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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밀한 계획주의자의 여유로움
치밀한 계획주의자의 여유로움
바이닐042 고진성 대표
낯선 이에게 익숙함을 느낄 때가 있다. 예술을 하고 싶었던 내 친구는 회사원이 되었다. 고진성 대표와 이야기를 나누며 옛 친구를 생각했다. 자유로운 뽀글머리와 새로운 가능성에 눈을 반짝인 그는 내 친구의 과거와 닮았다.
1.
“저도 어쩌면 영끌족이에요. 남들은 영혼까지 끌어모아 사고 싶은 걸 산다는 데, 저는 잔뜩 대출받아 이 공간을 마련했죠.”
결국 빚내서 장사한다는 건데 고진성 대표는 시원하게 웃었다. 현재 그가 영혼까지 끌어모아 마련한 바이닐042 카페는 스카이로드 근처에 있다. 그가 꿈꾸는 공간은 전시, 공연, 원데이 클래스, 플리마켓, 매거진 출판이 함께 이뤄지는 공간이다. 카페라기보다는 그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무대라고 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공간은 매력적이다. 부산까지 찾아가 섭외한 작가 작품으로 벽면을 채웠다. 이 공간에서 늘 새로운 작가 작품을 전시하고 판매할 예정이다. 음료를 주문할 수 있는 매대 끝엔 디제잉 부스와 다양한 LP판이 서로 마주 보고 있다. 의자는 스케이트보드에 바퀴를 빼 만들었고 카페 문고리는 의자로 쓰는 스케이트보드에서 빼 왔을 것 같은 바퀴를 달았다. 이곳엔 금요일마다 젊은 래퍼들이 공연하고, 한 달에 한 번 댄서들이 모여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 자유분방한 공간인 만큼 고진성 대표는 천성 예술가의 길을 걸었을 것 같은데 의외로 그의 전공은 패션, 심지어 일본 유학파다.
“죽기 전, 창업을 해 보고 싶었어요. 코로나19가 터졌을 때 회사를 그만두었어요.”
창업은 그의 꿈이었다. 스스로 브랜드 하나를 만들고 싶었다. 서울에서 대학을 나와 1년 정도 회사를 다니다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아직 배움이 채워지지 않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떠난 곳은 도쿄 문화복화학원. 패션으로 유명한 대학이다. 27살이었다.
“일본으로 유학을 간 거면……, 일본어를 원래 할 줄 아셨어요?”
“아니요. 가서 배웠죠.”
회사에 적응하려고 노력해야 할 시기에 그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패션 기획을 전공했는데도 옷을 직접 만들어야 했어요. 한 학기 동안 가상 브랜드를 설립하고 옷을 만들어 마지막엔 제품 설명까지 했죠. 수업이 엄격해요. 옷을 만들 때 1mm라도 오차가 있으면 다시 만들어야 했어요.”
그렇게 배운 실력은 졸업 후 바로 써 먹을 수 있었다. 서울에 돌아와 외국계 의류 회사에 취직했다. MD로 일했지만 디자이너 팀에서 부르는 일도 많았다. 옷을 직접 만든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바쁘게 다녔다. 옷 디자인부터 공장관리까지 회사 전반을 다 훑었다.
“MD는 ‘뭐든지 다 한다’의 약자니까요.”
회사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그리고 코로나19와 함께 회사를 그만뒀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던 코로나 시기는 그에게 창업의 꿈을 부추겼다. 창업 지원 받을 수 있는 길도 많았다. 지원 사업을 받기 위해 사업계획서를 작성했다. 사업 아이템은 마스크 귀 보호대다. 제품 생산은 어렵지 않았다. 회사 생활하며 알고 지낸 공장 사장님들이 많았다. 현장 경험이 도움이 되었다.
2.
고진성 대표는 10년마다 목표를 세운다. 20대는 사람을 많이 만나기로 했다. 사람에게 돈 쓰는 걸 아까워하지 않았다. 친구들에게 사 주기도 잘 사줘서 돈은 매번 부족했지만 괜찮았다. 그렇게 다양한 사람을 만났고 다양한 곳을 돌아다녔다. 빵 한 조각으로 생활하며 유럽 배낭여행도 떠났지만 가장 인상 깊은 이야기는 그의 국내 무전여행 이야기다. 보통 무전여행이라 하면 최대한 돈을 쓰지 않기 위해 게스트 하우스에서 일을 도우며 숙식을 해결하거나 밥을 굶으며 이동하는데 고진성 대표는 여행 출발하는 날 동대문 시장에서 액세서리 20만 원어치를 샀다. 무전여행은 돈 없이 시작하는 여행이지만 끝까지 가난하란 법은 없다. 길거리에서 액세서리를 팔며 전국을 누볐다. 한 번에 20만 원어치를 팔 때도 있었고, 한 푼도 못 벌 때도 있었다. 돈을 번 날엔 신나게 놀았고 돈을 벌지 못한 날엔 춥게 잤다. 어쩌면 지금 그의 자신감은 20대 시절,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끊임 없이 도전하며 학습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웬만한 건 컴퓨터 한 대로 해결할 수 있다고 한다. 그는 디자인부터 영상 촬영까지 모두 문제 없다. 최근엔 뮤직 비디오 촬영도 하나 맡았다. 대학생 때도 다들 아르바이트할 때 프리랜서로 일했다. 대학교 때 만난 선배 덕분이다. 대학 선배 네 명이 같이 뭉쳐 다녔다. 각자 사진 촬영, 일러스트레이터, 프리미어, 웹 디자인을 할 줄 알았다. 그 선배들 따라다니며 일을 배웠다.
