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46호] 근대로의 관문에서 세계로의 관문으로

근대로의 관문에서

세계로의 관문으로

 

정동 '대전역'을 찾아

  

  

제각기 정해진 목적지를 따라 바쁘게 발걸음을 움직이는 사람들. 전광판에 점등되는 열차들의 행선지와 출발 시간 위로 수많은 사람의 시선이 교차한다. 일상을 떠나 어딘가를 향해 떠나는 사람들, 그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사람들. 수많은 시선과 동선이 무심히 교차하는 기차역은 현대인들의 시간을 압축적으로 상징한다.

“이제 우리의 직관 방식과 우리의 표상에 어떤 변화가 생길 것임에 틀림없다. 심지어 시간과 공간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들도 흔들리게 됐다. 철도를 통해서 공간은 살해당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시간밖에 없다.”

독일의 서정시인 하인리히 하이네는 철도가 만들어 내는 시간감각과 공간 개념의 혼란을 이렇게 묘사했다. 기차표에 표기되는 정보는 출발지와 도착지, 그리고 시간이 전부이다. 출발과 도착 사이에 지나치는 수많은 공간들은 기계의 속도 앞에 무의미해진다. 중요한 것은 시간이다. 예정된 도착 시간에 플랫폼에 멈춰서는 것만이 기차의 역할일 뿐이다.

 


 

 

근대의 시간과 기차역
그러나 정량화된 척도로 표현되리만큼 정확하고 명료한 기계적 시간이 우리에게 도입된 것은 불과 한 세기 전의 일이다. 전근대 사회에서 시간은 길고도 완만하게 흘러갔으며, 자연의 순환에 기댄 반복이 이를테면 시간의 개념이었다. 밤과 낮, 계절의 반복, 별의 일주처럼 주기적으로 되풀이되는 자연의 리듬 속에 시간은 무심히 내재되어 있었다. 전근대는 시간에 대한 무관심이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개화기에 들어서 조선에 들어온 서양인들의 눈에 조선인의 전근대적 시간의 개념은 나태함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정확성이 결여된 시간 개념으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캐나다 출신의 선교사 제임스 게일(James S. Gale)은 1909년 출판된 자신의 견문기 《전환기의 조선》에서 친일계 어용신문인 <서울프레스>에 실린 기사를 그대로 인용하며 조선인의 시간 개념을 비판했다.
“시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모레는 그저께와 같은 날이고, 약속은 사람들이 신의가 없어서가 아니라 어떤 일에 있어서 정학하고자 하지 않기 때문에 지켜지지 않는다. 조선에서는 명확한 설명이라는 것이 불가능하고 정확한 정보란 문제시되지 않는다. 조리 있고 정확한 논리란 조선인의 상징적인 정신세계의 테두리에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이 시간관념을 얘기할지라도 당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들은 이해할 수 없다.”
그에게 조선인의 시간 개념에 대한 둔감함은 조선인, 나아가 동양인에 대한 인종적 집단으로써의 무시와 차별로 귀결되었다. 근대의 시간은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을 바탕으로 제국주의 담론을 만들어내는 논거로 이용되기도 했다. 기계화된 시간의 정밀도를 척도로 문명의 위계를 설정하고, 이를 통해 열등한 조선이라는 프레임을 덧씌웠던 것이다. 조선의 일부 개화파들은 이러한 위계 논리를 그대로 수용하였으며, ‘문명’을 받아들임으로써 위계의 사다리를 올라가고자 시도하기도 했다.
이러한 조선인의 전근대적 시간감각을 무너뜨린 것은 기차였다. 사람마다 공간마다 서로 달랐던 시간감각은 기차의 속도 앞에서 표준화되었고, 기계식 시계가 만들어 내는 시분초 단위의 격자가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게 되었다. 일정한 시간표로 운행되는 기차 앞에서 ‘시간 엄수’는 근대적 삶의 규칙으로 자리매김했다. 근대적 시간감각은 빠르게 일상 속으로 스며들었다. 공공기관과 학교 등에서는 정해진 일과표로 하루를 세분화했고, 사람들은 이제 자연이 아니라 기계식 시계에 일상의 리듬을 맞추게 되었다.
   
