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45호] 다시 봄날이어서

다시

봄날이어서

 

 

꽃이 진 자리에 잎이 나면서 산과 들이 연두에서 녹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 겨우내 썰렁하던 농막 주변도 조금씩 생기가 돋아나고 있다. 한겨울에는 존재조차 잊고 있던 튤립이 꽃망울을 피웠고 언덕 사방용으로 심은 꽃잔디는 짙은 보라색을 자랑하는 중이다. 화단에 있는 명자나무 역시 꽃을 피웠고 시들어 있던 구절초엔 푸른빛이 감돌고 있다.
여기저기 꽃 잔치를 하는 동안 농사짓는 이들의 손길이 본격적으로 바빠지고 있다. 나도 손바닥만 한 밭에 감자 몇 개 심고 몇 종류의 씨앗을 뿌렸다. 작은 씨앗에서 싹이 돋고 잎이 나는 과정은 참으로 신비로운 일이다. 흙과 물 그리고 햇빛의 위대한 힘을 확인하고 싶다면 씨앗을 뿌려 보라고 말하고 싶다.

 


 

본격적으로 시작된 농사

대개의 시골에는 국가대표 급으로 농사를 짓는 이가 많다. 대규모 농사가 아니라 타고난 부지런함으로 작물을 가꾸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농막 뒤편에 있는 밭을 가꾸는 팔순의 할머니도 그중에 하나이다. 할머니의 유모차 등장은 본격적으로 농사철이 시작됐다는 것을 알려 주는 장면이다. 거의 매일같이 유모차를 끌고 오기 시작한 것은 지난 4월 초부터다. 
“아직 바람이 쌀쌀한데 왜 벌써부터 오셔요?”
“그냥 와 봤슈.”
“뭐 할 일 있으신가 봐요?”
“일은 무슨 일이 있겄슈.”
할머니는 한 번도 명확하게 대답한 적이 없다. 창문으로 살펴보면 밭을 갈거나 풀을 매는 등 쉬지도 않고 일을 하지만 대개는 “그냥 와 봤슈”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지난해 호박 두 개를 건네주면서 “맛없으면 버리던지…” 이렇게 말씀하던 분이다.
할아버지와 같이 사는데도 불구하고 늘 혼자다. 나는 농막을 지은 지 지난 3년 동안 할아버지의 발걸음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지난 4월 중순에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할머니 대신 할아버지가 유모차를 밀고 올라온 것이다. 할아버지가 유모차와 함께 오지 않았으면 누군지 짐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눈에 익은 유모차를 통해 할머니의 배우자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여느 시골 노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반가운 마음에 말을 건넸다.
“아니, 할머니는 어디 가셨나 봐요?”
“집에 있어.”
“그래서 대신 오셨군요.”
“내가 그렇게 밭에 가지 말라고 해도 할머니가 말을 안 들어. 그려서 밭에다 꿀단지를 묻어 놨나 한 번 와 본 겨.”
“평소에도 같이 다니시지 그러세요.”
“밭이라고 손바닥만 해서 둘이 서 있을 자리도 읎어.”
족히 백 평 이상은 되는 밭을 가리켜 둘이 서 있을 자리가 없다는 말을 들으며, 나는 충청도식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내가 들은 풍문으론 할아버지는 사업을 했다. 우시장에서 소를 거래하는 일을 꽤 오랫동안 해 주머니에 현찰이 항상 넉넉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할아버지는 바깥에서, 할머니는 집안일과 밭일을 하며 여러 자식들을 키우고 가르친 것이다.
다음 날은 유모차의 주인인 할머니가 밭에 왔다. 어제 할아버지가 왔다는 말을 건네며 대화를 시도했다.
“참 하늘이 두 쪽 날 일여, 별일도 다 있슈.”
“다음에는 밭에 같이 가자고 해 보세요.”
“하나마나한 소리유.”
앞으로도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밭에 함께 오는 장면을 구경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처음으로 밭에 나타났다는 사실만으로 일말의 기대감을 갖기엔 충분했다.

