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컨트리 음악 메카 '팔로미노' 40년 세월을 마무리하다.

대전 컨트리 음악 메카 '팔로미노'

40년 세월을 마무리하다.

1.

늦은 밤이나 새벽까지 영업한 공간으로 이어진 계단에는 보통 진한 흔적이 남는다. 그 느낌은 찐득하고 나른하며 달큰하다.
라이브 카페 ‘팔로미노’에 오르는 계단은 이제 버석거릴 만큼 건조했다.  3층까지 천천히 계단 하나하나를 밟았다. 수십 년 동안 계단에 들러 붙었을 흔적은 벌써 희미해지는 듯했다. 계단참에 붙은 포스터와 각종 홍보물은 그곳에 머물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는 사실을 아는지 뾰로통하다.
팔로미노가 처음 문을 연 건, 1983년이다. 많은 사람이 모이던 중구 대흥동에 자리 잡았다. 올해 6월까지 팔로미노가 있었던 중교로 길가는 아니었다. 한 블록 더 안쪽으로 들어간 공간이다. 그 건물은 40년 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았다. 얼마 전 ‘한가로와’라는 카페가 새로 문을 열었다. 1층도, 완벽한 2층도 아닌 1.5층이다
“당시는 지금과 같은 카페가 유행하기 전이었어요. 대신 음악다방이 있었죠. 가게에 조그만 DJ박스가 있고 종업원이 지나갈 때 듣고 싶은 음악을 종이에 적어서 주면 DJ박스에서 음악을 틀어 줬어요. 잘하는 DJ는 방송국에 스카우트 되기도 했고요. 팔로미노는 음악다방이 아니라 카페였어요. 사이폰으로 커피를 내렸죠."
1983년, 팔로미노는 대전에서 특별한 사이폰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카페였다. 물을 끓여 압력차를 이용해 커피를 내리는 기구인 사이폰은 흡사 과학실 실험도구를 닮았다. 끓기 시작한 물이 위로 올라갔다가 커피를 머금고 다시 내려오는 모습은 커피추출을 기다리는 동안 지루할 틈을 주지 않았다. 팔로미노를 유명하게 만든 건 비단 맛 좋은 사이폰 커피 때문만은 아니었다.

대전에서 라이브 카페 팔로미노 문을 연 이는 컨트리 가수 이정명 씨다. 컨트리 가수로서 화려하게 세상에 데뷔한 직후였다. 이정명 대표는 1980년, 미국 내슈빌 팝 페스티벌(MCSF,  Music city song festival, Nashville pop festival)에서 상을 받는다. 컨트리 뮤직 작곡 부문이었다. ‘심슨부인의 늦바람(Mrs. Simpson’s late love)’이라는 곡이었다. 재즈와 블루스가 흑인이 감내해야 했던 고단한 삶과 마음을 반영한 음악이라면, 컨트리 음악은 미국 백인 삶의 감성을 담은 음악이다. 미국에서 이런 컨트리 음악을 도시 상징으로 삼은 곳이 바로 테네시주 내슈빌이었다. 이정명 대표는 그곳에서 열린 뮤직 페스티벌에서 동양인 최초로 상을 받았다. 우리나라 경기도에서 개최한 민요 대회에서 파란 눈동자를 지닌 백인이 상을 받은 셈이다. 당시에는 일대 사건이었다.
1982년 이정명 대표는 첫 앨범 을 발표했다. 이어 1984년에는 미국에서 2집 앨범을 녹음한다. 당시 김창완과 왕영은이 진행을 맡았던 KBS<연예가중계>에서 ‘컨츄리 리듬 본고장의 충격_ 이정명의 내쉬빌 진출_’이라는 제목으로 이 소식을 전한다. 밥 딜런이나 케니 로저스, 클랜갬블처럼 이름만 들으면 알 수 있는 가수의 앨범 제작에참여한 연주자들과 함께 앨범을 제작했다는 내용이었다. 대흥동에 문을 연 팔로미노는 사이폰 커피를 즐기고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 부르는이정명씨를 만날 수 있던 공간이었다.