그렇게 20대엔 사람을 만나고 다녔다면 30대엔 배운 것을 활용하는 시기였다. 고진성 대표는 창업을 하기위해 적당한 동네를 찾다 대전에 자리 잡았다. 아버지는 군인이셨다. 어린 시절, 아버지 따라 어려곳을 다니며 지냈다. 그중 계룡에 대한 추억이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전이 지원사업 경쟁률이 낮았다. 처음엔 둔산동에 사무실을 차렸다. 사무실엔 컴퓨터 한 대만 놓았다. 컴퓨터 한 대만 있으면 쇼핑몰 운영이 가능했다. 마스크 귀 보호대 쇼핑몰을 만들어 지금도 운영 중이다.
3.
“우리만의 FM을 만들려고 해요.”
고진성 대표는 한없이 자유로운 영혼일 것 같지만 그 자유로움을 가능케 하는 건 확신이다. 그는 모든 계획과 활동을 파일로 정리한다. 생각과 계획을 정리하고 카페에서 함께하는 직원들 스케줄도 정리해 함께 공유한다. 마음대로 하루를 보내는 것 같지만 계획 속에서 움직인다. 카페는 넷이 함께 운영한다. 출근 시간도 퇴근 시간도 자유다. 다만 그 계획은 공유 캘린더에 공유해야 한다.
바이닐042 카페가 문을 연 후 다양한 이벤트가 계속되었다. 지난 3개월 동안엔 20개 이벤트를 열었다. 전시, 공연, 플리마켓, 매거진 출판 등 다양한 사업을 어떻게 다 감당하나 싶지만, 그는 그저 서로 하고 싶은 걸 하기에 가능하다고 한다. 독립 매거진은 어느덧 3호까지 만들었다. 글 쓰고 싶은 청년들이 모여 대전에 재밌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벤트는 누가 주도해 기획하는 것이라기보단 이 공간에 모인 이들이 함께 만든다. 고진성 대표도 가끔은 카페에 온 손님에게 이벤트를 제안하기도 한다. ‘손님. 혹시 원데이 클래스 열어보지 않을래요?’
애초에 대전이 ‘노잼’이란 단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타지인 시선으로 보았을 때 대전엔 끼 많은 청년이 많았다. 그들은 단지 무대가 없어서 놀지 못하는건 아닐까 생각한 그다. 바이닐042 카페를 만든 이유도 청년들에게 무대를 만들어 주자는 생각이었으니 지금까진 목적에 충실하게 운영 중이다. 최근엔 자기 재능을 뽐내고 싶은 청년들이 많이 모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진로 상담도 함께 하게 되었다.
“서울로 올라가는 친구도 많지만 그 중에 오래 버티지 못하고 다시 내려오는 친구도 많거든요. 올라가서도 경쟁력 있을 수 있도록 도움이 되면 좋겠어요.”
고진성 대표가 프리랜서 생활을 했기에 그동안 경험을 살려 여러 조언을 해 준다. 작품 가격 흥정하는 방법, 계약하는 방법 등 당장 적용할 수 있는 것들을 말이다.
고진성 대표는 30대엔 ‘다양한 파이프라인’을 만들 계획이라고 한다. 다양한 사업을 키워나갈 계획이다. 쇼핑몰도 운영하고 카페도 운영하고, 젊은 청년들의 꿈도 가꿔주는 그다. 바이닐042는 그에겐 시작이지 끝이 아니다.
“저는 스스로 갇히게 될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워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서로 이야기 나누는 것이 좋다는 그는 지금도 계속 나와 관점이 다른 사람은 그 이유가 무엇일지 스스로 질문한다. 내년, 내후년엔 창업대학원에도 가고 싶다. 나이는 이제 31살. 40살엔 청년 창업을 도와주는 엑셀러레이터가 되고 싶다는 게 그의 계획이다.
4.
그와 만난 후 내 친구를 생각했다. 어쩌면 내 친구에게 필요했던 건 재능이 아니라 계속 앞으로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과 자기 확신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신은 근거가 필요했다. 고진성 대표가 계속 스스로 도전하며 자신감을 키웠듯, 끊임없이 배우고 배운 내용을 정리했듯 말이다. 문을 나서는 길에 문득 궁금증이 하나 생겼다.
“근데 어떻게 카페에 LP판이랑 디제잉 부스를 놓을 생각을 했어요? 음악을 따로 배운 적 있었나요?”
“일본에서요. 유학 생활 동안 디제잉을 배웠거든요. 집 근처에 지하 펍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일본 DJ들의 등용문 같은 곳이더라고요. 일본이 또 LP 시장이 좋다 보니 LP도 많이 볼 수 있었고요.”
그 외에도 고등학교 땐 밴드부, 기타에 플롯에 피아노도 연주할 줄 안다는 그의 얘기는 더 듣지 않아도 됐다. 한없이 자유로울 것 같은 그는, 사실 그 누구보다 치밀하게 경험을 바탕으로 움직이는 탐험가였다.
글 사진 황훈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