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동은 오도산을 등진 동향 마을이다. 이곳에 이사동 묘역이 있다. 1499년, 조선시대 문신 송요년이 오도산에 자신의 묫자리를 정했다. 516년 전이다. 이때부터 이사동에 은진 송씨 집장촌이 형성됐다. 현재는 이사동 일대 55만 평에 기념물로 지정한 송요년 묘역(대전광역시 기념물 제44호), 송남수 묘역(기념물 제46호) 등 분묘 1,070여 기가 있다.
이사동 묘역을 연구해 온 한상수 전 대전대 명예교수는 “이집트 중세 이슬람 공동묘지, 중국 북망산 묘지 등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묘지는 많지만, 단일혈족 분묘 1,070여 기가 500년에 걸쳐 조성해있는 건 이사동 묘역이 유일하다.”라고 설명했다. 한상수 교수는 그렇기 때문에 이사동 묘역을 일개 문중 유산으로 치부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대전의 문화유산으로, 더 나아가 우리나라 장례문화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으로 보존・연구・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사동 묘역을 총괄하는 은진 송씨 목사공 종증 송태영 회장도 “지금이야 보존 상태가 양호하지만, 시대 흐름에 따라 이사동의 소중한 문화유산도 없어질 수 있다. 분묘만 훼손하지 않는다면 대전 시민을 위해 얼마든지 개방할 수 있으니, 함께 보호하고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줬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전문가와 관계자 의견을 고려해 대전시도 법적・제도적 정비를 추진하는 중이다. 구체적으로 전체 사업 진행을 위해 이사동을 건축자산 진흥구역으로 지정하고, 국비 예산 확보를 위한 공모사업도 준비 중이다. 계획대로 진행할 경우, 향후 10년간 약 250여억 원의 예산을 이사동에 투입할 수 있다. 예산에 따른 계획도 대략 나온 상태다.
대전시에서 말하는 이사동 문화유산의 핵심 키워드는 역사, 자연, 민속이다. 대전시는 이 핵심 키워드에 따라 마을경관 조성사업(전통한옥마을 만들기, 마을 숲 복원, 누리길 조성), 문화재 활용사업(전통의례관 건립, 유교문화스테이시설 확충, 김옥균 생가지 복원), 문화콘텐츠 개발사업(답사 코스 및 스토리텔링 개발, 무형 유산 및 민속 문화 축제 개발) 등 세 가지 핵심사업과 그에 따른 8개 과제사업을 설정했다. 문화재종무과는 “거주민을 내쫓고 한옥으로 꾸며 관광단지처럼 조성하는 기존의 한옥마을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대전시에서 계획하는 것은 거주형 전통마을이다. 대전시는 행정・재정 지원을 할 뿐, 문화유산을 보존・활용하는 주체는 이사동 거주민 중심으로 하는 주민자율기구”이라고 강조했다. 덧붙여 이러한 사업을 통해 이사동의 마을 공동체가 활성화하고 마을 경제가 살아나길 바란다고 했다.
“문인석만 봐도 그렇다. 문인석의 표정, 관모와 관복 등이 전부 다르다. 시대별 변천사를 그대로 드러낸다. ”
한상수 전 교수는 이사동 묘역을 일개 문중 유산으로 치부하면 안 된다고 강조한다. 대전시는 이곳에 예산 250여억 원을 투입한다고 말한다. 그만큼 이사동 묘역이 가치 있다는 얘기다. 그 가치라는 건 이렇다.
첫째, 이사동 묘역은 금석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은진 송씨 문중에서는 지난 2007년 이사동 묘역 비석 중 122기를 선별해 연구했다. 연구 결과, 비문의 글을 짓고 쓴 사람이 모두 조선시대 유교문화를 선도했던 문인이고 명필이었다는 것이다. 목사공 종증 송태영 회장은 “비문에 이름 올린 이들 중 타 성씨는 성현, 김집, 김구 등이 있으며, 문중에서는 송남수, 송시열, 송준길 등이 있다. 모두 학자, 문신, 시인, 서예가 등 당대를 대표했던 최고의 명문”이라고 했다.