2.

가수 이정명씨는 방송과 공연 활동을 위해 서울에도 거주지를 마련하고 대전과 서울에 오가며 바쁜일상을 보내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대전 MBC에 오덕균 PD라고 있었어요. 당시 연예가에서는 유명한 분이었죠.  <젊음이 있는 곳에>를 연출했던 분이에요. 그분이 ‘이정명씨가나와 함께 일하면 대전을 정말 컨트리 음악도시로 만들 수 있도록 열심히 돕겠다’라고말 하더라고요. 그래서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대전에오게 되었죠.”

1990년 무렵 얘기다. 연예가에서 방송국 PD가 미치는 영향이 막강했던 시절이다. 이정명 씨는 대전을 컨트리 음악도시로 만들고 싶다는 꿈이 있었다. 지금도 포기할수 없는 꿈이다. 대전과 내슈빌을 더 해 ‘대전빌’이라는 이름으로 이런 그의 마음을 표현했다. 당연히 그 중심에 라이브 카페 팔로미노를 놓았다. 그즈음 서울에서 <쇼2000>이나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자니윤 쇼>등 방송 활동도 활발하게 할 때였다. 오히려 대전에서 왔다 갔다 하지 말고 서울에 아예 올라오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이정명 씨는 활동 공간으로 대전을 선택했다. 팔로미노를 찾는 손님도 많았고 초등학교 시절부터 자란 도시 대전을 한국의 컨트리 음악 성지로 세상에 드러내고 싶었다.
이정명 씨가 대전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면서 팔로미노는 대전에서 가수를 꿈꾸는 많은 사람이 서고 싶은 무대가 되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는 미국과 캐나다 등 외국에서도 프로와 아마추어 뮤지션이 찾아와 팔로미노 무대에 섰다. 1990년대 후반, 이정명 대표가 우송대학교 방송 음악과 전임교수로 재직할 때는 같은 과 교수들도 무대에 섰다. 1952년생으로 이정명대표의 용띠 친구들인 엄인호나 이광조등도자주 찾았다. 당시 라이브 무대를 녹음해 둔 카세트테이프도 잔뜩 가지고 있다. 팔로미노 건물 지하에 있던 연습실에는 많은 뮤지션이 모여 꿈을 키웠다. 가수 손근섭, 권태봉, 신승훈이나 홍성수 등도 이곳을 거쳤다. 팔로미노 무대에 서고 싶은 가수 지망생 요청으로 오디션도 일상적으로 열렸다. 대전 대중음악사를 쓴다면 빼놓을 수 없는 공간인 셈이다.빼“2004년 즈음에 일본에서 손님이 한 5년간 매년 왔어요. 60명이 리무진 버스 두 대에 나누어 타고요. 매번 크리스마스이브 전날인 12월 23일에 왔죠. 일본 팬덤 문화가 대단하잖아요. 신승훈 팬들이었는데, 좋아하는 가수를 파고들다가 대전을 찾고 저에게까지 온 거죠. 저를 ‘마스터'라고 부르더라고요. 일본에서 손님이 찾아오면 노래 두세 곡 정도 불러 주었어요.” 

3.

팔로미노가 중교로 길가로 옮겨 새롭게 문을 열었다. 1999년 건물을 지어 12월에 문을 열고 바로 21세기를 맞이했다. 처음 문을 연 곳과 새롭게 문을 연 곳은 모두 예전 묘향여관 주차장이었던 곳이다.  묘향여관 본관 건물은 지금 패밀리요양병원(전 패밀리관광호텔)이 주차장으로 사용하는 터에 있었다.

묘향여관은 이정명 씨 어머니가 운영하던 곳이다. 묘향은 남도창을 했던 어머니 아호다.

