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글의 힘으로 세상에 맞설 수 있는 한 내 힘은 가공할만 하다

내 글의 힘으로 세상에 맞설 수 있는 한

내 힘은 가공할만 하다

영화 <마틴 에덴>

영화 <마틴 에덴>은 동경하는 세계로 여행을 떠나는 이들에게 건네는 쓸쓸한 인사다. 1935년 10월 1일에 개관해 국내에 유일하게 남은 단관 극장인 광주극장에서 <마틴 에덴>을 상영했다. 2020년에 나온 영화 <마틴 에덴>은 잭 런던의 1909년 소설 『마틴 에덴』의 내용을 각색했다.


세상에 맞서 자유를!

영화는 선박 노동자였던 마틴 에덴이 우연한 기회로 상류층 가문의 딸 엘레나와 사랑에 빠지며 시작한다.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그는 엘레나를 바라보며 “오직 당신처럼 말하고, 당신처럼 생각하고 싶어”라고 고백한다. 조금 우습게도 성공하기 위해 마틴 에덴은 작가가 되기로 한다. 그때는 그랬다. 잡지에 원고가 실리면 고액의 원고료를 받을 수 있었다. 부럽다.

영화의 후반부, 마틴 에덴은 작가로 성공한다. 엘레나는 집안 반대를 무릅쓰고 마틴 에덴을 찾아온다. 과연 마틴 에덴은 행복한 결말을 맞이할까. 그리워하던 엘레나를 만난 순간, 마틴 에덴은 창가 너머로 자신의 환영을 본다. 그 환영은 그가 처음 엘레나를 만나 책을 읽기 시작했던 순간의 자신이다. 성공한 삶에서 과거의 자신에게 어떤 할 말이 있는지 그는 환영을 따라간다. 그는 과연 어떤 말을 건네려 했을까? 영화는 작가의 삶을 막 시작한, 글쓰는 마틴 에덴의 모습이 나오며 시작한다. 그가 쓴 글은 그의 운명을 암시한다.

“그리하여 세상은 나보다 강하다. 그 힘에 맞서 내가 가진 건 나 자신뿐이지만, 어찌 보면 그건 대단한 일이다. 다수에 짓눌리지 않는 한 나 역시 하나의 힘이며, 내 글의 힘으로 세상에 맞설 수 있는 한 내 힘은 가공할만하다. 왜냐하면 감옥을 짓는 자는 자유를 쌓는 이보다 자신을 표현할 수가 없다."

<마틴 에덴>과 샤를 보들레르

영화에서 마틴 에덴이 보는 책 중 명확히 나타나는 책은 두 권이다. 하나는 샤를 보들레르의  『악의 꽃』이며 또 하나는 허버트 스펜서의 『제일원리』다. 마틴 에덴이 엘레나를 만나고 상류층의 삶을 꿈꿀 때 만나는 책이 『악의 꽃』이며 작가의 삶을 고민할때 만나는 책이 『제일원리』다. 따라서 영화의 서사는 샤를 보들레르가, 그 서사 속 마틴의 행동은 허버트 스펜서가 결정한다.

영화를 보며 『악의 꽃』 중 「여행」의 서사를 닮았단 생각이 든다. 여행을 꿈꾸는 아이에게 온갖 여행을 마친 자가 대화하는 형식의 「여행」은 이렇게 시작한다.

“지도와 판화를 사랑하는 아이에게  우주는 그의 광막한 식욕과 맞먹는다.  아! 세계는 등불 아래서 얼마나 큰가!  추억의 눈에 비치는 세계는 얼마나 작은가!”

마틴은 처음 엘레나를 만나고 그녀의 집에서 본 모든 것을 동경한다. 그는 그녀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고 싶어하는 여행자다. 그런 그에게 루스 브리센덴이 나타난다. 「여행」의 여행을 꿈꾸는 아이가 마틴이라면 루스 브리센덴은 여행을 마치고 그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자다. 글로 성공하겠다는 마틴에게 루스 브리센덴은 ‘진짜 기자’를 보여주겠다며 어느 신문사로 마틴을 인도한다. 마침 신문 기자는 기사의 제목을 적고 있다. 기사 제목은 ‘암살의 시대’. 엘레나 저택에서 즐거운 파티가 있는 밤동안 고용주에게 반기를 든 노동자들은 살해 당했다. 마틴이 꿈꾸는 세계에 사는 사람은 마틴이 사는 세계 사람을 탄압한다. 루스 브리센덴의 등장은 마틴이 꿈꾸는 세계에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운명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여행」에 나오는 여행자가 마지막에 ‘지겹다’고 표현한 것처럼 말이다.

여행의 끝은 언제나 아름다울까?

