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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46호] 색을 입히다
색을
입히다
청사진연구소 손상호 대표
매일 많은 사람이 오가는 대전역과 은행동 사이에 자리한 중동. 중동은 대전역을 통해 대전을 찾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마주하는 마을이다. 인쇄거리, 한의약거리, 건어물거리를 중심으로 한 중동은 일제 강점기에 경부선과 대전역이 생기면서 철도관사촌과 함께 유곽을 형성했다. 과거부터 중동은 공창으로 성매매가 성행했던 곳이다. 1947년 공창 폐지 이후에는 사창가를 형성하면서 1970년대까지 번성했다. 1990년대 둔산신도시가 만들어지고 자연스럽게 쇠퇴의 길을 걸었다. 밤이 오면 주변 네온사인이 무색하게 어둠이 짙게 내려앉는다. 중동에 위치한 청춘다락에 입주한 청사진연구소의 손상호 대표는 “중동은 충분히 매력 있는 마을”이라고 이야기한다.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기
“청사진연구소는 ‘일상의 공간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만들어 보자’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가지고 있어요. 마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고민하다가 만들어진 단체예요. 일단 우리가 재밌게 할 수 있는 걸 해 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했어요.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주민과 함께 어우러지기 위한 방법을 많이 고민했죠.”
청사진연구소는 지난해 대전사회적자본지원센터에서 진행한 ‘중동해프닝프로젝트’를 시작으로 만들어진 단체이다. 중동해프닝 프로젝트는 커뮤니티 디자인 방식의 지역재생 프로젝트이다. 커뮤니티 디자인이란 사람과 사이를 잇고, 도시 안의 공동체를 만들어 지역 문제를 주민들이 직접 해결할 수 있도록 돕는 방식을 의미한다.
건축을 전공한 손상호 대표는 이전에 아이들을 대상으로 건축 공간 교육을 진행했다. 같이 활동했던 몇몇 지인에게 함께하기를 제안했고, 손상호 대표를 포함한 네 사람이 모여 청사진연구소가 만들어졌다.
청사진연구소의 첫 프로젝트는 ‘중동을 칠하다’이다. 중동을 칠하다는 마을 곳곳의 건축물, 공간을 촬영한 사진을 컬러링북 도안으로 만들어 주민들이 직접 색을 입히는 프로젝트이다. 색을 다 칠한 그림은 엽서로 제작해 액자에 넣어 주민에게 전달했다. 주민들은 쑥스러워하면서도 기뻐했다. 손상호 대표는 프로젝트에 참여한 주민 한 명, 한 명이 스스로를 작가라고 생각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한 할머니는 색을 칠하며 이웃 할머니에게 “언니 오래 살길 잘했다”라고 이야기했다. 손상호 대표의 기억에 남은 말 중 하나이다.
“중동을 칠하다는 주민들 반응이 의외로 정말 좋았어요. 마을 어르신 중에는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분들이 많아요. 그림을 제대로 배워 본 적이 없어 그런지 색을 칠한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즐거워하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죠. 중동을 칠하다는 일회성이 아니라 앞으로도 꾸준히 진행할 예정이에요. 나중에 작품들을 모아서 전시도 해 볼 계획이에요.”
마을 주민들이 색칠한 엽서는 같은 도안이더라도 느낌은 다르다. 실제 건물과 가장 비슷하게 색칠한 주민이 있는 반면에 자신의 취향에 따라 전혀 다른 색으로 빈 공간을 채운 사람도 있다. 주민들은 그저 마음 가는대로 색을 입혔다. 언뜻 보면 다 다른 동네에 있는 건물인 것처럼 보인다. 매일 마주하는 공간에 대한 시선이 달라진다. 마을 주민들이 중동에 입히고 싶은 색은 어떤 색일지 궁금해진다.
우리가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일
중동에는 길거리 경로당이 있다. 이름처럼 길거리에 있는 경로당으로 청춘다락 근처 쌀집 맞은편이다. 날이 좋은 날엔 길거리 경로당에서 마을 주민들은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누며 시간을 보낸다. 손상호 대표는 마을 주민과 함께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길거리 경로당을 자주 찾는다, 처음에는 어색해했던 주민들과도 한층 가까워졌다. 서로의 일상을 나누고, 가끔 함께 소주 한 잔 기울이며 사는 이야기를 듣는다. 손상호 대표는 앞으로 이 관계를 어떻게 발전시켜 나갈지가 고민이다.
