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50호] 100년의 시간, 50년의 시간

100년의 시간,

50년의 시간

 

대전교구 주교좌 대흥동성당 백주년 기념전 <100년의 시간>, 
조정형 씨 마지막 타종식

 

 

2019년은 대전교구 주교좌 대흥동성당에 있어 의미 있는 해다. 대흥동본당이 설정된 지 백주년을 맞은 것이다. 이를 기념하며 지난 9월 7일, 대흥동성당과 대전시립미술관의 주최로 <100년의 시간>展이 대전창작센터에서 문을 열었다. 한편, 지난 9월 22일, 대흥동성당에서 50년 동안 종을 쳐 온 조정형(방지거) 씨의 마지막 타종식이 있었다. 이날을 마지막으로 이제 대흥동성당의 종은 전자식으로 타종된다. 

 


   

   

대흥동성당, 대전 천주교와 대전의 역사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18세기다. 우리 지역의 천주교 신자들은 주로 ‘내포(內浦)’라 불린 예산, 당진, 서산, 홍성을 중심으로 신앙 공동체를 이루었다. 대전에 천주교 신자들이 살고 있다는 첫 기록은 1915년 새해, 충북 비룡본당의 이종순 신부가 뮈텔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 나와 있다. 1914년 12월 25일, 대전에서 세 명의 신자가 성탄미사를 드리기 위해 옥천에 있는 그를 찾아간 것이다. 이후 1915년 대전 생곡공소가 설립됐고, 1919년 생곡공소가 대전본당으로 승격됐다. 1927년 대전본당 새 성당이 건축됐고, 1945년 대전본당이 대흥동으로 이전하며 대흥동성당 시대가 개막했다. 6·25전쟁 당시 폭격을 받아 건물이 파괴됐고 1952년, 폭격으로 파괴된 옛 성당 자리에 새 대흥동성당을 지었다. 현재의 대흥동성당이 완공된 때는 1962년이다. 새 성당의 봉헌식은 12월 24일 성탄 전야 미사로 진행했다. 
대흥동성당은 대전이라는 도시의 역사와 원도심 경관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1962년 당시 대흥동성당은 대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모더니즘 양식을 차용하면서도 우리나라 상황에 맞게 재창조했다. 하늘을 향해 기도하는 듯한 손 모양은 수직적이면서도 디자인 모티브를 크게 강조했다. 수직을 강조하는 모더니즘의 특징을 수용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성당 건물을 탄생시킨 것이다. 2014년, 대흥동성당은 등록문화재 제643호로 지정됐다. 

   

    
100년의 시간을 기념하다

백주년 기념전 <100년의 시간>은 대흥동성당 100년의 역사를 돌아보기 위한 전시로, 오랜 시간 마주 보고 있던 대전창작센터에서 진행한다. 100년의 시간을 무엇으로 가늠하고 시각적으로 드러낼까 하는 물음을 ‘예술’, ‘역사’, ‘사람’으로 구체화했다. 
대흥동성당은 한국 미술계를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여러 점 소장하고 있다. 그중 성당 전면 캐노피 상단의 부조 <12사도상>은 1963년 최종태, 이남규 작가가 함께 제작해 설치한 것이다. 최종태 작가는 안드레아, 대야고보, 마티아, 타대오, 토마스, 요왕(사도 요한)을, 이남규 작가는 바오로, 필립보, 마태오, 시몬, 바르나바, 베드로를 조각했다. <12사도상>은 좁고 길게 뻗은 건물 입면의 수직 기둥과 어울리며 ‘물질과 정신의 연결성’을 보여 준다. 
이번 전시에서 ‘예술’ 섹션은 ‘성미술(聖美術)의 순수’라는 이름으로 진행된다. 김경란 작가는 <12사도상>을 한지로 제작·설치했다. 대흥동성당의 한 세기를 기념하고, 일상적으로 보던 캐노피 위의 부조를 관람객이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했다. 김경란 작가의 <12사도상>은 1층 전시실에서 볼 수 있다. 
2층 오른편 전시실에서는 대흥동성당 내부의 좌우 벽면에 그림을 그린 화가 신부 앙드레 부통의 그림을 볼 수 있다. 1914년 프랑스 지엥에서 태어난 부통 신부는 1964년 우리나라에 온 이후 가톨릭 성미술의 토착화를 위해 노력했다. 다양한 벽화 150여 점을 그렸으며 현재 대전교구에는 대흥동성당과 유구성당에 벽화가 남아 있다. 부통 신부는 건강상의 문제로 1970년대 중반 한국을 떠나 프랑스로 돌아갔으며 1980년 세상을 떠났다. 이번 전시에서는 프랑스 위스크 생 폴 수도원에 보관된 부통 신부의 유품 속에서 찾아낸 벽화 열 점의 도판을 처음 소개한다. <성인 김효주 아녜스, 김효인 골롬바, 유대철 베드로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최후의 만찬> 등의 작품이다. 
2층 가운데 전시실에서는 ‘대흥동본당이 걸어온 100년’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전시장 3면에 걸쳐 100년의 역사가 시각자료와 텍스트로 구성됐다. 작은 성당 하나가 걸어온 100년의 길을 보여 주는 동시에 대전이라는 도시의 역사와 대전교구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했다. 예고 없던 신자 세 명의 발걸음에서 시작된 교회는 한 세기가 흐르는 사이 142개 본당, 383명의 성직자, 1만 8천여 명의 신자를 헤아리는 대전교구를 만들었다. 그 중심에 대흥동본당이 있었다. 
2층 왼편 전시실에서는 대흥동성당과 함께해 온 이들의 이야기가 ‘100년의 사람’이란 이름으로 펼쳐진다. 먼저, 대흥동성당의 종소리를 들으며 살아가는 100명의 인터뷰 영상을 전시했다. 눈에 보이는 대흥동성당은 하나이지만 각자의 삶과 마음속에 존재하는 형상은 다양할 것이라는 의도였다. 어떤 이에게 대흥동성당은 ‘딱 한 번 들어가서 놀아 본 어린이 놀이터’로 남았고, 어떤 아이는 대흥동성당을 ‘엄마, 아빠가 처음 만난 곳’으로 기억한다. 하루 두 번 울리는 종소리도 사람들의 마음에 특별한 기억으로 자리 잡았다. 
대흥동본당 보좌신부로 머문 두봉 주교와, 50년 동안 대흥동성당의 종을 쳐 온 조정형 방지거, 신자 유동균 미카엘은 대흥동성당과 연을 맺은 자신의 삶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이야기를 들려준다. ‘식복사’의 이야기는 전시장에서 직접 들을 수는 없다. 드러내지 않고 살고자 하는 그분의 의지 때문이었다. 다만, 유리 상자에 전시된 식기로부터 늘 낮은 곳에서 임하는 그분의 자세를 짐작할 수 있다. 

