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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45호] 당신의 제주도는 어떤 색깔인가요?
당신의 제주도는
어떤 색깔인가요?
로와의 책탐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
김운하 지음 / 월간토마토
누구에게나 생은 가차 없는 것이다.
존재하기, 그것은 사라지는 방황이다.
사랑하기, 그것은 가혹한 고독의 내면성이다.
글쓰기, 그것은 무한히 길게 잡아 늘여진 불면의 밤들이다.
사막은 지나간 모든 발자국들의 흔적을 지운다.
- 제2부 제16장 〈가차 없는 생〉
“남국의 섬 제주도, 나는 그곳에서 밤과 고독, 바다라는 존재의 참된 깊이를 알았다.” 김운하 작가의 신작 소설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는 배경이 제주도다. 제주도. 한국 최고의 인기 관광지. 섬 한가운데에 화산과 호수가 있고, 10여 분만 걸으면 바다를 만나며, 온종일 파도 소리가 들리는데, 마음만 먹으면 매일 바다에서 떠오르고 바다로 빠져드는 태양을 감상할 수 있는 곳. 누군들 그곳에서 살고 싶지 않으리! 제주도에서 하룻밤 보내지 않은 한국인은 거의 없겠지만, 몇 달을 살아 본 사람은 많지 않을 거다. 제주에서 일 년 가까이 거주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이 소설을 썼다니 부러울 따름이다.
책 외양부터 살펴보자. 물빛 표지에 비정형으로 일렁이는 흰색 파동이 물 위에 떠다니듯 그려졌고, 오렌지색으로 강조된 네모 안에 제목이 적혀 있다. 제주 바닷가에서 오렌지빛 파카를 입은 J의 뒷모습을 떠올리는 화자의 심경을 그대로 책 표지에 담아낸 듯하다. 책 크기와 무게도 한 손에 들기 적당해서, 카페에서 왼손에 펼쳐 든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오른손으로 잔을 들어 커피를 마시는 우아한 연출이 가능하다. 폰트도 책과 어울리게 차분하고, 장과 장 사이나 문단 사이의 적절한 여백도 글자가 전하지 못하는 언어들을 낮은 목소리로 독자에게 읊조린다. 살펴볼수록 출판사와 편집자가 정성스럽게 만든 작품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제 이 예쁜 책을 펼쳐 보자. 좋은 책이라면 늘 그러하듯, 또 다른 세상이 열린다.
우선은 독특한 형식이 눈에 띈다. 흔히 우리가 소설에서 기대하는, ‘누가 무엇을 했는데 어떻게 되었다’는 서사는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는다. 줄거리를 거칠게 요약하자면, 번잡한 도시에 살던 한 남성 화자가 책 열 권을 가지고 훌쩍 제주도에 와서, 제주 곳곳을 배경으로 온갖 사유를 하다가 제주도를 떠난다. 그의 심장 속에 수선화, 오렌지색 파카, 바다, 동백꽃을 간직한 채로. 특별한 갈등구조나 사건은 없다.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미국의 송어낚시》처럼, 줄거리를 요약하기도 어렵고, 줄거리를 요약할 필요도 없는 형식.
김운하 작가는 전작 《137개의 미로카드》 때와 마찬가지로, 문단과 독자에게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과연 소설의 경계는 어디일까요?”라고. 소설 전체를 꿰뚫는 것은 하나의 사건이나 주인공의 행위가 아니다. 길지 않은 장마다 현재의 사건보다는 시공간을 넘나드는 철학, 예술, 역사와 사유가 더 자주 표현되어 있다. 각 장의 연결은 갈등상황의 진행이라기보다는 감정과 생각의 흐름이다. 작가는 사유의 파편들을 소설에 흩뿌려 두었다. 사건과 장소도 파편들 속에 숨어 있다. 모자이크나 퍼즐처럼, 작가의 생각은 책을 읽은 사람의 마음속에서야 비로소 맞춰진다. 독자마다 분명 조금씩은 다르게 말이다. 아마도 이것이 작가가 의도가 아닐까. “문학이 창조되는 것은 나의 글쓰기로부터가 아니라 어쩌면 독자들의 글 읽기로부터 다시 시작되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137개의 미로카드》 p66)
이 책은 제주도를 한 발자국씩 걸으며 제주도의 숨은 모습을 안내하는, ‘김운하 작가와 함께하는 제주도 여행’ 류의 친절한 안내서는 더더욱 아니다. 그런 여행 책자는 이미 수도 없이 출판되어 있지 않나. 작가가 겪고 느낀 제주의 편린은 소설 곳곳에 흩뿌려져 있어서, 책의 어떤 곳을 펴서 읽어도 독자는 제주도의 한 움큼을 거머쥐게 된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닷가, 산굼부리, 마라도, 추사의 유배지, 동백꽃 길을 달리는 시내버스. 제주도의 자연과 역사가 많은 곳에서 엿보인다. 예쁘고 아름답기만 한 자연이 아닌, 무시무시하고 가차 없는 자연의 모습도, 4·3 사건과 유배지 역사까지도. 어쩌면 독자가 책 속에서 도착하는 곳은 제주도가 아닐 수도, 제주도일 수도 있다. 제주 바다에서 출발한 작가의 사고여행은 허먼 멜빌이 바라보던 바다로 옮겨 가고, 추사 김정희의 유배지에서는 나르키소스의 수선화와 물거울을 들여다보는 자들인 예술가를 떠올린다.