손상호 대표는 몇 년 전 지금은 사라진 아카데미 극장에 방문했을 때 청객을 만났다. 당혹스러운 경험이었다. 그날 이후 마을해프닝 프로젝트를 위해 다시 중동을 찾았고 성매매는 여전히 성행하고 있다. 그간 손상호 대표가 만났던 마을 주민 중에는 과거 청객이었던 사람도 있고, 성매매 종사자였던 사람도 있다.
“이 거리에서 청객행위는 낮에도 일어나고 있어요. 사실 거리를 돌아다니는 데 불편이 많죠. 중동에서 자리 잡고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보니까 이 부분에 대한 고민도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중동해프닝프로젝트 중 하나로 ‘중동마라톤’을 진행했어요. 여성인권운동단체 티움과 함께한 프로젝트예요. 청객들의 호객행위를 방해하고, 성구매자들에게 위화감을 조성하자는 의미였죠.”
중동마라톤은 성매매 호객행위가 이뤄지는 곳을 중심으로 코스를 계획했다. 일순간이라도 중동 일대가 밝아지길 하는 마음이었다. 야광 밴드와 조끼를 착용한 후 동네 일대를 뛰었다. 참가자 한 명은 자율방범대 같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의도한 것처럼 큰 효과는 없었다. “청객이나 성구매자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더라고요”라고 손상호 대표는 이야기한다. 중동마라톤은 안전 문제 등 보완해야 할 점이 아직 많다. 제1회 중동마라톤을 시작으로 보완을 통해 지속적으로 이어 나갈 생각이다. 손상호 대표는 중동마라톤이 마을을 새롭게 보는 경험이길 바란다.
청사진연구소의 첫 프로젝트 ‘중동을 칠하다’
우리가 함께 만드는 변화
“어떤 사람은 중동이 멈춰 있는 마을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해요. 저는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입장이거든요. 그래서 순간순간을 기록하고,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따로 마을 기록을 하고 있어요. 대개 사진을 찍는 편이고요. 굳이 공유하지 않더라도 기록을 계속하는 이유는 자기표현 욕구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재밌기도 하고요.”
손상호 대표는 자신의 방법으로 마을을 기록한다. 그가 생각하는 마을의 변화는 높고, 좋은 빌딩이 곳곳에 들어서는 것이 아니다. 마을 주민들이 모여 일상적이었던 공간의 변화를 고민하고, 마을 곳곳을 함께 일구는 변화가 일어나길 바란다.
청사진연구소도 이제 곧 1년을 맞이한다. 하나둘 쌓여가는 기록을 보면 지난 시간을 돌아보게 만든다. 청사진연구소라는 이름을 기억해 주는 사람이 늘었고, 마을활동가부터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을 만나며 많은 것을 배웠다.
“앞으로 중동 주민 작가 프로젝트를 해 보고 싶어요. 기존에 진행했던 중동을 칠하다 프로젝트를 발전시켜서 마을 주민이 직접 작가가 되고, 그 그림을 굿즈로 제작하고 판매해서 지속가능한 수익구조를 만들 계획이에요. 마을 주민과 함께 사랑방처럼 쓸 수 있는 공간도 마련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지금 제가 하는 프로젝트에 다양한 색깔이 덧입혀졌으면 좋겠어요. 청사진연구소라는 도안에 주민들이 색을 입히는 거죠. 마을의 변화를 오랫동안 지켜봐 온 주민들과 함께 변화를 만들어나가고 싶어요.”
‘청사진’은 건축에서 도면을 그릴 때 쓰이는 용어이다. 은유적 표현으로는 밝고 긍정적인 미래의 계획을 이야기할 때 ‘청사진을 그린다’라고도 표현한다. 청사진연구소는 그 이름처럼 중동이라는 마을에서 자신들만의 청사진을 그리는 중이다.
글 사진 이지선, 청사진연구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