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46호] 올봄, 마을에 내리쬐는 햇살이 섧다

올봄,

마을에 내리쬐는 햇살이 섧다

      

대전여지도 129

대전 서구 매노2동(나정이, 항골)

      


      

분토골에서 바라본 나정이마을 전경

      

호남선 철도와 벌곡로는 대전 서구 흑석동을 지나며 나란히 달리다가 석고개방죽 근처에서 다시 갈라진다. 석고개 너머 평촌동에 다다르기 전, 좌측으로 들어가는 조붓한 길이 있다. 비보호 좌회전으로 버스정류장을 끼고 들어가는 길이다. 이 길을 따라가면 너른 들을 가진 제법 큰 마을을 만난다. 초행길에 이를 예측하기란 쉽지 않다. 새로 닦은 벌곡로에서는 마을이 보이지 않는다.
대전광역시 서구 매노2동에 속하는 곳이다. 매노라는 이름을 같이 쓰지만, 원매노라 부르는 곳과는 제법 거리가 있다. 자연마을로는 나정, 항골(황골), 분토골, 가세골, 새터, 양짓말 등이 있다. 크게 보면 항골과 나정이로 나눌 수 있다. 나정이에서 동쪽으로 마주 보이는 곳에 분토골과 가세골, 양짓말이 있다. 들 건너 마을이다. 한 시야에 들어오니 한마을로 보는 것이 맞겠다. 새터만 벌곡로가 나면서 도로 우측으로 새로 들어선 마을이다. 나정이를 지나 골짜기로 더 들어가면 항골이다.
항골은 개발 계획에서 빗겨 갔지만 나정이는 평촌일반산업단지 구역에 들어간다. 이웃한 평촌동 마을과 마찬가지로 산업단지 개발을 반대하거나 적정 보상가를 요구하는 현수막이 마을 초입부터 집집마다 걸렸다. 마을 주민이 갖는 심란함이 마을 전체에 내려앉았다. 보상받을 토지라도 넉넉한 주민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고 토지주와 건물주가 다른 경우는 막막함이 더하다.
계획상 대부분 일반산업단지로 편입하는 나정이 들은 예로부터 ‘천마지기뜰’이라고 불렀을 만큼 넓다. 경지정리를 하지 않아 구불구불한 논둑길이 산업시대 이전 마을을 보는 듯 무척 정감 있다. 산업단지에 이렇게 너른 들을 내줘야 하는 현실은 지금 세태를 반영하는 듯해 씁쓸하다. 마지막 농사가 될지도 모를 모내기를 앞두고 정갈하게 써레질을 마무리한 논에 쇠백로 몇 마리가 내려앉아 부리질을 한다.
주변을 둘러싼 산이 만들어 둔 너른 들에서 빗겨 나 산비탈에 바짝 붙어 나정이마을이 들어섰다. 잘 자란 느티나무 몇 그루가 마을 입구에 시원한 그늘을 드리웠다. 그 밑을 지나 들어서면 손바닥만 한 공터를 앞에 두고 마을 한가운데 경로당이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동네 주민 둘이 장기를 둔다. 장기 두는 모습을 보는 것도 오랜만이다. 아침 일찍 들에 나갔다가 조금 이른 점심을 먹기 위해 주민이 모였다.
“요 앞에 우물이 있었다고 해요. 물도 좋고,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잘 나서 저기 평촌하고 멀리서는 흑석동에서도 물을 길으러 왔다고 하던데…. 지금은 메워서 볼 수가 없어요.”
마을에 이사 온 지 몇 년 되었다는 강 씨 아저씨 얘기다. 이사 오면서 개인적으로 마을 구석구석을 돌아보고 이야기를 수집했던 모양이다. 공직에서 오랫동안 일해 아는 사람이 많아 불편하다며, 이름은 한사코 밝히지 않았다. 대신 방문객 곁에 바짝 붙어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좋은 우물 때문에 나정이라는 마을 이름이 붙었다 하여 신라 박혁거세 설화와 연관한 라정(蘿井)처럼 우물 정자를 쓸 줄 알았더니 아니다. 라정(羅亭)이라 썼다. 대전시립박물관 누리집 지명유래 편 기록에는 이 마을을 나지정(羅池亭)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나도밤나무가 자라는 아름다운 정자가 있어 진잠8경 중 하나에 꼽혔다고 하는데, 흔적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우물보다는 오히려 정자와 관련한 마을 이름인 셈이다.
낯선 방문객을 위해 망설임 없이 밥상 위에 수저를 올려 주는 마을 주민과 함께 밥을 먹고 경로당 문을 나섰다. 그 길에 강 씨 아저씨가 동행했다.

