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콘텐츠의 광맥. 이사동 이야기

지역 콘텐츠의 광맥. 이사동 이야기

흔히 산 자와 죽은 자가 공존하는 마을이라고 불리는 대전 동구 이사동엔 1,000기가 넘는 무덤이 있다. 이곳은 은진송씨 가문의 묘가 모인 집장지다. 제실도 14개나 있어 후손이 묘역 근처에 살며 묘역을 돌본다. 아직은 이사동이 낯선 이도 많지만, 분명 관심 가지고 주목할 만한 동네다.

 『이사동 24인의 이야기』는 이사동에 묻힌 이들과 지금 이사동을 지키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500년 세월 동안 쌓인 이야기를 한겹 한겹 풀어낸 책을 읽으면 이 글이 나오기까지 여러 번 이사동 길을 오가겠구나 싶다. 마을 이야기와 주민에 대한 애정이 담긴 책을 묶은 저자를 만나 이사동 가치를 들어 보았다.

한소민 작가

내게 특별한 공간이 되는 순간

“공간이 나만의 장소로 느껴질 때가 있어요. 제겐 이사동이 그랬어요. 갈 때마다 새로워요. 이사동이 제게 특별해진 건 햇살 때문에 그리고 몇 번의 우연이 겹쳤기 때문이에요.”

『이사동 24인의 이야기』는 한소민, 조현중, 한정근 작가가 함께 썼다. 인터뷰에 함께한 한소민 작가는 이사동에 대한 애착이 깊다. 인터뷰 내내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이사동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는 그녀는 영락없는 작가였다. 햇살이 반짝이던 여름이었다고 했다. 이제는 무너져가는 고택에 자라난 빨간 앵두나무를 우연히 마주친 날, 사진으로 몇 번이고 봤던 공간이 살아 숨 쉬듯 다가왔다. 이 공간에서 누군가는 사랑을 했고, 저 빨간 앵두 열매를 따 먹었겠구나 싶었다. 또 송희갑이란 인물에 관심을 가지고 여러 자료를 찾아 볼수록 모든 이야기는 이사동으로 귀결되었다. 예전에 언뜻 보았던 시가, 전해 들었던 이야기가 모두 이사동에서 풀어졌다. 송담 송남수, 금암 송몽인과 더불어 이사동 3대 시인이라고 불리는 송희갑의 인생은 알면 알수록 매력적이었다. 1584년 송수의 여섯 명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나 서자라는 한계 속에서 살다 짧은 생을 마감한 그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싶었다. 이건 글쟁이가 좋은 글 소재를 찾으면 견디지 못하는 마음이었다. 이사동이 마음에 특별하게 다가오자 제대로 이야기를 풀어보자고 생각했다.

“먼저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었어요. 스스로 기획안을 짜고 원고도 다 써서 방송국에 촬영을 제안했어요. 좋은 기회로 KBS 대전 방송국에서 특별 다큐멘터리 편성되었죠. 촬영을 준비하면서 더 많은 자료를 모을 수 있었고 조사하면 할수록 할 이야기가 정말 많았어요.”

한소민 작가가 기획한 다큐멘터리는 지금도 유튜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제목은 <오백 년의 타임캡슐 이사동>이다.

지역 콘텐츠의 광맥 이사동

“이사동을 이야기할 때 안타까운 것이 있어요. 과거 유교문화라고 생각하며 거부감을 느끼거나 송씨 가문의 일로 의미를 축소하곤 해요.”

문화는 공간을 중심으로 쌓인다. 이사동에 얽힌 이야기는 풀어내면 끝이 없다. 마을엔 ‘한천’이라 이름 쓴 우물이 있다. 차갑고 맑은 물이란 뜻인 한천은 난곡(蘭谷) 송병화(宋炳華, 1852-1916)가 지었고 그로부터 아득한 후손인 송진백이 한천이란 이름으로 시를 써 우물에 편액을 달았다. 조상과 후손이 서로 같은 것을 보고 다르게 느끼며 문화를 쌓아 왔으니 그 이야기 관계를 따져가기만 해도 다양한 일화가 쏟아진다.

“각 분야 전문가분을 모시고 이사동을 방문하면 그때마다 또 새로운 것을 알게 돼요. 이곳에 있는 무수한 자원이 점차 가치를 부각해줄 만한 자기 짝을 만나고 있다고 생각해요. 문인석만 봐도 그 표정이 다 다르고, 이곳에 있는 소나무는 마을을 처음 방문하는 이들도 멋지다며 감탄하죠. 또 공간적 의미로 보면, 추모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해요.”

수많은 비석문, 다양한 문인석 표정, 오래된 소나무, 마을에 남아 있던 제례 문화만 다뤄도 그 깊이가 깊다. 한소민 작가는 『이사동 24인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이사동 이야기 시리즈를 계속 낼 생각이다. 이번에 이사동에 어떤 콘텐츠가 있는지 보여줬다면 이후엔 이 콘텐츠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 보여줄 예정이다. 한 문중의 문화를 넘어 누구나 느끼고 즐길 수 있는 보편적 가치가 이사동 곳곳에 숨어 있다.