“1960년대부터 대전과 서울에서 활동하는 유명한 화가나 화상이 여관에 많이 찾아왔어요. 연정 선생과 제자들도 자주 왔고요. 기산 정명희, 임립, 박봉춘 선생이나 김철호 화백 등이 왔던 걸로 기억해요. 남농 허건, 금추 이남호, 청당 김명제 같은 한국화 대가도 묘향여관 특실이나 별실에서 몇 달씩 머물면서 작업하곤 했죠.” 

부산에서 태어난 이정명 대표는 서울을 거쳐 초등학교 2학년 때 대전에 왔다. 당시 대전사범부속국민 학교로 전학했다. 지금 대전중앙초등학교다. 음악에 관심을 둔 건 중,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AFKN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을 들으며 팝송을 접했다.

“고등학교 다닐 때 HR 시간이 있었어요. 그 시간 이면 친구들이 ‘야, 정명아 노래 한 곡 해 봐라’라고 늘 얘기했어요. 그러면 나가서 팝송을 부르곤 했죠." 

이정명 대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라벌예대 연기과에 입학했다. 문화부장관을 지냈던 배우 유인촌이 동기다. 대학에 다니며 본격적으로 가수의 꿈을 꾸었다. 작사 작곡을 하며 데모 테이프를 수없이 만들어 미국 내슈빌에 있는 프로덕션으로 보냈다. 지금처럼 통신 환경이 좋지 않았던 시절 아무 연락도 받지 못하다가 마침내 ‘모세 주니어’라는 사람에 게 회신이 온다. 이후 삶을 결정짓는 주요 장면이었다. 
라이브 카페 이름 팔로미노Palomino는 원래 머스탱, 아팔루서처럼 유명한 말 품종 이름이다. 이중 팔로미노는 미국과 캐나다 등지에서 오래전 부터 유명한 컨트리 음악 카페에서 주로 사용했다. 유명한 컨트리 가수 케니 로저스도 이 이름으로 컨트리 카페를 운영했다. 40년 전, 이정명 씨는 미국에 이 이름을 사용하는데 문제가 없는지 확인한 후에 자신이 문을 여는 컨트리 뮤직 라이브 카페 이름으로 사용했다. 그가 사진을 찍을 때마다 쓰는 카우보이모자와 함께 라이브 카페에 부여하고 싶은 색깔을 분명하게 드러낸 이름이다. 
이정명 대표가 어머니 숨결이 묻은 공간에서 40년 동안 이어 온 라이브 카페 ‘팔로미노’는 2022년 6월 29일 문을 닫았다. 건물을 통째로 넘겼다. 코로나19 상황이 결정적이었다. 시와 카메라, 오디오 등 다양한 취미 동호회 모임도 팔로미노에서 열리는 등 힘들어도 명맥을 이어 갔지만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은 극복할 수 없었다. 앞서 팔로미노를 살려 야 한다는 논의가 종종 오갔지만 어떤 영역에서도 대안을 만들어 내지는 못했다.

“아쉽죠. 안타깝고요. 미국이나 유럽,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나라도 부산이나 대구 상황이었다면 이렇게 속절없이 문을 닫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누구라도 팔로미노 명맥을 유지하겠다고 나서면 별다른 지분 요구하지 않고 열심히 돕고 싶어요.”

이정명 대표는 아쉬운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팔로미노에서 40년 동안 켜켜이 쌓아 올린 시간의 기억이 한순간에 사라진다는 아쉬움만은 아니었다. 힘들게 지켜 온 문화 예술 자산이 허망하게 사라지는 우리 도시 생태계의 허약함을 목도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팔로미노를 구성하는 수만 장의 LP판은 이미 카운터에서 사라졌고 한 쪽에 자리를 지켰던 피아노도 뺐다. 팔로미노 정체성을 만들어 낸 물건 중 하나인 탄노이 스피커도 이미 갈 곳을 정한 채 떠날 날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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