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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61호] 이충구수제화
백 번 두드려야 구두 하나가 만들어진다
이충구수제화 이충구 씨
생각해 보면 신발은 원래 수제였다. 모든 것이 손에서 기계로 옮겨 가지만 신발만큼은 오래도록 손으로 만들었다. 지금은 값싼 중국산 기성화에 밀려 자취를 감춘 양화점, 수제화 가게, 하지만 이제는 낯선 공간이 되어 버린 그 가게의 문지방을 다시 넘는 순간, 잘 찾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꼭 맞는 신발을 신었을 때처럼 말이다.
신발은 발에 맞춰 신는 것
"90년엔 중국에서 3년 있었어. 대전에 써니상사라고 큰 구두 회사에 다닐 때야. 당시 중국에선 1국 5개사로 진출 제한 정책이 있었어. 국내에서 다섯 개 신발업체가 중국에 갈 수 있었는데 그중 한 회사가 써니상사였지. 중국 쿤산시에 공장을 지었어. 쿤산시에서 상해까지 40분이면 갈 수 있어. 쉬는 날엔 상해에 나가 놀았지. 중국. 재밌었지."
이충구 씨는 구두 재단이 한창이다. 검은 가죽 위에 가위는 요리조리 춤을 춘다. 오늘은 구두 두 켤레를 만들 예정이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배우기 시작한 구두 일이라 하니 그의 경력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45년을 넘는다. 올해 66세. 그의 손은 굵다. 그의 손을 잡으면 마치 다른 세계와 연결되는 느낌이다. 그의 손이 곧 그의 역사다. 오랜 가위질로 엄지엔 굳은살이 박혔고 집게로 가죽을 잡아당기느라 손 마디도 휘었다. 그의 손만큼이나 이충구 씨 발도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대전에서 구두 기술을 배운 걸 시작으로 성동구 구두 공장, 중국을 거처 개인 공장도 차려 봤다. 그리고 이제는 홀로 한 손님을 위한 구두를 만든다. 가게는 대전천이 흐르는 가오교 근처에 있다. 사람이 많이 지나는 길이 아니다. 하지만 골목에 숨어 있는 맛집처럼 멀리서도 손님이 찾아온다.
"신발 한번 신어 보세요."
"왼발은 잘 들어가는데 오른발은 조금 끼네요."
이충구 씨가 만든 이번 구두는 왼쪽과 오른쪽 구두 모양이 약간 다르다. 왼쪽 구두 밑창은 왼쪽을 비스듬히 높였다. 오른쪽 구두는 발 볼이 넓다. 공주에서 찾아왔다는 손님은 오른발에 보조기구를 착용했다.
"오른발이 불편하실 거 같네요. 금방 교정해 드릴게요."
이충구 씨는 신발 한 켤레를 들고 이리저리 손을 본다. 가죽을 손님 발에 맞게 늘리고 맞추는 일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구두에 목형을 넣고 몇번 망치질을 한 후 손님에게 다시 건넨다.
"이제 딱 맞네요. 진작 올 걸 그랬어. 아주 좋아요."
손님은 신을 신고 걸어 보더니 환하게 웃는다. 절뚝이며 걷는 그에게 딱 맞는 신발이다. 원래 신던 왼쪽 구두도 밑창을 비스듬히 높여줬다. 그리고 그냥 서비스로 받아 가라 한다. 다음에 또 오라며.
"신발은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지고 만들어야지."
그의 구두 가격 정책은 확고하다. 가격은 맞춰주지 않는다. 하지만 평생 A/S 서비스, 노동의 가치는 확실하고 그 가치는 또한 영원하다.
꾸준함이 그 보람을 대신한다.
이충구 씨가 앉은 의자 위 천장에 조명이 많다. 그의 자리는 다른 곳보다 더 빛난다. 가죽은 예민하다. 그냥 눈으로 보일 땐 괜찮은 것도 가죽 당기며 구두를 만들다 보면 흠이 나타난다. 그 작은 티를 조금이라도 잘 보기 위해 많은 조명을 천장에 달았다. 큰 가죽 안에서 쓸 만한 부위를 찾아 본을 뜬다. 좋은 가죽을 쓰는 게 중요하다. 가죽 공장에서 만들 때마다 매번 똑같은 품질로 나오진 않는다. 매번 가죽을 깐깐히 봐야 한다. 상처난 소로 가죽을 만들면 아무리 가공해도 그 상처는 남는다. 그런 가죽으론 구두를 만들 수 없다. 또 가죽을 접었을 때 주름이 잘게 가야 한다. 그런 가죽으로 구두을 만들어야 발이 안 아프다. 수제화를 찾는 손님은 그만큼 기대도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