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것의 이유
이혜정 작가
“변선우 시인은 스물일곱이었다. 우선은 그 점이 부러웠다. 게다가 그는 스물여섯에 시인으로 등단했다. 그 점도 부러웠다. 나도 10년 전에는 스물일곱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스물일곱과 전혀 무관하다. 인생이라는 게 원래 그렇다는 걸 알겠다.” - ≪월간 토마토≫ 2019년 5월호. <발견되고 싶다>. 글 이혜정
이혜정 작가를 처음 만난 건 2019년도 4월이었다. 그녀의 글도 그때 처음 봤다. 신춘문예 당선자 인터뷰 글이었다. 그녀는 부럽다고 썼다. 이용원 대표는 그녀를 작가라고 부르곤 했다. 2004년 계명문화상 단편소설 부문 당선자였다. 월간토마토에 편집자로 있었던 이혜정 작가는 2019년 8월에 일을 그만두었다. 출산과 육아 문제였다.
그 후로도 글을 쓴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번은 단행본 편집 일로 집에 찾아간 적이 있었다. 집에는 책이 많았다. “몇 권 안 읽는 책 있는데 가져갈래요?” 그날 받아온 책 무게보다 아직 그곳에 남아 있을 책 무게에 대해 생각했다. 육아를 병행하며 글을 본다는 건 알 수 없는 무게였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것도 오래전 일이다.
다시 이혜정 작가를 만난 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단 소식을 들은 후였다. 신문사 홈페이지에 들어가 글과 당선 소감을 찾아봤다.
“오랫동안 소설의 주변에 머물렀습니다.”
진솔한 당선 소감이었다.
작은 기적
소설 속 두 여자가 나온다. 이들이 있는 공간은 하천으로, 연구단지로 겹겹이 쌓여 세상과 단절된 곳만 같다. 소설 속 주인공이 앉아 있는 카페는 탄동천 옆 지질연구소 건물 1층이다. 연구단지 근처, 동네가 하나뿐인 곳이다.
“그녀의 눈길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지만. 가라앉아 있는 얼굴이었다. 아마 이 동네에 사는 다른 외국인 여자처럼 연구원인 남편을 따라 이 낯선 곳에 왔을 터였다. 말도 통하지 않고, 자기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채. 한 남자의 트렁크가 되어 비행기에 실렸겠지. 이곳에 온 다음에야 그녀들은 자신이 어떤 삶을 택한 건지 뒤늦게 깨달을 것이다. 공허한 눈길이었다. 이제 와서 어떤 선택이 가능할까.” 이혜정, 『피비』 중에서
이혜정 작가 신춘문예 등단 작품 『피비』에 등장하는 두 여자는 위험해 보인다. “이 세계가 나의 것인지, 그의 것인지” 모르겠다는 이와, 결혼하며 남편 직장 있는 곳으로 이사 와 “이 도시에서 내 경력을 살릴 수 있는 직장은 없는”, “행복은, 매일 버려지는 음식쓰레기처럼 악취를 풍기며 나를 찾아내라고 압박”한다고 느끼는 이가 함께 천변 길을 걷는다. 모든 소설이 허구겠지만 소설엔 작가 삶이 녹아 있다. 그녀 또한 서울에서 대전으로 내려왔을 때 느꼈던 감정이 『피비』에 어려있다. 서울 출판사에서 일을 했었고 남편 따라 대전에 내려왔다. 대전에서 대학원을 다녔다. 그녀 말로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소설 속 외국인 여자처럼 그녀 또한 낯선 곳에 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느낌이었을 거다. 그 가운데서도 계속 소설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혜정 작가에게 소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바라왔던 것, 잘하고 싶고, 좋은 것”이었다.
“당선 소식을 들었던 날 밖엔 눈이 왔어요. 마침 함께 있던 아빠와 부둥켜안고 울었어요. 이 상은 제게 기적이기도 하고 용기를 주는 상이기도 해요.”
