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03호]누구에게나 편안한 길 누구나 추억을 쌓을 수 있는 길

누구에게나
편안한 길
누구나 추억을
쌓을 수 있는 길
중앙로 차 없는 거리
파란색 부스가 죽 늘어서다가 조금씩 빠지는 오후 시간, 한껏 내리쬔 햇볕은 길 위에 익숙한 따뜻함을 남겼다. 오후 공기에 적절히 섞인 따스함과 조금씩 빠져나간 부스의 빈자리가 자동차가 없음을 실감 나게 한다. 사람들은 제각기 그날을 기록한다. 노란 중앙 차선을 두 다리 사이에 두고 서서 하늘을 향해 손을 곧게 뻗는다. 카메라나 휴대전화기를 한 대씩 들고 포즈를 취한다. 매일 자동차에 내주었던 길을 점령했다는 신기함이 사람들에게 기록하려는 욕구를 자극하는 모양이다.
중앙로 1.1km, 옛 충남도청부터 대전역까지 이어진 길에서 지난 10월 17일 2015년 들어 두 번째로 ‘차 없는 거리 행사’를 진행했다. 10월 19일 대전시는 보도자료를 통해 ‘약 25만여 명의 시민’이 이 길을 찾았다고 밝혔다.

차 없는 곳에 있는 것

대부분 도시는 중심부를 지나는 주요 도로에 ‘중앙로’라고 이름 붙였다. 대전 중앙로 역시, 지금의 대전 모습을 형성하는 데 많은 영향을 미친 대전역과 옛 충남도청을 한 줄로 잇는 상징적인 길이다. 이 길은 대전시의 오랜 숙제인 침체된 ‘원도심’에 속한 핵심 도로이기도 하다.
10월 17일, 2015년 들어 두 번째로 차 없는 거리 행사가 열렸다. 옛 충남도청부터 NC백화점 앞까지는 벼룩시장이었다. 인터넷 카페 등을 통해 신청한 참가자들이 집에서 가지고 나온 물건을 하나둘 자리에 깔았다. 으능정이거리는 대전아트프리마켓 페스타 팀이 거리를 꾸몄다. 목척교 아래에서는 통기타 연주, 태권도 시범 등이 펼쳐지고, 중앙시장 거리에서는 제12회 중앙시장 요리경연대회가 열렸다.
“차가 많을 땐 아이들 데리고 다니기에는 좀 복잡했죠. 고흥에 사는데 친정에 놀러 왔다가 오늘 행사한다고 해서 놀러왔어요. 평소엔 아이와 함께 다니긴 좀 복잡하거든요. 일단 교통량이 많으니까 위험하다고 느껴지고, 딱히 아이와 함께할 게 없으니까요. 지금은 볼거리나 체험할 수 있는 게 많으니까 좋아요. 주중에도 하면 좋겠어요. 다른 지역에서도 오고 재미있을 것 같은데요?”
남은우 씨의 이야기다. 은우 씨의 말대로 가족과 함께 나온 사람들은 마음껏 뛰어다니는 아이들과 거리를 즐겼다. 중앙로에 자동차만 다닐 때와는 전혀 다른 추억이 이들에게 쌓였다.