    

50년 종지기의 마지막 종소리

조정형(방지거) 씨는 ‘100년의 사람’ 인터뷰 영상에서 50년 동안 대흥동성당의 종을 쳐 온 이야기를 담담하게 펼쳐 낸다. 1946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피난 온 대전에 정착해 지금까지 살고 있다. 1969년 부모님 친구분의 권유로 대흥동성당과 인연을 맺었다. 
처음에는 아침, 점심, 저녁 세 번 종을 쳤지만, 아침에는 자제해 달라는 요청을 받아 이후부터는 오후 12시, 7시에 종을 쳐 왔다. 50년 동안 늘 같은 시간 자리를 떠나지 않고 종을 울렸다. 한 번, 조정형 씨가 성지순례를 떠나며 다른 이가 대신 종을 쳤는데, 종을 치지 말라는 민원이 들어왔다. 원래 듣던 종소리와 사뭇 다른 소리였던 것이다.   
조정형 씨는 길 가다 만난 사람에게 감사 인사 받은 일을 그간의 추억으로 꼽는다. 대흥동 이웃들이 종소리를 듣고 많은 위안을 받았다고 하는데 기분이 어떻냐는 질문에 그는 웃으며 답했다. 
“그 스토리를 듣고 감명 깊었죠. 내 종소리가 이렇게 여러 사람에게 위안을 주는구나, 하고. 더 아름답게 치려고 노력하는 중이에요.”
지난 9월 22일 일요일, 조정형 씨의 마지막 타종식이 있었다. 미사 시간 전, 조정형 씨가 타종을 시작했다. 기다란 세 갈래의 줄을 당기는 그의 모습이 성당 스크린에 펼쳐졌다. 종소리는 평소 오후 12시와 7시에 쳤던 것보다 길게 울렸고 타종이 끝나자 성당 내부는 박수 소리로 꽉 찼다. 이날, 조정형 씨는 제단에 서서 신자들을 향해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동안 제가 부족한 점이 있음에도 여러 배려와 조언 덕분에 여러분의 종지기로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종지기로 살아온 지난날 행복했습니다.” 
이제 대흥동성당의 타종은 전자식으로 바뀌지만, 성당 100년 역사의 절반을 함께한 조정형 씨의 종소리는 대흥동성당 신자는 물론 대흥동 주민들에게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조정형 씨의 이야기는 오는 10월 31일까지 여는 백주년 기념전 <100년의 시간> ‘100년의 사람’에서 들을 수 있다. 

   


대전교구 주교좌 대흥동성당 백주년 기념전 <100년의 시간>
장소  대전창작센터(대전 중구 대종로 470)
기간  9월 7일~10월 31일 

관람 시간  10:00~18:00(매주 월요일 휴관)


글 사진 성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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