나르키소스는 호수의 수면에 비친 자기 모습과 사랑에 빠졌다.
예술가들은 물거울에서 세계의 고뇌를 보는 자, 거울에 비친 환영을 꿈으로 꾸는 자, 혹은 자신이 세계의 거울임을 깨닫는 자들이다.
그것이 바로 예술가들의 운명이다.
- 제1부 제8장 〈물거울〉
나는 무수히 많은 밑줄을 치며 읽었는데, 특히 그중에서도 내 마음에 가장 깊게 박힌 문장들은 책 뒤표지에 실리고 이 글의 맨 처음에도 인용한 부분이다. 출처는 제2부 16장의 <가차 없는 생>. 그뿐이랴. 책에서 여러 번 만나게 되는 카이로스의 시간과 운명에 관한 사유와 표현에 나는 공감하고 탄복했다.
불현듯 내 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웠던 순간kairos들, 황홀했던 ‘때’들을 떠올려 본다; 한 권의 책에서 심장을 전율케 하는 하나의 경이로운 시구를 만나던 순간; 활짝 열린 그녀의 흰 두 다리 사이로 내 영혼이 빠져들고, 그녀의 가늘고 긴 손가락들이 전율하며 내 몸을 힘껏 끌어당기던 순간; (중략) 길고 고통스러운 갈망과 기다림 끝에 마침내 하나의 문장을 백지 위에 옮겨 적기 시작하던 순간; (중략) 나는 이런 순간들에서만 얼핏, 영원의 빛이 내 영혼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끼곤 했다. (중략) 이런 순간들이 가져다주는 순수한 기쁨을 제외한다면, 단순히 지속일 뿐인 생의 시간은 얼마나 지루하고 궁핍한가, 동시에 그런 궁핍이 부재하다면, 영원의 순간들은 또 얼마나 보잘것없는가.
- 제1부 제2장 〈단 하룻밤 머물렀다 가는 나그네의 추억〉
나는 동의한다. 고작 한 줌에 지나지 않을 특별한 순간들만이 인생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을, 그리고 인생에는 오직 그뿐임을. 단테가 《신곡》에서 보여 주었듯 인생이란 한 줄로, 혹은 몇 단어로도 충분히 요약된다. 그런데 혹시 인용된 문장 중에 찾으셨는가, 에로틱한 장면을? 내 머릿속에는 두 남녀가 강렬히 몸을 연결하고 있는, 무척 선정적인 장면이 그려져 버렸다. 그렇다. 나는 어디서건 에로티시즘을 찾아내는 독자다. 어떻게 이런 뜨겁고 축축하고 끈적한 장면을 전혀 야하지 않게 쓸 수 있는지, 작가의 문장력이 부러울 뿐이다. 두 다리 사이로 빠져들었다는 것이 과연 영혼뿐인지, 혹은 화자에게는 내가 생각하는 신체의 그 부분이 곧 영혼이라는 이야기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말이다. 저자는 아마 잘 모르나 보다-저 순간에 누구에게나 카이로스가 미소 짓지는 않는다는 것을. 오히려 크로노스가 무심한 표정으로 멀뚱히 내려다보고 있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제주도에서 1년 가까이 살던 기간이 이 책에 녹아 있다는 작가의 말에 나는 시샘 섞인 부러움부터 느꼈다. 나의 20대 때 꿈 중의 하나는 제주도에 직장을 얻는 것이었다. 맑은 공기와 푸른 바다를 매일 만날 수 있는 곳이니까. 나는 계곡, 호수, 바다 같은 물을 좋아하는데, 그중에서도 바다를 가장 사랑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파도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그저 그대로 바다와 하나가 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인간이란 참 모순된 동물이다. 바라보기는 그렇게나 좋아하면서도 정작 수영은 전혀 못 하니 말이다. 그래서 지금 나는 바닷가에 살고 있느냐면 그조차 아니다. 나는 대한민국의 한가운데라 부를 법한 장소에 살고 있다. 삼면이 바다인 반도지만 아마도 이 도시는 바다에서 가장 먼 곳 중 하나가 아닐까. 최소 세 시간은 운전해야 하니 말이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두 단어 사이에는 ‘운 좋으면’이라는 문구가 생략돼 있는 법.
