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월 153호] 테미를 생각하다. '테미'는 마을이다.
테미를 생각하다
'테미'는 마을이다
1.
오후 1시가 지나면서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태양은 테미 골목 구석구석에 햇살을 내려보냈다. 테미를 걷는 맛은 역시 '고요함'에 있다. 적막함과는 분명 다른 결이다. 골목 안에 오래도록 쌓인 시간의 더께는 쫒기듯 내달리는 삶을 슬쩍 붙잡아 둔다. 소맷자락을 붙잡는 아이처럼 힘은 없지만 뿌리치지 못하게 만든다.
'테미'에는 봄이면 흐드러지게 피는 벚나무가 동산을 이룬다. 보문산에서 내려온 줄기가 봉긋 솟은 봉우리 하나를 만들어 둔 형국이다. 그곳 정상 부근에 배수지가 있다. 그래서 수도산이라고도 부른다. 그 배수지를 관리하기 위해 만든 주택 한 채도 빈 채로 남아있다. 그 아래에 오랫동안 시립도서관으로 사용하다가 현재는 테미창작센터로 탈바꿈한 건물이 있고 더 아래로 내려오면 이제 '테미오래'라 부르는, 옛 도지사와 공무원이 사용했던 관사가 골목을 사이에 두고 군락을 이룬다. 각 공간은 새로운 기능을 부여해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시민에게 개방했다. 산자락에 들어선 마을이 으레 그렇듯 계단처럼 층을 이뤄 단독 주택과 다세대 주택이 들어섰다. 대부분은 단독 주택이다. 층과 층 사이, 좁은 골목길은 차량이 접근하기 어렵다. 오래전, 산자락은 올곧이 집과 사람만을 위해 공간을 내주었다.
공공영역에서는 테미창착센터를 만들고 테미오래라는 이름으로 공간을 조성해 운영하지만 여전히 테미에 관심을 기울인다. 다른 것이 진행형이라면 테미 정상 부분에 배수지 물탱크 매립자와 사용하지 않는 관리 사옥은 아직 백지 상태나 다름없다. 한때 만화 관련 개인 창작관을 조성하겠다는 시도가 있었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다행스럽게도 흐지부지되었다. 만화창작관은 좀 뜬금없었다. 고민은 여전히 진행 중이고 다양한 가능성은 남아 있다.
이런 상황에서 테미 부근이 처한 가장 극적인 현실은 도시정비사업이다. 대흥동1구역 재개발사업을 추진한 것은 2009년이다. 10년 전 애기다. 워낙 오래된 일이어서 내년 일몰제에 걸려 사업이 엎어질 수도 있었지만 다시 움직임이 활발해진 모양이다.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사업대상지 곳곳에 건설사 몇 곳이 '성공적 재개발 사업 기원' 현수막을 내걸었다. 이런 현수막이 왜 그리도 얄밉게 보이는지 모르겠다. 이 사업은 대흥동 112-9번지 일원 55,707m2를 사업 대상으로 한다. 테미 관사촌을 놓고 볼 때 남서쪽을 가로막는 형태로 20층 이상 아파트10개 동 856세대가 들어설 계획이다. 용적률 기준이 달라져 세대수는 더 늘어날 가능성도 있다. 계획처럼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다면 지금 보는 풍광과는 많이 달라질 것이다. 이 흐름이야 현지 토지소유자 등 이해관계자들이 결정 권한을 갖고 있으니 지켜볼 수밖에 없다.
2.
이런 극적인 현실과 상관없이 테미창작센터와 테미오래에 문화예술 기능을 부여하면서 테미 일대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이 존재한다. 당연한 결과다. 테미를 자주 찾은 사람이라면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다. 공공영역에서 조성한 공간 말고도 최근 민간영역에서 주거가 아닌 다른 용도로 공간을 변경하기 시작했다. 갤러리와 작은 서점, 카페 등 문화적 요소라는 큰 테두리로 묶을 수 있는 공간이 들어선다. 아직 소제동처럼 풍광 전체를 흔들만큼 급격한 변화를 보이지는 않지만 움찍거리는 건 맞다.
이윤을 향한 엄청난 포식성과 무한 증식성을 보이는 자본이 달려들기 전에 시민이 먼저 합의하고 공공이 행정과 재정을 투여해 보호할 필요가 있다. 테미가 지닌 역사성과 이미 공공영역에서 재정 투여를 시작했다는 걸 염두에 두면 그래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맘 같아서는 테미 주변에서 일어나는 재개발, 재건축 계획에도 일정한 통제를 가해 주변 풍광을 지켜내기를 희망하지만 가능한 일일지는 모르겠다.