추억과 기억을 남기는 것

1.1km, 중앙로를 천천히 걸으며 차 없는 거리 행사가 열리던 날 철거를 시작한 노량진 육교가 떠올랐다.
1980년 9월 준공해 35년간 노량진역과 학원가를 연결한 노량진 육교를 지난 10월 17일부터 18일까지 철거했다. 많은 매체에서 ‘노량진 육교’를 다루며, 그날 한참 동안 노량진 육교를 바라보던 시민의 이야기를 전했다.
사람들은 육교 위에서 보낸 젊은 시절을 추억했다. 노량진 육교라는 콘크리트 덩어리는 단순한 ‘육교’가 아닌 사람들의 추억과 기억이 담긴 곳이었다. 그 길을 건너며 했던 생각, 그 길을 거닐던 수많은 발길만큼이나 묻어난 자신의 시간이 육교 위에 스며들었을 것이다. 갑자기 노량진 육교가 떠올랐던 건 도시에서 사람들에게 추억을 남기는 곳 대부분 발길이 닿는 곳이라는 점 때문이다. 그 길을 ‘걸었다’는 게 차를 타고 지나간 것보다 훨씬 많은 기억과 추억을 남긴다.
“도심에 엄청 큰 축제가 열린 기분이에요. 외곽으로 나가지 않으면 볼 수 없는 풍경이잖아요. 괜히 기분도 좋고, 다음 달에 할 때 또 올 것 같아요. 일단 긴 거리라서 천천히 걸을 수 있어서 좋아요. 거리마다 다양한 볼거리가 있는 것 같고요.”
김빛나 씨와 송민호 씨의 이야기다. 빛나 씨와 민호 씨 말고도 많은 사람이 노란 차선 위에서 카메라를 손에 들었다. 자동차에 내어줬던 길을 다시 찾아 걷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특별한 날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옛 충남도청부터 중앙시장까지, 1.1km 길을 천천히 걸었다. 강아지와 함께 산책 나온 사람도, 터덜터덜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는 사람도, 콘크리트 바닥 위에서 열린 교통문화운동 그림·글짓기 대회에 참여한 사람들이 자리에 앉아 도시락을 풀어 놓고 먹는 풍경까지도 길 위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결국, 사람을 생각하는 것

자동차가 없는 길은 단 하루 만에 중앙로 일대의 대기오염 농도를 절반 이상 줄인 것으로 조사되었다. 대전충남녹색연합은 10월 12일과 19일 두 차례에 걸쳐 대전시민 대기오염모니터링을 시행했다. 12일 총 50지점에서 조사한 결과 48지점이 세계보건기구의 이산화질소 농도 권장기준인 40ppb와 대전시 기준인 60ppb를 초과했다. 평균 농도가 72ppb였으며 최고 농도는 107.3ppb였다. 차 없는 거리 행사 날인 19일은 35ppb까지 줄어들었다. 차 없는 거리는 안전한 보행권과 함께 맑은 공기도 선사했다.
대전시 도시재생본부의 박월훈 본부장은 2015년 1월 월간 토마토와의 인터뷰에서 “자동차가 다니던 길에 사람이 다닐 때 어떤 모습인지 보고, 느끼는 게 중요하다. 현실적으로 중앙로는 대중교통전용으로만 가기엔 무리가 있으나 보행로를 넓히는 것을 전제로 해 대중교통 우선지구로 시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 지난 10월 차 없는 거리 행사 이후 “도시가 지속하기 위해서는 도심을 중심으로 보행자 중심 공간을 확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전시에 자동차만 62만여 대다. 자동차와 보행자 모두가 좋은 정책은 있을 수 없다. 일단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느끼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말하며, 차 없는 거리 행사가 주는 의미를 밝혔다.
“자동차 없는 거야 해 봐야 아는 거지. 지금이야 그냥 그래. 나는 50년 살았어. 옛날에야 차가 별로 안 다녔지. 지금이랑은 다르지. 더 사람 사는 것 같았어. 지금보다 자동차 많이 없으면 사람 사는 것 같겠네.”
대덕구에 사는 60대 김 할아버지는 워낙 시끄럽게 선전 하기에 중앙로에 구경 나왔다. 김 할아버지처럼 차가 없다기에 구경나온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차 없는 거리 행사를 통해 시민들은 차가 없는 모습을 익숙하게 받아들인다. 도시를 계획하는 사람들은 그곳에 무엇을 채워야 할지가 아니라 누가 그 길을 더 편하게 이용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원도심은 신도시와는 다른 냄새가 난다. 오래된 시간만큼이나 눅눅하게 밴 사람들의 냄새가 있다. 한 가지 일을 같은 공간에서 오랜 시간 해 온 사람, 돈보다 중요한 가치를 말하는 사람, 그림을 그리는 화가, 무대 위에서 꿈 꾸는 연극배우들의 냄새도 묻어나는 그런 곳이다. 그래서 원도심만은 다른 모습의 도시를 꿈꾸었으면 한다. 자동차보다 사람이 편한 도시는 걷는 사람도, 휠체어를 타는 사람도, 눈이 불편한 사람도, 귀가 불편한 사람도 편안한 도시다.

글 사진 이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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