“송국택의 아들 중 송규장이 있었어요. 빼어난 재주가 있던 아들이었는데 일찍 요절하였죠. 아버지로서 절절한 제문을 남겨요. 송규장의 스승이었던 송시열도 제문을 남기죠. 이 둘은 제문을 쓰고 상심을 달래기 위해 마을을 걷다 문득 이곳이 화양구곡처럼 경치가 아름답다고 여겨 산자락에 ‘소화동천’이라고 이름을 붙였죠. 이처럼 마을 전체에 이야기가 쌓여 있어요. 지역 특색 콘텐츠 중요성이 부각되는 이때 대전은 그 시작을 이사동에서 풀어낼 수 있다고 봐요”

일찍이 송여림은 이사동을 집장지로 쓸 수 있도록 든든하게 돈을 마련하라 유언을 남겼다. 그 유언에 따라 지금까지 500년이 넘도록 자손들은 묘역을 보존해 왔다. 조상의 유언을 지금까지 지켜온 그 힘으로 과거와 현재가 이어질 수 있었다. 이제 필요한 건 과거와 현재를 이어 줄 다양한 콘텐츠를 천천히 꺼내 올리는 일이다. 한소민 작가 머릿속에선 계속 원고 목차와 원고 내용이 쉴 새 없이 움직인다. 입 밖으로 넘칠 정도로 이야기는 차 있는데 손으로 하나하나 눌러 담기엔 속도가 느려 몸이 아플 지경이다. 

도시에서 마을로 떠나는 여행

“이곳엔 14개 제실이 있어요. 이 제실을 중심으로 커뮤니티 공간을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또 소제동에서 있었던 것처럼 레지던시 공간을 만들어 이곳에 있는 흔적들로 예술 활동을 해도 충분히 많은 것을 표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곳에 서점을 만들고 싶어요. 삶과 죽음을 돌아보고 추모할 수 있는 서점이요.”

도시는 바쁘게 움직인다. 도시민은 마치 죽음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 듯 바쁘게 살아간다. 그런 도심 속에 죽음을 기억하는 장소가 있다면 어떨까? 한소민 작가가 이사동을 특별하게 보는 이유 중 하나다. 바쁘게 뛰어가다가도 한 번쯤은 이사동에 들러 잠시 멈추고 자신을 돌아보며 삶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 줄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만큼 공간 자체가 가진 콘텐츠 힘이 뚜렷하다. 이곳에 서점, 도서관을 만들어 각자 떠나보낸 이들에 대한 기억을 기록해 놓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서로의 아픔을 읽어보며 나의 슬픔이 또 남의 슬픔과 얼마나 맞닿아 있는지 헤아려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별한 이들을 위한 일은 그들의 몫까지 열심히 사는 것이라고 해요. 제사나 유교 문화를 떠나 이 공간이 나를 돌아볼 수 있고 또 삶을 충실히 살아갈 힘을 줄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다고 믿어요.”

마을이 지속해 낯선 이들과 소통하기 위해선 마을 주민 참여가 필수다. 한소민 작가는 자주 마을 경로당에 찾아가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함께한다. 마을을 여행객의 시선이 아닌 주민의 시선으로 바라보기 위해서다.

“한번은 마을 어르신이 매우 신묘한 용왕터가 있다고 해서 가 봤는데 어르신 말처럼 엄청 신묘한 공간은 아니었어요. 그냥 지나칠법한 공간이었죠. 남들이 볼 땐 시시한 공간도 주민 입장에선 소중하고 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이사동에서 조금 나오면 솟대를 만드는 아버지와 도자기를 빚는 딸이 함께하는 공방과 중국집도 있다. 요소요소를 잘 연결하고 다듬으면 누구나 와서 즐기고 갈 수 있는 코스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도시 브랜드와 작가의 역할

지역 콘텐츠를 발굴하고 그 안에서 기쁨을 누리는 한소민 작가 모습을 보며 지역 예술가 역할을 알 수 있었다. 이곳에 땅이 있는 것도 아닌데, 시간과 돈 들여 책도 만드니 이게 무슨일이냐고 하지만 그럴수록 ‘이렇게 내가 쓰고 싶은 대로 쓸 수 있는데 뭐가 문제냐’라고 이야기하는 한소민 작가다. 작가는 누가 뭐라 해도 좋은 콘텐츠를 만나면 창작 욕심이 생기기 마련이다.

도시를 찾는 이들은 다른 지역과 차별화된 이야기를 원한다. 도시 이야기를 찾고 하나하나 엮는 일은 작가의 몫이다. 지역에 작가가 지속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생태계가 마련될 때 도시도 더 많은 이야기를 품고 경쟁력을 가질 수있지 않을까.



글 황훈주 사진 황훈주 한소민 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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