      

나정이마을 골목

    

경로당에서 나와 남쪽으로 좀 올라가니 산기슭 두 개가 맞닿을 것처럼 흘러내린 사이로 항골 입구가 나타난다. 대전시립박물관 지명유래에는 “계곡의 입구가 좁아서 항골이라 부른다”라고 설명했다. 한자는 항목 항(項) 자로 적었다. 이 한자는 목과 목덜미라는 뜻도 있다. 나정이 너른 들을 지나 마을로 들어서는 길목이 좁아지는 데서 마을 이름이 연유했다고 해도 그럴 듯했다. 나정이에서 항골이 보이지 않는다. 계곡 위쪽이니 지대도 높고 마을 입구도 좁아서다. 마을 주민 강 씨 아저씨는 오히려 항목 항 자가 가진 뜻 중 ‘크다’라는 뜻이 더 어울릴 수도 있다고 추측했다. 예로부터 항골이라고 하면 보통 큰 마을을 두고 그렇게 불렀다는 것이 근거였다. 주민 사이에서는 유황이 나서 황골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이렇든 저렇든 항골은 능성 구 씨 집성촌이었다. 한국문중문화연구원 자료를 뒤져 보니, 능성 구 씨 대전입향조는 진잠 세동 17세 구정래와 진잠 율고촌의 19세 구원팔이었다. 이후 19세 지홍(1688년생), 20세 공, 21세 백사, 22세 헌과 윤, 탁의 묘가 이곳에 있었다. 이를 근거로 하면 200년 이상, 300년 가까이 마을이 내려온다고 추정할 수 있다.
항골은 입구가 좁은 항아리처럼 생겼다. 좁은 입구로 들어서면 둥그렇게 너른 땅이 펼쳐진다. 능성 구 씨 선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은 동그란 하늘에서 햇볕을 막힘 없이 받으며 한없이 고요하다.
“많을 때는 20가구도 좀 넘게 살았는데. 지금은 8가구 정도 남았어요. 과거에 타성이 한두 집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저 위에 사찰 빼면 전부 구 씨만 살아요. 이 앞에 버드나무가 많이 자란 곳도 다 논이었죠. 숭년밥그릇이라고 불렀던 논이에요.”
농기구를 챙겨 밭에 나서던 주민 구맹회(65) 씨 얘기다. 구 씨는 외지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은퇴하고 다시 고향에 돌아왔다. 숭년밥그릇에서 숭년은 흉년이다. 가뭄이 들어 흉년이 찾아와도 농사를 지어 밥그릇을 채울 수 있는 좋은 논이었다. 수렁논이라고도 부르는, 물이 많이 나는 논이다. 천수답이 대부분이었으니, 가뭄이 심하면 모내기도 못한 채 하늘만 바라보았던 시절에는 그야말로 좋은 논이었을 게다. 항골 초입에서 논자락이 죽 이어지다가 그 중간 즈음에 버드나무가 꽉 찬 부분이 보인다. 이제 거의 습지로 변한 그곳이 한때는 숭년밥그릇이라고 부르던 논이었다. 물이 하도 많이 나서 일제 강점기에는 마을 초입 부분을 막아 저수지를 만들려고 했다. 지금도 그때 공사한 물막이 제방 흔적이 고스란히 남았다. 이곳에 저수지를 만들면 천마지기뜰이라고 부른 나정이 들에 가물어도 물을 댈 수 있었을 게다. 저수지가 생겼다면, 항아리 입구를 막아 물을 채운 형국이다.
“거의 공사를 마무리해서 끝부분만 막으면 되었는데 마침 광복을 맞아 일본놈들이 다 떠났지요. 시간이 조금 더 있었으면 아마 저수지가 되었겠죠.”
구맹회 씨 이야기가 끝나자, 항골에서도 사기골이라 부르는 곳이 있다며 가 보자고 강 씨 아저씨가 앞장선다. 새로 단장한 구 씨 종중묘를 끼고 돌아 골짜기로 난 길을 따라 얼만큼 들어서니 제법 너른 평지가 나온다. 밭을 만들기 위해 흙을 고른 곳에 자기 파편이 가득하다. 강 씨 아저씨는 이곳에서 백자와 청자편을 흔히 보았고 막사발보다는 좀 더 품격 있는 그릇이었다고 말했다. 빛깔이 고와서 형태가 온전한 것 몇 개를 챙겨 두었다고 덧붙였다. 형태를 유추해 볼 수 있는 도자기도 군데군데 보였다. 접시 같은 그릇도 보였고 액체류를 담아 두었을 병 형태도 보였다. 
한참 기웃거리는데, 아버지가 물려준 땅에 버섯 농사를 지어 보려 들어왔다는 구자경(59) 씨가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작고 아담한 집으로 안내해 따뜻한 커피를 내준다. 
“옛날에 여기서 기성동까지 꼬박 걸어서 학교에 다녔다니까요. 산 넘고 고개 넘어서 9년을 걸어 다녔어요. 그나마 비라도 많이 내리면 마을 초입에 개울이 넘쳐서 이장님이 학교도 못 가게 했어요. 시골이었지요.”
개울은 좁은 항골 마을 입구 앞으로 흐른다. 지금은 다리를 놓았다. 항골을 빠져나오며 좀 더 자세히 보니 골짜기에서 내려온 물은 마을 입구를 가로 질러 산비탈을 따라 흐른다. 개울 바닥이 제법 깊다. 큰비가 내리면 꽤 많은 물이 거세게 흐르겠다. 흡사 마을을 지키는 해자와 같다.