꾸준히 글은 썼다. 그리고 누군가로부터 쓴 글을 인정받게 된 이 순간이 지금까지 써 왔던 과거를 위로하고 인정해 주는 느낌이다. 조금 더 편하게, 아이를 돌보며 살 수도 있겠지만 손에서 글을 놓아도 마음에서까지 놓을 순 없었다. 소설 속 기영이란 여자는 왼손바닥에 검붉은 흉터 자국이 있다. 작은 새, 피비가 빠져나간 자리다. 방직공장에서 있던 사고였다. 그녀의 상상 속에서 불러내 놀곤 했던 피비는 기계 앞에서 사라져버렸고, 막연한 두려움이 찾아와 열아홉에 결혼했다. 이혜정 작가는 그런 기영을 그려내며 스스로 내 안의 작은 새를 붙잡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을지도 모른다.
“소설은 내 삶이랑 달라붙어 버려서 분리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런 그녀에게 이번 신춘문예 상은 특별할 수밖에 없다. 이혜정 작가의 글은 경상일보 홈페이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꾸준히 계속, 또는 천천히 써내려 간다
글을 쓴다는 건 어쩌면 외로운 일이다. 글을 쓰기는 날로 어려워지지만 솔직한 고백보다는 화려한 이미지를 소비하는 시대다. 프로 작가보다는 대형 유튜버가 더 주목받기도 한다. 그럼에도 글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글을 쓰고 이제 남들에게 보여줘야 하는데, 남들이 보면 뭐라 할까? 걱정하기도 해요.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렇게 못나고, 부서지고, 힘들고, 고독하고, 외로운 게 우리 삶인데 그걸 거짓 없이 보여주는 작업이 글쓰기라 생각해요. 외롭고 고통스럽지만 이게 위안이 되기도 해요. 모두 잘나 보이지만 다들 외로운 것 같아요. 글을 읽으면 우리가 결국 비슷하다는 걸 알고 동질감을 느끼고 서로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요? 새가 깃털을 다듬고, 고양이가 그루밍 하는 것처럼요.”
이혜정 작가는 “‘다정한 빛’을 소설에 담아 매일 쓸 것”이라고 말했다. 산다는 것은 기적이니까. 모두들 쉽게 잊고 살지만, 모두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 속에서 매 순간이 기적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그녀의 다정함은 어쩌면 지금껏 모든 소설가가 고민하고 걸어왔던 길을 동일하게 걸어가겠다는 다짐일지도 모르겠다. 살아 있는 것의 가치를 알려주는, 그 삶이 비록 힘들고 괴로울지라도 그 안에 반짝이는 것들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일지도 모른다.
“『다정한 서술자』에서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 말한 게 있어요. 저도 드라마를 좋아하는데요. 드라마는 이야기가 완결이 있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이어져요. 그 결론은 관객이 원하는 방향을 향해 자족적, 자가증심적으로 뻗어나가요. 그래서 자극은 있지만, 그 이야기에서 주는 카타르시스나 여운은 없죠. 작가는 문학이 다른 미디어에서 보여줄 수 없는 자기 승화적인 면이 있다고 생각해요. 저도 그런 소설을 쓰고 싶어요.”
이혜정 작가는 우릴 둘러싼 모든 것을 의미 있게 보는 것에서 사랑이 피어나고 무심함과 폭력을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런 그녀는 현재 사랑에 대한 소설책을 준비 중이다. 부산 산지니 출판사와 함께한다. 한강 작가를 좋아하는 그녀는 한강 작가가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를 쓰고 사랑에 대한 소설이라 했듯, 자신의 책도 그렇게 되길 바란다고 했다. 이혜정 작가의 책이 나오면 찾아 읽어봐야겠다. 삶의 다양한 결을 그려낼 작가가 우리 곁에 또 하나 자라고 있다.
글 사진 황훈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