마틴은 고용자와 노동자의 대립된 사회 속에서 스펜서의 『제일원리』를 탐독한다. 그리고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갈등 속에서 개인주의를 주장한다. 그가 개인주의를 선택한건 어쩌면 필연일지도 모른다. 자유로운 경쟁 속에서 개인의 존엄성도 지키고 싶은 마음은 여행자가 새로운 여행지를 동경하면서도 언젠가 다시 돌아갈 고향집을 그리워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는 사회주의자에겐 자유주의자의 노예라며, 엘레나 가족에겐 열렬한 사회주의자로 찍혀 외면당한다. 그가 도달하고 싶었던 세계에 마틴이 의견을 낼 자리는 없다. 그의 지식은 정식 교육과정이 아닌 그저 선상에서 책으로 배운 지식이라며 무시한다. ‘문법’은 견고하다. 기득권이 만든 규칙과 순서를 따라야 한다. 엘레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싶다는 마틴에게 엘레나는 문법을 배우라고 했지만 문법으로 이뤄진 사회는 개인의 노력으로 갈 수 없다. 그곳은 기득권층에 의해, 대중에 의해 선택되는 곳이다. 벽을 만난 마틴은 절망한다. 슬퍼하는 마틴의 모습과 함께 배가 가라앉는 푸티지 영상이 지나간다. 그가 꿈꾸던 세상은 가라앉는다. 그리고 그렇게 망가진 마틴의 원고에 관심을 갖는 잡지사가 나타난다.

자유가 꺾인 세상은 감옥

영화 마지막 30분은 작가로 성공했지만 괴로워하는 마틴을 보여 준다. 그의 글은 사회주의자와 자유주의자 모두에게 읽힌다. 그들은 각자 자신이 생각하는 방식대로 그의 글을 소비한다. 목적지를 잃어버린 마틴은 사회 속에 휩쓸린다. 작가로 성공을 이뤘지만 그가 도착한 곳은 마틴이 상상했던 곳이 아니다. 그가 쓴 글은 자신이 쌓는 감옥이 된다. 자신의 의도는 철저하게 대중 입맛에 맞게 각색된다.

발터 베냐민은 샤를 보들레르를 자본주의 병균에 최초로 감염된 숙주로 보았다. 감독이 원작 소설에선 스윈번으로 나오는 시인을 보들레르로 바꾼 이유다. 허버트 스펜서도 개인주의자였지만 그의 이론은 양육강식에 따라 제국주의를 옹호하는 근거가 되었다. 모든 개인은 사회 속에 휩쓸린다. 보들레르의 「여행」은 이렇게 끝난다. 

“저 심연의 밑바닥으로 빠져들기에 지옥이건 천국이건 무슨 상관이냐? 모르는 것의 심연에서 새로운 것만 찾아낼수 있다면.”

보들레르 시 속 여행을 끝낸 자는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찾지 못하고 절망한다. 세상은 지겹다며 ‘죽음이여 어서오라’라고 외친다. 더 나은 것을 찾아 떠난 여행이지만 그곳에도 새로운 것은 없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이 끊임없이 자유를 갈망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유로부터 벗어나려 한다고 주장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유는 끊임 없는 투쟁의 자유다. 끊임 없는 투쟁이 지칠 때 개인은 권위에 자유를 반납한다. 에리히 프롬은 이런 자본주의 사회 문제를 지적하면 개인이 실존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마틴 에덴이 영화 초반부에 썼던 글을 상기하면 개인이 사회 속에서 실존하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아픔이 존재할지 영화를 통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광주 극장

영화가 끝나고 광주극장을 둘러 봤다. 지하1층, 지상 4층인 광주극장은 관람석도 2층까지 보유하고 있다. 건물을 둘러보다 광주극장연대기를 정리한 장소를 만날 수 있었다. 광주극장 설립자는 1891년생 최선진이다. 그는 여객 운송과 대흥정미소를 운영하는 사업가였지만 한편으론 광주보통학교를 설립해 일제 교육에 대항했다. 광주극장은 일본인이 운영하는 영화관에 대항하여 광주 지도자들이 모여 만든 극장이다. 극장 위치도 의도적으로 조선인 거리에 있어 판소리와 창극 프로그램도 진행하며 풀뿌리 야학의 중심이 되었다. 단순히 영화 상영하는 곳이 아닌 지역민의 자부심이 담긴 문화공간이다. 1935년 10월 1일,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조선 제일의 대극장’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곳이다. 

이렇게 의미 있는 공간도 시대의 흐름을 피해갈 순 없었다. 현재 정부 지원 없이 후원 회원제로 운영하는 광주극장이다. 독립예술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은 입장 수입만으론 극장 유지가 어렵다. 그럼에도 아직 극장이 존재하고 있다는 건 시대 흐름과 싸우며 자신이 사랑하는 공간을 지키는 이들이 함께 존재한다 의미다.


글 사진 황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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