 중 무엇이 먼저 시작됐을지 의심해 볼 수 있다. ‘누군가 다시 살아갈 깨달음을 얻고 세상 밖으로 나와 힘을 낸다. 그는 자신에게 메시지를 남기고 죽는 노인을 만난다. 남자는 노인의 메시지에 이입할 만큼 음울한 전사를 가지고 있다. 노인은 세상의 편견으로 어딘가에 갇혀 살던 사람이고, 이 남자의 가게에서 잠시 일하다 물러나야 했다. 이 노인의 병은 나병이다. 가게에서 노인이 뭉그러진 손으로 만들던 음식은 도라야키이다. 그 안에 들어가는 것은 만들기 어려운 단팥소이다.’ 나는 이렇게 이야기가 무언가를 ‘위해’ 달려가는 느낌을 받았다. 꼭 그렇게 달려가지 않아도 될 텐데, 어떤 깨달음을 위해서는 남자의 전사도 필요하고, 손이 뭉개지는 병도 필요하고, 그 손으로 만지작 해야 하는 음식도 필요하고, 음식 안에 들어가는 것은 젊은 사람들이 손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어야 했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 말이다. 그래서 걸렸던 장면들이 있다. 영화 초반에 단팥소를 제대로 만들려면 많은 도구와 시설이 필요했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서 음울한 남자가 세상 밖으로 ‘나와야하기 때문에’ 길거리에 좌판을 펴놓고 도라야키를 팔기 시작한다. 만들어서 가지고 나왔을 수도 있겠지만, 실상 남자는 가게를 빼앗겨 시설을 쓸 수 없다. 공장에서 만드는 단팥소가 아니라, 할머니가 만드는 방식의 단팥소를 계승해야 결과적으로 상징이 맺어지는 게 아니었나 싶은데 그 좌판으론 불가능하다. 어쨌든 그 남자가 세상 밖으로 나오는 모습이 나와야 주제에 맞았던 것 같다. 또 하나는 도라야키를 만지작거리는 할머니의 손이다. 할머니의 얼굴이 나병으로 뭉개진 것도 아니고, 손만 감추면 될 일이다. 그런데 50년 동안 세상의 편견으로 고통받았던 할머니는 초반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며 인적사항을 적을 때 손을 감추던 것과는 달리, 손님으로 온 아이들 앞에서 뭉개진 손으로 보란 듯이 도라야키를 주물럭거린다. 아이들 앞이라 편해서일 수도 있고, 격리시설 안에서 원래 하던 자연스러운 동작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장면을 보고는 나부터도 먹고 싶지 않았다. 우리가 그 장면에서 반드시 그 도라야키를 먹고 싶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감독도 먹고 싶지 않은 감정을 이끌어 내야 할머니가 일에 잘리고 죽음까지 다다르게 할 수 있으니, 클로즈업으로 힘을 줘 편견에 예민한 할머니에게 장갑도 없이 손을 걷어붙이게 한 것처럼 느껴진다. 자신의 손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편견과 오해가 괴로운 사람이라면, 조금은 다른 동작을 보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4
마지막으로 주제를 강요받은 듯한 느낌이 드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남자(나가세 마사토시)와 할머니(키키 키린), 두 인물의 캐스팅은 영화에 대한 어떤 의문을 가지는 것이 온당치 않다고 느낄 만큼 적합함 그 이상이다. 두 인물의 몽타주는 관객에게 각기 다른 감흥을 던져주는데, 나에게 남자는 ‘산 사람에게서 죽은 사람의 냄새가 난다.’였고, 할머니는 ‘저 사람이 더 이상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였다. 영화 내용을 보면 두 인물에 대해 느낀 내 감흥이 반대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만큼 두 사람은 다르면서도 유기적으로 느껴진다. 영화의 첫 장면, 자고 일어나 부스스한 남자의 뒤를 카메라가 따르며 화면에서 어떤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비슷한 냄새를 맡았던 순간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오래전 인천 쪽방 촌을 취재하던 때 정갈해만 보이던 어느 노인의 날숨에서도, 잠시 머물렀던 신림동 고시원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한 식탁에 앉아 밥을 먹던 때 그들의 젓가락질에서도, 새벽 청량리에서 내 팔뚝을 잡고 호객행위를 하던 엄마뻘 아주머니의 점퍼에서도 맡았던 냄새 같다. 잘 씻지 않아서라거나 원래 불쾌한 체취를 타고나서가 아닌, 남들에게 설명하기 힘든 어떤 사연과 비통한 감정 같은 것들이 담겨 있어, 맡는 순간 굉장한 어두움과 외로움 그리고 아득함이 느껴지곤 했다. 젊은 기타노 다케시처럼 생긴 이 남자가 등장할 때마다 느껴지던 그 냄새는 할머니가 죽고 난 후 사라지도록 계획되어 있다. 그것이 타인으로 인한 깨달음으로 그렇게 쉽게 사라지는 냄새가 아님에도, 할머니의 죽음 앞에 오열한 이후, 남자는 말끔해진다. 뒤이어 길거리에 좌판을 펴놓고 벚꽃 아래서 도라야키를 팔며 웃고 있는 모습을 보며, 이미 상처받은 인간이라는 인물에 적합하다 못해 넘어서는 배우를 주제에 맞추려고 욱여넣어 연출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냥 가게에서 짐을 싸서 나와, 세상 밖 어디론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여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 5
할머니 키키 키린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중 네 편에 출연했고, 그중 <걸어도 걸어도>의 아들을 잃은 어머니 역할이 강하게 기억에 남는다. <앙>에서도 그녀가 엄청난 연기를 선보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팔뚝이 저릿한 장면이 하나 있다. 가게에 손님이 끊긴 장면이다. 사장이 부르자 벌떡 일어나 웃어 보이다가, 장사를 접자고 하니 본래 사시인 그녀의 눈이 정처 없이 흔들리고, 뒤이어 모자를 벗고 흐트러진 머리에 핀을 꽂는다. 잘해 보려고 했으나 나병환자인 자신 때문에 이 일들이 벌어졌고, 그 미안함과 동시에 서운함이 짧은 표정과 몸짓에 표현된다. 이미지에 관한 용어 중에 푼크툼(punctum, 관객이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작품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것이 있는데, 나는 이 장면을 보며 내 가족이 마음을 다쳤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스크린으로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감싸주고 싶을 만큼 그 장면은 너무 가슴이 아팠고, 그것을 의도한 감독은 긴 테이크로 연출했다. 나는 이 영화가 이 컷 하나면 된다고 생각한다. 어떤 대자연과 흐드러진 벚꽃들보다 키키 키린의 수많은 표정과 감정들은 실제적이고 영화적으로도 아름답다고 느껴진다.
# Fin
영화를 볼 때보다 영화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니 조금 마음이 나아지는 것 같다. 영화가 아니더라도 어떤 이야기가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무엇에 대해 평론을 할 깜냥이 못되지만, 지면을 통해 풀어낸 이야기들이 누군가에게 대화로 다가갔으면 좋겠다. 그럼 영화를 보는 것 이상,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는 느낌에 그 영화가 더 큰 의미로 다가오지 않을까 싶다. 지금 나에게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