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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47호] 문 닫은 공장이 깨어나 배시시 웃었다
문 닫은
공장이 깨어나
배시시 웃었다
전주 팔복예술공장
1.
창백하게 바랜 콘크리트 빛깔은 처연하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콘크리트 표면에 착륙한 햇살은 옥상 콘크리트를 더욱 창백하게 만든다. 나무와 콘크리트는 묘하게 엉켜들어 서로를 간섭한다.
예술가는 콘크리트 옥상에 꽃을 심고 나무 둥치를 옮겨와 적절하게 배치했다. 지붕 없이 덩그러니 남은 콘크리트 벽체, 삐죽 튀어나온 철근, 더는 사용하지 않는 물탱크까지 모든 것이 수십 년째 이날을 기다린 것 마냥 서로 어우러져 다른 형태를 완성한다. 감나무 줄기와 가지는 평생 땅 밑에 숨은 채 영양분을 안정적으로 공급해 주던 뿌리를 냉정하게 버렸다. 땅을 박차고 옥상으로 올라온 녀석들은 덩굴로 변해 차가운 콘크리트를 탐한다.
강렬한 태양빛에 숨죽인 채 옅은 푸른빛으로 펼쳐진 하늘과 천천히 흐르는 구름은 작품으로 변한 옥상 전체에 훌륭한 배경을 선사한다. 강용면, 김영란, 박진영, 안준영, 엄혁용, 채우승, 최은숙 작가가 참여한 팔복예술공장 2019옥상전 <수직의 안팎에서>다. 전시는 7월에도 8월에도 계속 이어진다. 아마 9월에도 가면 볼 수 있다.
2.
문을 닫은 공장은 신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높은 지붕 아래 고스란히 드러난 트러스, 기둥과 답답한 벽체가 방해하지 않는, 널찍하게 빠진 공간이 담은 감성은 특별하다. 대량 생산이라는 산업사회 특징을 잘 보여 준다. 어떤 면에서는 구불구불 논둑으로 경계를 나눈, 경지 정리를 하지 않은 들녘 앞에서 느끼는 감정과 유사하다.
인류의 삶에 획기적인 전환을 가져온 특정 시기를 보여 주는 공간으로서, 드러난 일종의 상징이다. 인류는 남은 유산 앞에서, 웅장한 자연 앞에서 느끼는 것과는 다른 묘한 경외감을 느낀다. 머릿속에만 존재하던 신화가 실체로 눈앞에 나타난 것만큼이나 극적이다. 이런 공간은 예술과 만났을 때 완벽한 진화를 이룰 수 있다. 전통적 경작 행위와 유사한 현대적인 경작 행위라 할 수 있는 공장은 자본주의 방식을 좇는 삶의 물적 토대다. 정신적 토대라 할 수 있는 예술과 궁합이 잘 맞는 건 지극히 자연스럽다. 본능적으로 이런 사실을 꿰뚫어 보는 예술가는 수명을 다한 공장을 만나 공간과 그 안에 쌓인 시간을 해석하고 감각적으로 표현해 낸다. 예술가가 작업을 마친 문 닫은 공장은 막 씻고 나온 아이처럼 마알갛게 속내를 드러내며 배시시 웃는다.
3.
전주시 덕진구 팔복동 산업단지에는 ‘팔복예술공장’이 있다. 1979년 쏘렉스 공장으로 문을 연 곳이다. 카세트테이프를 만들던 공장이다. 국내뿐 아니라 아시아 곳곳에 카세트테이프를 만들어 수출했다. 지금도 종종 사용하는 CD가 세상에 등장하며 쇠락하다가 문을 닫고 1991년 폐업한 후 25년 동안 숨죽인 채 조용히 숨만 쉬었다.
이곳을 해석하는 작업에 황순우 건축가가 참여했다. 맞다. 인천아트플랫폼을 만들어 낸 그다. 지금도 스태프 명단에 총괄기획자로 이름을 올렸다. 건축가 황순우라면 믿을 만하다. 2017년 10월에 개관을 했으니 아직 2년이 채 안 되었다. 지금보다 앞으로를 더 기대하게 만든다. 건축가 황순우라서 그렇다.
“과거 쏘렉스 공장을 다시 기억하게 만드는 게 필요했다. 거기 근무했던 사람들, 팔복동에 살았던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아카이브한 내용을 발표하고 전시하니까 사람들이 팔복동을 기억하기 시작했다. 재생은 기억에서부터 온다고 본다. 1년 동안 공간을 설계하지 않고 기억을 재생하는 작업, 참여하게 하는 작업, 예술가를 통해서 그 공간을 다시 새롭게 읽어 내는 작업을 했다. 물리적인 것은 맨 마지막에 했다.”
팔복예술공장 황순우 총괄기획자가 한국문화예술교육진훙원 매체 <아르떼 365>와의 인터뷰에서 말한 내용이다. 같은 인터뷰에서 도시재생은 “중심에 돈이 아닌 사람을 두어야 한다”라고도 밝혔다.
4.
팔복예술공장은 전시 공간과 입주 작가 작업 공간, ‘써니’라 이름 붙인 카페 공간, 공장과 공장 사이 공터에 툭툭 던져 놓은 컨테이너에 담아 둔 책방과 만화방 등이 모여 구성한다. 기획한 전시 이외에도 공간 곳곳에서 다양한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옥상에서 달군 몸을 식힐 수 있는 카페 ‘써니’에는 여공 모습을 형상화한 거대한 조형물을 만날 수 있고 그 옆 캐비닛에는 공장을 가동할 당시 회사가 생산한 다양한 문서를 볼 수 있다.
과거 화장실로 사용하던 변기에는 검은색 카세트테이프 릴이 잔뜩 엉켜 들어찼고 다른 쪽에는 릴을 매끄럽게 구동시키기 위한 노란색 구동용 릴을 꽃잎처럼 흩뿌렸다. 벽면은 꼴라주 작품과 시 한 편, 여공을 표현한 듯한 벽화로 채웠다. 구석구석 발견하며 감상하는 재미가 있다.
공장 바로 옆은 기찻길이다. 산업단지 물류를 해결하기 위해 연결한 기찻길이다. 기찻길 옆에는 이팝나무가 무성하게 자란다. 꽃이 흐드러지게 필 때는 수많은 행락객이 몰려들어 사진을 찍는 모양이다. 자주는 아니지만 지금도 간혹 화물 열차가 오간다. 본연의 목적을 상실하지 않았지만 기찻길도 문 닫은 공장만큼이나 ‘끌림’이 있다. 기찻길 역시 특정한 시기를 표현하는 ‘상징’이다.
전주시는 붓에 물감을 잔뜩 묻혀 한때 전주 경제를 이끌었던 팔복동 산업단지에 팔복예술공장이라는 점을 꾹 눌러 찍었다. 주변 공간으로 어떤 색채가 어떻게 번져 나갈지 궁금하다.
글 사진 이용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