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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이후로도 70여 번의 동백이 피었다
그 날 이후로도
70여 번의 동백이 피었다
전시 《동백이 피엄수다》
동백은 홀로 겨울에 꽃을 피운다. 하얀 눈 위에 떨어진 동백은 선명하다. 동백이 지니 봄은 온다.
2022년 6월 28일부터 7월 23일까지 대전근현대사전시관에서 ≪동백이 피엄수다≫전시를 진행했다. 전시 리플렛엔 전시 소개 글이 있다.
“이 전시가 잘못된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걸음걸음에 작은 빛이 되기를 바라며 제주 4·3과 여순항쟁 희생자들께 작은 위안이 되기를 바랍니다.”
제주 4.3과 여순항쟁
“4·3은 반세기 가까이 이념적 누명을 쓰고 지하에 갇혀 있었다. 1980년대까지도 고등학교 교과서에 4·3은 ‘북한 공산당의 사주 아래 일어난 폭동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중략) 4·3희생자를 위령하는 추모제를 지내려 해도 경찰은 최루탄을 쏘며 참석자들을 연행했다. 그렇게 4·3은 오랜 기간 동안 함부로 말하면 안 되는 금기어였다.”
(4·3평화기념관 핸드북 <한눈에 보는 4·3> 중에서)
1947년 3월 1일 오후 2시 45분, 제주도 3·1절 기념행사날. 경찰은 군중을 향해 총을 겨눈다. ‘통일독립 전취하자!’는 슬로건으로 3만 명이 모인 날이었다. 기마경관이 탄 말이 어린아이를 쳤다. 기마경관이 그대로 가려 하자 주변 구경꾼들이 돌을 던지며 항의하는 순간 총탄이 날아왔다. 이날 민간인 6명이 숨졌고, 8명이 총상을 입었다. 사망자엔 초등학생, 갓난아기를 안은 여인도 있었다. 제주 4·3항쟁은 이날을 기점으로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통행금지가 전면 해제될 때까지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이 일어나고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제주도민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2003년 정부 보고서인 ≪제주 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4·3사건 인명피해를 2만 5천여명으로 추정했지만 2021년 4·3위원회에서 결정한 희생자 숫자는 14,533명이다.
제주도 3·1절 기념행사날 사건 이후 미군정과 경찰은 사과 대신 시위 주동자를 잡아들였다. 이에 분노한 제주도민은 민·관 합동 총파업으로 맞선다. 이런 상황 속 미군정은 제주도를 ‘레드 아일랜드’로 부르며 이 상황을 이념 문제로 해석한다. ‘빨갱이 사냥’ 구실로 고문치사 사건이 잇달아 일어났다. 미군정의 탄압은 심해졌다. 이에 1948년 4월 3일, “탄압에 저항하고 통일국가 건립을 가로막는 5·10 단독선거를 반대한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제주도민 무장 투쟁이 일어난다. 남한 단독 선거는 한반도가 갈라지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게 제주도는 미군정이 실시한 5·10 단독선거에서 전국 200개 선거구 가운데 유일하게 투표율 50%를 넘기지 않아 선거를 거부한 지역으로 남았다. 5·10 선거 무산 이후 주한미군사령관은 미군정 브라운 대령을 제주총사령관으로 임명한다. 그는 “나는 원인에는 흥미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 뿐”이라며 선거에 방해가 된다는 명분으로 제주도 청년들을 잡아들였다. 이승만 정부 수립 후엔 더욱 탄압이 심해졌다. 제주도 진압을 위해 10월 11일엔 군 병력을 제주에 증파하였다. 10월 17일 포고문이 발표된다.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상 들어간 중산간 지대에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11월 17일 제주도 지역에 계엄령이 내린다. 1948년 10월 말부터 1949년 3월까지 약 5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참혹한 집단 살상이 행해졌다. ‘빨갱이’라는 이름 아래 살상이 이뤄졌고 이 꼬리표는 한국 전쟁에도 이어져 정치범으로 불법 처형되기에 이른다. 수 많은 민간인이 학살 당했다.
≪동백이 피엄수다≫ 전시에 참여한 정기엽 작가는 ‘작가 노트’에 이렇게 썼다.
“4·3은 마치 범신론과 같다. 세상 어디에나 신이 서려 있어 신이 아닌 것이 없듯이 제주에는 4·3이 피해 간 곳이 거의 없는 듯하다.”
동백이 피엄수다
“2021년에 4·3특별법 개정과 여순특별법이 제정되었어요. 제주 4·3과 여순은 형제 사건으로 규정되어 있는 항쟁이죠. 이번 전시를 통해 함께 가자는 의미로, 아직 다 밝혀지지 않은 여순의 진실을 열어가는 마음으로 이번 전시 제목을 지었습니다.”