1918년 대규모 개축을 거친 대전역
 
근대 도시로의 관문, 대전역
일제 강점기 당시 대전역의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 역시 기계식 시계였다. 1904년 간이정거장으로 출발하였으며, 1918년 대규모 개축을 거친 대전역에는 본체의 지붕 아래에 만들어진 반원형의 감실에 벽시계가 설치되어 있었다. 당시 대부분의 철도 역사가 표준 설계를 따라 지어졌듯, 대전역 역시 표준 설계를 따라 만들어졌다. 전형적인 철도 도입기의 도시 기차역의 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비슷한 시기 개축된 대구역과도 상당히 유사한 외관을 보인다. 서양의 고전 양식과 일본의 목조 건축이 혼재된 모습을 가지고 있었던 대전역의 외벽은 인조석 물갈기로 마감되었으며, 지붕의 양쪽에는 구리로 만들어진 돔 지붕이 덮여져 있었다.
대전역에 기차가 다니기 시작했던 것은 1904년 11월의 일이었다. 당시 영등포와 대전 사이의 노선이 운행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정식으로 경부선이 개통되며 대전역은 본격적인 영업을 시작하게 된다. 이와 맞물려 대전 역시 신흥 도시로써 급속하게 발전하게 된다. 일본인 직원들과 철도 공사 종사자들이 대전역 부근인 지금의 원동, 중동, 정동 지역에 시가를 이루었으며, 당시 대전의 인구 중 일본인의 수는 조선인의 두 배에 육박하게 되었다. 특히나 1914년 호남선이 개통되며 대전은 분기점이 되었고, 서대전역이 건설되며 서부 지역으로까지 시가지가 확장되었다.
1904년 경부선 개통 전의 대전 인구는 188명에 불과했지만, 1925년에는 5,725명으로 급증하게 된다. 이 중 66퍼센트는 일본인이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1932년에는 충남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동하게 되면서 대전은 충청도의 중심 도시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약 1킬로미터를 사이에 두고 대전역과 충남도청이 마주 보고 있었으며, 사이의 중앙로 인근으로 각종 상업 시설과 공공시설이 들어서면서 대전의 중심 시가지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1909년 1월 7일과 13일에는 남순행길에 올랐던 순종 황제가 대전역을 거쳐 가기도 했다. 당시 회덕 군수와 충남관찰사 등 관리, 그리고 유생 수백여명이 순종 황제를 맞이했다. 그러나 순종의 남순행을 추진하고 함께 동행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이토 히로부미였다. 고종 황제의 강제 퇴위, 군대 해산 등으로 항일 의병 항쟁이 격화되자, 반일 감정을 완화시키기 위해 순종의 남순행을 추진했던 것이었다.
이처럼 경부선이 부설되고 대전역이 건설되면서 한적한 시골 마을에 불과했던 대전은 근대 도시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러나 근대를 가져다준 철도는 동시에 침략과 수탈, 나아가 일제의 대륙 진출을 위한 도구로 이용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대전 시민의 상당수는 일본인이었다는 점에서, 대전역이 가져온 근대가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국제 철도 노선의 경유지
오늘날의 대전역에서 출발하는 기차는 서울과 부산에서 경적을 멈춘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당시 대전역은 도쿄에서 유럽을 잇는 명실상부한 국제철도노선의 경유지였다. 도쿄에서 출발한 기차는 시모노세키까지 이어지고, 부산까지는 바닷길로 이동했다. 부산에서부터는 경부선과 경의선 철도를 따라 대구, 대전, 서울, 신의주를 거쳐 갔으며 압록강을 건너 신징으로 향했다. 신징에서 하얼빈까지 이동한 후 열차를 갈아타면, 동청철도를 따라 시베리아 횡단철도로 접속된다. 이렇게 열차가 시베리아 평원을 달려 베를린과 파리에 도착하는데는 한 달여의 시간이 걸렸다.
유럽까지 이어지는 철도는 더 넓은 세상으로의 조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개개인이 가지는 생각과 사고, 그리고 활동의 확장을 가져오는 것이기도 했다. 1927년 6월 화가 나혜석은 남편 김우영과 함께 파리행 기차표를 구매했다. 가부장적 유교 사회에서의 평범한 어머니이기를 거부했던 나혜석은 파리, 스위스, 독일, 스페인, 미국 등을 여행하며 더 넓은 세상과 마주한다. 파리에서는 야수파 화가 비시에르의 화실에서 그림 연구를 하기도 했으며, 런던에서는 팽크허스트 여성 참정권운동 단원과 여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한 손기정과 남승룡 선수가 도쿄에서부터 베를린까지 이동했던 방법 역시 철도였다. 올림픽 개막을 두 달여 앞둔 6월, 도쿄에서 합숙훈련을 진행하던 손기정 일행은 경부선과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거쳐 베를린으로 출발한다. 베를린에서 현지 적응 훈련을 마친 손기정은 마라톤에서 2시간 29분 19초의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목에 건다.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하며 손기정을 도왔던 남승룡도 동메달을 획득한다. 그러나 환호하는 관중들 앞에서 시상대의 꼭대기에 오른 손기정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기차역이 바꾸어 놓은 근대의 풍경은 광범위했다. 철도는 신문물뿐만 아니라 근대적 사상과 예술, 문화를 가져다주었다. 나혜석의 그림이, 손기정의 금메달이 말해 주듯, 적어도 그 시절 조선인의 꿈은 철도를 따라 한없이 뻗어 나가 있었다. 그러나 손기정의 시상대에서의 굳은 표정이 보여 주듯, 그것의 한계 또한 분명했다. 식민지가 가져온 근대는 온전한 우리의 것이 아니었으며, 식민지인의 아픔을 고스란히 느껴야만 했다.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행 기차표.
도쿄를 출발해 부산, 하얼빈을 거쳐 베를린에 도착한다
<출처: 손기정기념재단>
 