제주도에 가 보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인생에 남는 추억 하나씩은 가지고 있을 장소, 제주도. 김운하 작가에게는 제주도가 어떤 색깔일까? 아마 J가 입었고 뇌리에 박혀 있다는 오렌지색이 아닐까? 내 기억 속 제주도는 전혀 화사한 색이 아니다. 굳이 표현하면 ‘멍든 듯한 푸른색’이랄까. 3년 전, 나는 경치 좋고 시설 비싸기로 유명한 해비치 리조트에서 2박 3일을 보냈다. 무려 8인의 남성들과 함께 한 방에서 땀을 흘려가며. (왠지 에로틱하게 느껴지신다면 성공!) 마주 보는 그들의 얼굴 뒤편으로는 ‘남국의 푸른 바다’가 끝없이 펼쳐졌다. 순식간에 끝내버리던 식사 시간을 제외하면 우리는 이틀 내내 그 방에서 함께했다. 건물 전반에 깔리는 조용한 고전음악을 배경으로 창틀을 액자 삼은 제주 바다는 소리도 냄새도 전해 주지 않았다. 그저 실사 영상 같았을 뿐. 그곳은 제주이지만 제주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제주였기에 서글펐다. 이틀 내내 밤낮 가리지 않고 한 방에서 함께 불타올랐던 우리는, 수백 쪽에 달하는 기획서를 마침내 완성한 3일째 아침, 각자 비행기 시간에 따라 하나둘 떠나기 시작했다. 나는 공항 가는 택시 안에서야 비로소 차창을 내리고 바다 내음을 맡았고, 옥빛 파도 소리는 나를 재워 버렸다. 짐작하시듯, 내 어깨를 흔들어 깨워 준 분은 기사님이었다. 내 청셔츠의 오른쪽 어깨는 내가 흘린 침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멍든 듯한 푸른색’으로.
다른 분들은 제주도가 어떤 색깔로 기억될까? 아니, 그보다 먼저, 기억이란 대체 무엇일까? 두 사람이 함께 있었지만 서로 다른 장면을 기억하는 경험,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저자는 연인 J의 목소리로 기억이란 무엇인지 질문을 던졌다. “우리의 기억 속에서 내게 있던 곳엔 네가 없고 네가 있던 곳엔 내가 없다면, 우린 과연 어디에 있었던 걸까?” (제1부 제14장 〈한 장면〉) 작가가 책에서 질문한 이유는 물론 대답하고 싶어서일 거다. 작가는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야 답을 알았다며 이렇게 밝힌다.
기억은 시간과 함께 닳고 낡아 간다. 사라지고, 변형되고, 증발해버린다. 기억된 경험은 순수경험과는 다른 것, 편집되고 채색된, 허구와 뒤섞인 무엇일 뿐이다. (중략) 나는 지금, 파편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내가 아닌 타인들의 기억과 행위, 사건들을 조각보처럼 이어붙이고 있다. (중략) 나는 타자들이고, 소설 속의 ‘나’ 역시 실은 ‘그들’ 혹은 ‘누군가’라고 써야만 옳다.
즉, ‘나’는 허구이고, 복수이며, 지시 대상을 잘못 찾은, 길을 잃어버린 기호인 것이다.
- 제1부 제14장 〈한 장면〉
우리는 각자의 머릿속에 소설을 써 가며 그 소설에 살고 있는 주인공들인 셈이다. 어쩌면 파편적 사건의 나열인 삶을 의미라는 실로 꿰어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 가는 게 인생일지도 모르겠다. 화자는 소설 마지막 장 <마라도>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계속 존재해 왔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며, 말없이 순환하는 대자연의 한 부분으로, 바다에서 건너와 다시 바다로 나아가는 생명으로, 혼자이면서도 결코 혼자가 아닌 누군가로, 누군가도 아닌 어떤 누군가로, 언어의 안과 밖에서, 춤을 추듯이 그렇게 살며 사랑하며, 내가 예감하고 수락한 운명을 부둥켜안고 계속 나아가게 될 것이었다.
혹은 작은 병 속에 담긴 채 바다를 떠도는 수신인 없는 편지처럼 떠돌면서.
- 제2부 제20장 〈마라도〉
작가의 에세이 같기도, 화자의 일기장 같기도 한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를 한 장씩 읽으면서 독자는 자기도 모르게 화자가 사유하는 길을 따라 산책하게 된다. 이러한 스타일의 작품을 만드는 소설가는 매우 드물다. 특히나 리얼리즘 문학이 절대다수인 한국에서는 더더욱. 이 소설은 독특한 형식만으로도 독자를 매료시킨다. 물론 작가가 창조하고 조각낸 후에 독자가 다시 각자 맞춰 보도록 설계해 둔 사유의 세계는 더욱 매력 있다. 독자는 기꺼이 작가가 설계한 미로 안에서 길을 잃는다.
나는 책을 읽는 내내 미소 짓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말 김운하 작가의 작품이군’ 하는 생각에 말이다. 나를 단번에 사로잡았던 《137개의 미로카드》처럼,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도 내가 몹시 사랑하는 책이 되었다. 욕심 많은 독자인 나는 김운하 작가의 다음 책들을 기다린다. 그만이 쓸 수 있는 소설을.
글 로와