    

항골마을 주택과 농지 가운데 버드나무가 들어선 곳이 숭년밥그릇이라고 부르던 논이었다

     

강 씨 아저씨와는 나정이마을 경로당 앞에서 헤어졌다. 경로당 앞에는 할머니 몇이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마당에 내어놓은 낡은 소파 한 귀퉁이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항골에 다녀오는 길이라는 말에 감나무 이야기가 나온다.
“항골이 잘 사는 동네였지. 예전에는 항골에 감나무도 무척 많았는데, 그 감 따 가지고 아이들 모두 가르쳤잖아. 철이 되면 감 장사가 마을에 들어와 감을 사 가지고 이 앞에 산더미처럼 쌓아 두었는데. 우리에게 감을 울켜(우려) 달라고 맡겼지.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어. 방마다 그냥 그득그득 쌓아 놓고 울켰는데. 그 감 장사는 어떻게 됐나 몰라?”
엊그제 일처럼 할머니들은 마을회관 앞 공터에 쌓아 두었던 감 더미를 이야기했다. 몇몇 할머니가 일반산업단지 개발 관련한 일로 찾아온 사람인 줄 알고 퉁퉁 볼멘소리를 내뱉자, 다른 할머니가 ‘책 만드는 사람’이라고 고쳐 설명해 준다. 심란했던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진다.
“우애와 인심이 정말 좋은 마을이여. 다른 집에 무슨 일이 생겼다고 하면 내 일처럼 나서서 돕고 그랬지. 우물은 이 앞에 있었고,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 여름에는 얼음처럼 시원하고 겨울에는 김이 모락모락 날 정도로 따뜻했어. 다들 여기 모여서 빨래했지. 겨울에 손도 안 시려웠다니까.”
칠월칠석이면 샘굿도 지냈다. 마을 농악대가 꽹매기도 치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장독도 돌고 주왕신에게 잘되게 해달라고 정성껏 기원을 올렸다. 지금도 샘굿은 안 하지만 칠월칠석이면 마을 주민이 모여 한바탕 잔치를 벌인다.
경로당에서 나와 분토골과 가세골을 돌아 새터 앞에 섰다. 마을을 둘러싼 산이 만들어 둔 작은 골짜기마다 집 몇 채를 짓고 작은 땅에 농토를 일궜지만 묵은 논과 밭도 많이 보인다. 산과 내, 땅에 기댄 인간이 수백 년 동안 만들어 놓은 공존하는 삶의 형태가 고스란히 보인다. 전형적인 우리 전통마을이 이랬지 싶다. 넓고 풍요로운 나정이 들을 앞에 두었던 항골은 생뚱맞게 열병합발전소를 앞에 두게 생겼다. 올봄, 마을 전체에 눈부시게 내리쬐는 햇살이 유난히 섧다.

   


글 사진 이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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