원도심 서남쪽 부근에 자리한 테미는 고맙게도 여전히 그곳에 있어 준 공간이다. 테미를 고려할 때 떨어뜨려 생각한 것이 아니라 원도심 연장선상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는 지금껏 적잖은 시간과 예산을 이 공간에 투입했다. 정책결정권자들이 무슨 생각으로 '원도심 활성화'라는 테마로 짧지 않는 시간, 적잖은 예산을 투자하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고 사업이 연속성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암묵적으로 시민이 동의했기 때문이다. 동의 근거로 두 가지를 추려 볼 수 있다. 하나는 원도심이 지닌 장소성이다. 여기서 장소성은 역사성에 기반한다. 근대 도시 대전이 출발한 공간이며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기, 군부독재기와 민주화운동기에 중요한 역사적 공간이었다. 이 시간 위에 개인의 경험과 추억이 겹치며 장소성을 형성한다. 다른 하나는 대전예술의전당과 대전시립미술관, 이응노미술관이 단지를 형성한 아트콤플렉스와는 다른 결로 '문화예술'이 축적되거나 이를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이다. 이런 점 때문에 원도심활성화 사업으로 근대문화유산을 보존, 활용하는 등 다양한 문화예술 활동을 지원한다. 사실, 현격하게 벌어지는 각 구별 문화예술 향유 기회를 고려하면 더욱 치열하게 고민하는 것이 맞다. 대전예술의전당을 중심으로 한 주변에 다양한 문화예술 관련 자원과 민선 7기 들어 야심차게 추진하는 가칭 '센트럴파크'와 '엑스포재창조사업'등 하드웨어만 놓고 보아도 굳이 다른 근거를 찾을 필요가 없을 정도다. 도시 전체 공간에 기능을 적절하게 부여하고 시민 삶의 질을 높인다는 측면에서 '테미'는 중요한 공간이다.
3.
한낮 테미를 둘러보며 강하게 든 생각은 조금 어이없지만 이곳이 '마을'이라는 사실이었다. 사람들이 산자락에 들어와 몸을 의지한 그때부터 이곳은 마을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마을이다. 인워적인 프로그램을 끊임없이 만들고 더 많은 사람이 북적거리게 만들겠다는 생각은 애초에 틀린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소란스럽게 북적거리는 공간보다는 조용히 스며드는 공간이 플요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필 때면 짧은 축제도 열리고 수많은 사람이 방문해 북적거리며 꽃놀이를 즐기는데 그 정도면 충분하다. 나머지 시간으 조용하지만 치열한 사유를 펼칠 수 있는 산책 공간으로 훌륭하다. 도심 속 다른 근린공원가는 차원이 다르다.
테미의 물리적 범위와 현재까지 투여해 만든 공간을 고려하면 이상적인 마을을 구현해 보는 것도 좋겠다. 이상적인 마을에 관한 인식도 많은 차이가 있겠지만 테미가 완전한 생태계를 구축할 수 있는 요소를 갖춘 마을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을 단위에서 가장 취약한 영역이 '문화예술영역'이 아닐까 싶다. 마을단위에 문화예술 인프라를 구축한 곳을 찾기란 쉽지 않다. 테미는 다르다. 상황과 기회 덕분에 이미 문화예술영역이 제법 튼실하게 자리를 잡았다. 하드웨어 측면에서 그러하다. 여기에 적절한 다른 요소가 섞이면 그만이다. 중요한 건 '적절한'이다. 주거 공간을 모두 상업 공간으로 바꿔 내는 무지막지한 짓은 벌이지 않기를 희망한다. 마을 구성 요소 중 핵심요소는 주민이다. 생산자와 소비자로만 구성한 공간은 마을이 아니다. 그곳은 시장일 뿐이다. 지속가능성을 기대할 수는 없다.
'마을'이라는 관점을 두고 기존 공간이 테미오래와 테미예술창작센터를 접근하면 다른 상상이 가능하다. 이벤트 성격이 강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일상성을 유지한 활동이 벌어지는 공간이다. 그냥 '일상'이어야 한다. 강한 역사성과 스토리를 담은 도지사 관사는 '기념성과 상징성'이 강한 공간지만 나머지 관사 공간까지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테미예술창작센터처럼 관사 공간 일부도 문화와 음악 등 결이 다른 다양한 장르에 레지던시 공간으로 제공해 마을에 예술인 거주비율을 늘리고 예술가끼리 또 예술가와 시민이 일상적으로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살롱 공간으로 하나를 내주었으면 좋겠다. 마을에 놀러 온 손님이 편하게 묵어갈 수 있는 공공형 게스트하우스 공간도 확보하면 이상적인 마을을 구성하는 생테계가 더욱 튼튼해질 수 있다. 이러면 테미예술창작센터와 테미오래는 분리된 공간이 아니라 마을 안에 함께 존재하는 요소다. 한마을에서 골목길을 사이데 둔 관계다.
이런 측면에서 배수지 관사 건물에는 이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기능을 부여하는 것이 좋겠다. 허태정 시장이 공약사업으로 진행한 커뮤니티 시네마 성격의 마을극장도 집언허고 크고 작은 공연이나 전시를 펼치고 모임과 회의도 진행할 수 있는 가변적인 공간 말이다.
별스럽지 않은 이벤트가 이제 좀 지겹다. 테미는 마을이었고 앞으로도 마을이었으면 좋겠다. 혹시 아파트 숲으로 둘러싸이더라도 꿋꿋하게 말이다. 2020년 새해를 맞아 꾼 첫 번쨰 꿈이다.
글 사진 이용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