다시 꿈꾸는 세계로의 관문
일제 강점기까지만 해도 만주로, 유럽으로까지 뻗어나갔던 철도는 해방 이후 분단과 함께 끊어지고 말았다. 일본이 물러간 후 철도는 우리 손으로 움직이게 되었지만 더 이상 기차는 신의주로, 만주로, 파리로 나아갈 수 없게 되었다. 경의선이 개통된지 40년 만인 1945년 9월 11일 남북간 철도 운행은 중단되었으며, 그것은 아직까지도 현재진행형이다.
반세기가 지난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에서는 경의선과 동해선의 남북 연결이 추진되었다. 이어 지난 2003년에는 경의선의 문산과 개성 구간이 복원되며 노선이 개통되었으며, 2007년에는 남북 열차 시험운행이 이뤄지기도 한다. 같은해 10·4 남북정상회담 직후에는 화물열차가 주 5회 간격으로 남측 도라산역과 북측 판문역 구간을 운행하기도 했다. 한동안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멈췄던 남북 간 철도 운행은 지난해 남북철도 공동조사가 실시되며 10년만에 재개되기도 했다.
아득히 멀어 보이는 파리행 열차가 몇십년 전 이야기라는 사실은 오래도록 이어졌던, 그래서 이제는 둔감해진 분단의 기억을 환기한다. 오래전 파리로, 베를린으로 떠나는 열차에서 더 넓은 세상을 조우했던 그들의 꿈은 오늘날 군사분계선에 가로막혀 있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 이제는 분단의 상징이 되어버린 말 한마디. 철마가 달려가고 싶은 곳은 끊어졌던 철길뿐만 아니라, 그것이 이어나갔을 수많은 사람들의 꿈과 넓은 세상일 것이다.
대전역은 근대의 공간이다. 기차가 가져온 기계식 시계와 근대적 시간 개념은 일상의 풍경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식민지가 가져온 근대의 관문은 새로운 도시를 만들어 내기도 했고, 새로운 문물이 들어오는 창구가 되기도 했다. 손기정 선수의 낡은 베를린행 열차표가 증언하고 있듯, 기차는 더 넓은 세상으로 꿈을 실어 나르기도 했다. 해방을 맞이한 지 7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식민지의 근대가 아닌 온전한 우리만의 시간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열차는 군사분계선에 가로막혀 더 넓은 세상으로 달리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변화는 시작되고 있다. 여전히 군사분계선이 가로막고 있지만 경의선은 다시 연결되었으며, 최근에는 남북철도 공동조사가 실시되기도 했다. 지금은 시험 운행·조사 등의 단계이지만, 이러한 시도들이 모여 점점 더 많은 기차가 군사분계선을 가로질러 달린다면 마침내 파리행 기차는 현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대전역이 세계로의 관문이 되는 그날을 꿈꿔 본다. 
 

글 천정환 사진 천정환, 손기정기념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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