전시실에서 박진우 4·3 교육 강사를 만날 수 있었다. 오후에 성모여자고등학교에서 견학 와 전시를 설명해 준 후였다. 4·3과 여순은 함께 한 역사다. 1948년, 정부는 제주 진압을 위해 제주 밖 군대를 데려왔다. 이때 제주에서 가장 가까운 전라남도 14연대에서 제주 출병을 거부한다. 출병 거부 후 입산을 했는데 이때 입산 경로가 여수, 순천 지역이었다. 진압군은 반란군 색출 명분으로 주민을 모았고, 좌익 세력 색출이란 명목으로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 이것이 여순 사건이다. 4·3은 한국 근현대사의 아픔만 모아 놓은 것 같다. 남북 분단과 이념 갈등, 한국 전쟁의 상처가 응축되었다. 전시 이름 ‘동백이 피엄수다’는 이제 막 동백꽃이 피어나고 있음을, 다시금 봄이 오길 기다리는 마음이다. 4·3과 여순은 현재 진행형이다.
“제주 4·3은 진실 규명이 어느 정도 이뤄졌어요. 명예 회복이 이뤄지고 있죠. 하지만 아직 배·보상을 통한 명예 회복은 이뤄지지 않고 있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문제가 있어도 배상이 있는데 국가가 민간을 상대로 한 일에도 배·보상이 있어야 하겠죠.”
들여다 볼 수록 아픔만 서린 사건인데 전시실에 걸린 작품은 이 이야기를 어떻게 전하고 있을까.
“예술이 좋은 건 자신만의 느낌을 얻을 수 있다는 거죠. 아이들이 전시를 보고 ‘재밌다’고 표현하기도 해요. 저는 그것도 좋다고 봐요. 작품을 즐겁게 즐기고, 그 의미를 생각하면서 사건을 기억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요.”
전시하기까지 3년이 걸렸다. 먼저 스토리 작가를 구했다. 4·3의 이야기를 담기 위해서다. 그 후에 작가를 모집했다. 작품을 통해 4·3을 볼 수 있도록 서로 모여 회의와 토론이 이어졌다. 그렇게 11명의 작가가 함께했다. 각 이야기에 맞는 작품을 구성했고 때론 스토리 작가가 작가와 소통하며 작품 방향을 맞추기도 했다. 작품은 설치 미술부터 영상, 사진, 그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전시 준비만큼 마음도 깊어져 작가들은 시간이 될 때 전시실에 나와 작품 속 이야기를 설명해 준다. 도란도란 이야기 소리가 들리는 전시다.
“제겐 이건 숙제와 같아요.”
박진우 교육 강사는 참여 정부 시절 5년 동안 청와대에 있었다. 모든 기록을 맡아 정리했다. 서거 기록도 직접 정리한 그였다. 기록을 모두 정리한 후 무엇을 해야 하나 돌아보니 4·3이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제주도를 방문해 4·3 유족들에게 국가권력의 잘못을 인정, 공식 사과한 대통령이다.
그는 전시실에 있는 작품 하나 하나 이야기를 전해줬다. 그러면서 정기엽 작가 또한 처갓집이 4·3 사건 유족임을 알게 되었다.
박진우 4.3 교육 강사
4.3과 대전 산내 골령골
3전시실엔 대전 산내 골령골 현장 사진을 볼 수 있다. 임재근 작가 작품이다.
“발굴 현장에 가 보면 탄피가 유해 가까이에서 발견 되요. 총을 가까이서 당겼다는 걸 알 수 있죠. 무기는 국민이 보호 받을 수 있게 국가에게 맡긴 것인데 그 무기 총구를 국민에게 겨눴어요. 유골을 보고 있자면 표정이 나타나진 않지만 슬픔과 고통이 느껴져요.”
미군이 남긴 ≪한국에서의 정치범 처형≫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서울이 함락되고 난 후, 형무소의 재소자들이 북한군에 의해 석방될 가능성을 방지하고자 수천 명의 정치범들을 몇 주 동안 처형한 것으로 우리는 믿고 있다 (중략) 이러한 처형 명령은 의심할 여지 없이 최고위층에서 내려온 것이다. 대전에서 벌어진 1,800여 명의 정치범 집단학살은 3일간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1950년 7월 첫째 주에 자행되었다.”
대전 형무소엔 제주 4·3 수형자 300여 명과 여순 사건 수형자가 있었다. 대전 형무소는 대규모 정치범 수감시설이었고 열차를 이용해 대규모 압송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대전에 임시 군법재판소를 만들어 이들 중 절반 이상이 사형 선고를 받는다. 산내 골령골은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으로 불린다.
“대전 형무소 망대를 찍으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불의에 저항했던 사람들이 많이 끌려 온 곳이니까요. 일제 강점기엔 독립운동가들이 범법자로 들어왔고, 4·3 수형자도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저항한 저항자였어요. 또 여순 사건 군인들은 동포 학살을 거부한 자들이었죠.”
전시장을 나오며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에 나온 글이 생각났다.
"정신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 그리고 마침내 지상에서 인간성을 실현하기 위해서, 카스텔리오가 칼뱅에 맞서 싸우면서 그랬던 것처럼 폭력을 쓰지 않고 폭력을 당했던 사람들이 진짜 영웅임을 기억해야 한다."
불안한 시대엔 내 것과 네 것을 나누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사람이 사람으로 존재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골녕골의 켜켜이 쌓인 뼈 사진이 머릿속을 맴돈다. 또다시 같은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임재근 작가는 대전 산내 골령골 현장 사진을 전시했다
글 사진 황훈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