 

크리스의 시골생활
일주일에 하루이틀 머무는 나의 농막생활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농사를 짓는 이 중에 하나는 내 여동생의 남편인 매제다. 그는 캐나다 출신이다. 내가 머무는 농막과는 불과 500미터 남짓 거리에 있다. 그는 나보다 훨씬 먼저 농가주택을 샀고 주말마다 시골을 찾는다. 그가 새마을운동 시절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허름한 농가주택을 구입한 것은 10여 년 전, 캐나다의 별장 생활이 그리웠던지 그가 먼저 밭이 있는 시골집에 욕심을 냈다. 
농가에 붙어 있는 작은 밭에는 블루베리, 사과나무, 포도나무, 매실나무 등을 심었다. 수량은 많지 않아도 다양한 품종을 접해 보고 싶어 했다. 그는 블루베리 몇 알 놓고 맥주 마시는 즐거움을 시골생활의 큰 행복으로 여겼다. 몇 년 전 겨울에 그와 나누었던 말은 지금도 종종 떠오른다.
“형님, 빨리 봄이 왔으면 좋겠어요.”
“여기가 단열이 잘 안 돼서 춥지?”
“아니, 뿌리고 싶은 씨앗이 있어서요.”
그는 농부는 아니었지만 시골생활을 하는 동안 농부의 마음을 닮아 가고 있었다. 매제는 농사를 지어 본 경험이 있었던 게 아니라서 농사법은 주로 유튜브와 책을 통해 익혔다. 밭고랑을 만드는 것도 인터넷이나 책을 보며 배운다.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이웃들이 보기에 외국인의 이런 농사법이 조금은 웃기기도 했을 것이다. 어설픈 시골생활에서 그가 가끔 하는 것 중 하나는 바비큐 파티다. 마당 한쪽에서 바비큐를 할 수 있는 그릴을 갖다 놓고 돼지고기와 버섯을 구우며 풀벌레 소리를 듣는다.
“올해는 뭐 심을 생각인가?”
“아직 모르겠어요. 나무에 병이 자주 걸려서요.”
두 그루의 나무에서 맺는 사과 꽃은 아름다웠지만 변변히 수확하지 못했던 열매를 떠올린 모양이었다. 가을에 주렁주렁 열린 사과는 금세 병이 들어 썩는 게 대부분이었다. 세 그루의 포도나무 역시 몇 송이 거두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서너 그루씩 키우는 나무에 농약을 할 수도 없는 일, 매일같이 지켜보며 관리를 할 수 있는 형편도 아니다 보니 소소한 걱정이 생겼다.
일주일에 한 번씩 오는 시골 생활에 중학생 조카는 비교적 잘 적응하는 눈치였다. 얼마 전에는 문자가 왔다.
“외삼촌, 나무 가지치기 했는데 나무 사 가세요. 화덕에다 고기 굽는 데 필요하잖아요.” 
스스럼없이 농담을 하는 조카의 재치가 귀여웠다. 3년 전 농막을 지을 때 했던 녀석의 조언은 받아들이기엔 벅찼지만 인상적이었다.
“외삼촌! 집 지을 때 수영장을 하나 만드세요. 우리 집에는 수영장이 없어서요. 여기 와서 수영하고 놀면 좋을 것 같아요.”
“저기 들판에서 농사짓는 분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는데 여기서 수영이나 하고 있으면 보기가 좀 그럴 텐데….”
“아, 그런가요. 그러면 그 사람들도 일하고 난 다음에 여기 수영장에 와서 시원하게 수영하라고 하면 되잖아요.”
얼마 후 어린 조카는 자신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은 작은 농막을 보고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게 집을 다 진 거예요? 무슨 창고 같아요.”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만 누워도 방이자 거실이 가득 차 버리는 작은 공간이니 그런 감상평이 나올 법도 했다.
지난달 나는 농막 주변에 자작나무 모종 20여 그루를 심었다. 나무젓가락 크기의 모종이 하얀 껍질을 드러내기까지 몇 년의 세월이 걸릴지 알 수는 없다. 그중에는 성장하지도 못한 채 죽는 나무도 있을 테고 다른 모종보다 훌쩍 키가 크는 것도 있을 것이다. 똑같아 보이는 나무와 식물이 저마다 키가 다르고 번식 속도가 다른 것은 사람의 성격이 제각각이듯, 녀석들이 서 있는 자리의 특성이나 나무의 마음이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제 녹음이 더욱 짙어지면 내 손에도 블루베리 몇 알 또 한 손에는 맥주잔을 들고 있을지 모른다. 지는 것들의 생애를 돌아보라는 노을의 암시를 눈치채지 못하면서 얼굴은 더욱 붉어질지도.

 


글 정덕재(시인, 르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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