비석과 함께 이사동 묘역에서 흥미로운 건 석물이다. 정해진 방식이 없다 보니 시대에 따라 석물 모양이 제각기다. 문인석만 봐도 그렇다. 문인석의 표정, 관모와 관복 등이 전부 다르다. 시대별 변천사를 그대로 드러낸다. 석물은 예술적으로도 빼어나다. 동자석이 대표적이다. 동자석은 민묘에서만 볼 수 있는 석인으로 불교와 도교, 민속과 무속의 여러 요소를 가미한다. 이사동 묘역에는 2기가 있다. 손에 연꽃을 쥐고, 천진무구한 표정으로 서 있다.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둘째, 이사동에 있는 재실과 각종 건축물도 주목할 만하다. 조선시대 장례문화에서 빠질 수 없는 게 재실이다. 재실이란 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집이다. 이사동 묘역에는 문화재자료로 지정한 안동고재실 월송재(문화재자료 제31호), 승지공재실 추원재(문화재자료 제33호) 등 총 13개 재실이 있다. 물론 이사동에 있는 모든 재실이 오랜 역사와 건축적 완성도를 자랑하진 못한다. 개중에는 증축하거나 개축한 건물도 있다. 살림집으로 사용하던 기와집을 개조한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재실마다 다양한 건축양식과 이야기를 가진다. 재미를 더한다.
이 밖에도 이사동에는 송남수 별당 절우당과 송국택 별당 사우당, 자산공 송세협을 기리는 학현재, 난곡 송병화가 학문을 가르쳤다는 봉강정사 등 다양한 건축물이 공존한다. 한상수 전 교수는 “이렇게 한 마을에 10여 개소의 재실과 이야기가 담긴 건축물이 다양하게 있는 경우가 드물다.”라며 각 건축물에 관한 전문가 연구도 필요하다고 했다.
셋째, 전통 장례 방식을 보존한다. 대전에서 전통 방식으로 진행한 사대부의 마지막 장례는 이사동에서 치러졌다. 구한말 규장각에서 벼슬한 후, 1935년 사망한 송용재 장례 때다. 목사공 종증 송태영 회장은 "그 당시 장례행렬이 이사동에서 인동까지 이어졌을 만큼 많은 사람이 송용재 씨 장례 때 참여했다고 한다. 그 당시의 전통 장례 방식이 영상 기록으로 남아 있다.”라고 말했다.
1991년 KBS 주관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가 열렸다. 이때 이사동 주민 120여 명이 송용재 장례행렬 시연을 준비했다. 전통 장례 방식을 철저히 고증한 작품이었다. 목사공 종증 송태영 회장은 "그 대회에서 송용재 장례행렬 시연 장면을 촬영해 영상 테이프로 만들어놓은 게 있다. 현재 목사공 종중에서 보관 중이다. 영상이 있기 때문에 지금도 얼마든지 구현할 수 있다."라고 덧붙였다.
능선에서 내려와 산 아래로 걸었다. 멀리서 여러 분묘를 볼 때와는 또 다른 분위기가 전해졌다. 군중이 익명성을 보장하듯, 멀리서 봤을 때는 개별 분묘의 특성이 드러나지 않았다. 다만, 시선을 압도할 뿐이었다. 가까이서 바라본 개별의 분묘는 시선을 붙들었다. 저마다 다르게 생긴 비석과 석물이 눈에 들어왔다. 비석을 하나하나 들여다봤다. 개별의 삶과 죽음을 기록하고 있었다.
다시 걸었다. 삶과 죽음이 혼재한 이사동 곳곳을 걸었다. 문득, 산티아고 순례길이 떠올랐다. 그곳도 죽음의 흔적을 더듬는 것에서 유래한 길이다. 9세기 초, 스페인 산티아고에서 사도 성 야고보의 무덤이 발견됐다. 이후 이곳이 순례지로 자리 잡았다. 프랑스 생장에서 출발해 스페인 산티아고까지 순례가 이어졌다. 서유럽인들은 죽음의 흔적을 찾아,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고민하며, 산티아고를 향해 걷고 또 걸었다. 그것이 약 800km에 달하는 산티아고 순례길의 유래다.
오늘날, 산티아고 순례길은 5개 자치주와 크고 작은 도시와 마을 166개를 지난다. 역사적으로 가치 있는 종교 건물과 민간 건물도 1,800여 개 만난다. 로마네스크에서 바로크 시대 이후까지의 예술과 건축 발전상을 반영한 건물들이다. 이런 이유 덕분에 유럽에서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유럽의 첫 번째 문화여행로’라고 부른다. 1993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지정했다.
죽음의 흔적을 더듬는 과정, 종교와 건축과 예술이 뒤섞인 문화유산. 이사동과 산티아고는 많은 부분 닮아 있었다. 인위적인 조작이 과하면 자칫 시간의 더께를 흩트린다. 본래의 맛을 해칠 수 있다. 천천히 걸을 수 있는 길이면 된다. 그저 죽음을 더듬어볼 수 있는 공간이었으면 한다. 산티아고 순례길처럼 말이다. 죽음의 흔적이 시선을 압도하는 곳, 이사동을 걸으며 죽음을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